영국 글래스고에서 열린 26차 기후변화협약당사국총회가 끝났다. 석탄이 살아남았다. 석유와 가스의 수명도 연장됐다. 그 결과, 2050 이전 탈탄소 체제 이행은 불가능하다는 비극적인 현실 인식이 온 세계에 비등하다. 한국에서는, 이대로는 기후파국이란 공포를 지렛대 삼아 보수정치와 연대한 한국 산업계의 원전 재활론의 비판소리 드높다. 화석연료의 역할 유예를 통해 탈탄소 사회를 향한 진보의 속도를 늦추고 핵을 탈탄소의 수레로 둔갑시키는 모든 시도는 기후변화를 납치하는 짓이다.
2050 탄소중립을 향한 에너지 전환의 길로 달려갈 가장 확실한 전략이자 수단은 사회가 통째로 '정의로운 전환'에 돌입하는 것이다. 탈탄소 에너지 체제를 향한 전환의 길에 모든 이해당사자들을 불러올 기후행동의 기준율, 그것은 '전환은 정의로워야 한다'는 것이다. 세계 시민들은 기후정의를 세우기 위한 기후행동의 지구 전선에 서있다.
온실가스 감축목표와 정의의 전선
제26차 기후변화 당사국 총회(COP26)가 끝났다. 어떤 국제회의가 그렇지 않겠는가만, 이번 회의도 각국 이해관계의 충돌 속에 어떤 합의도 쉽지 않았다. 기후위기는 분명 인류와 비인간 생명 모두가 당면한 위기지만 막상 그어지는 전선은 생각보다 복잡하고, 때때로 다양하다. 그리고 대단히 안타깝게도 현실에서 '공동의 위기'라는 막연한 명분은 잘 작동하지 않는다.
오래된 악당과 떠오르는 악당
이번 COP26 막바지에 끝내 최종합의에 이르지 못한 것은 '석탄 퇴출(coal phase-out)'이라는 단어였다. 주최국 영국은 탈석탄에 대한 합의를 이끌어내는 것을 목표로 했으나 회의 막바지 인도의 강한 반발과 이를 지지한 중국 등이 '석탄 감축(coal phase-down)'으로 표현을 후퇴시켰다. 연간 온실가스 배출량 1위 중국과 3위 인도가 이렇게 '강짜'를 부리는 현실은 참담하다. 두 나라가 기후악당이라는 것을 부정할 생각은 없다. 그런데 중국과 인도의 억울함은 없을까?
지금이야 중국이 매년 미국보다 많은 온실가스를 배출하지만, '누적배출량'이라는 개념으로 보면 전세는 역전된다. 결국 기후위기는 대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 상승으로 발생하고, 그렇다면 누가 그동안 더 많은 온실가스를 대기 중에 누적시켜왔는지도 봐야 한다. 미국과 EU 각각이 인도와 중국의 누적배출량을 합친 것보다 많은 온실가스를 대기 중에 풀어놓았다. 인도의 누적배출량은 일본의 그것보다도 적은 수준이다. 그런데 그동안 지구에 훨씬 큰 부담을 가중시켜온 미국과 EU가 이제는 기후위기의 명분을 독식하고 짐짓 정의로운 얼굴로 중국과 인도의 높은 '연간' 배출량을 힐난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과 인도, 미국과 EU를 비교하며 서술하긴 했지만, 실상 이는 '경제 성장'을 둘러싸고 선진국과 개도국 사이에서 벌어지는 갈등의 요체이기도 하다. 그럼 선진국이 누적배출량만큼의 책임을 더 지면 될 것 아닌가. 탈탄소 시점은 앞당기고, 개도국의 기후위기 대응을 지원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문제는 결국 이 또한 '비용'이라는 점이다. 선진국들이 그동안의 책임에 그에 걸맞게 지갑을 열었는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 가령 2020년부터 선진국들은 연 1000억 달러의 기후기금을 개도국을 위해 지원하기로 했지만 COP26에서 이 계획은 3년 뒤로 미뤄졌다. 개도국들이 1.5℃ 목표라는 약속을 지키지 않는 목표를 내놓았다면, 선진국들은 재정적 협력에 관한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이다. 뿐만 아니라 많은 선진국의 감축 목표마저 몇 개의 다배출 개도국보다 비교적 나은 정도일지 몰라도 1.5℃ 목표에는 부합하지 못한다.
고래 싸움 틈에서 한국은 무엇을 얻었나
그러는 한편, 한국을 비롯한 선진국들은 COP26에서 숙원 사업의 실마리를 풀었다. 그것은 '파리기후협정 세부이행규칙 6조'. 국제탄소시장 지침이다. 그동안은 파리협정 세부이행규칙 중 유일하게 이 조항이 합의되지 않았던 탓에, 선진국이 개도국에서 진행하는 탄소감축 사업은 선진국의 '감축 실적'으로 인정되지 않았다. 이를테면, 선진국이 개도국에 가서 산림을 복원 또는 보전한다면? 개도국의 영토에서 일어난 감축이니 개도국의 온실가스 배출을 계산할 때도 빼고, 선진국의 투자로 이뤄진 일이니만큼 선진국의 온실가스 배출량을 계산할 때도 반영해줘야 할까? 그건 전 지구적 차원에서 보면 '이중계산'이다. 온실가스를 10만큼 줄이는 하나의 사업을 두고 두 나라가 각각 10을 줄였다고 주장하는 문서를 모두 인정한다면, 문서상엔 인류가 온실가스를 20만큼 줄인 것이 되지만, 실제로는 10밖에 줄어들지 않은 상태가 되는 것이다.
COP26에서는 이 이중계산의 문제를 '국외감축' 사업을 하는 선진국과 개도국 양국의 합의로 풀도록 했다. 몇몇 선진국들은 자국 산업계의 부담을 고려해, 국내에서 감축하기보다 국외에서 감축 실적을 사오는 방안에 군침을 흘려왔다. 한국도 '국가온실가스 감축목표(NDC)'를 제출하며 2030년까지의 감축량 중 약 10%에 육박하는 양을 국외감축으로 해결하겠다는 계획을 내놨었다. 저 정도면 2030년에 국내의 모든 건물이 배출하는 온실가스양에 육박한다. 어찌나 급했던지 COP26에서 국제탄소시장에 관한 합의가 있기도 전부터 한국은 NDC에 이를 반영해두었던 것이다.
현재 한국 산림청이 진행하고 있는 '개도국 산림파괴 방지를 통한 온실가스 감축사업(REDD+)'을 포함한 국외감축 사업은 실제로는 현장의 산림이 파괴되는 것을 막지 못한다는 실효성의 문제부터, 현지 주민의 토지강탈·노동착취 등 많은 논란에 휩싸여있다. 그러나 이 같은 선진국의 무책임성에 대해 '기후불의와 환경제국주의'라는 논문을 써서 비판했던 기후정의 학자는 이제, 여전한 불의의 현실을 지적하기보다 사업의 '원칙은 개선'되었다며, 국외감축을 대거 포함한 NDC를 통과시킨 탄소중립위원회의 공동위원장이 되어있다. 한국은 이렇게 온실가스 감축 실적을 '해외직구'할 수 있게 되었지만, 국제 사회에서의 책임과 정의의 원칙을 잃었다.
한국의 감축목표가 말하지 않는 것들
국내 사정으로 돌아와 보자.
기후위기를 둘러싼 갈등의 핵심 질문이다. 하지만 한국의 감축목표에는 이러한 질문에 대한 대답이 없다. 전환(전력), 산업, 건물, 수송, 농축수산, 폐기물 등 '부문'으로 분류된 감축목표는 나름대로 실효적 구분일 수 있지만, 책임과 피해의 문제에 대답할 만큼의 입체성은 결여되어 있다.
가장 많은 감축을 이끌 '에너지전환'의 비용을 누가 더 부담할 것인가? 국가 총 배출량의 35%를 차지하는 산업부문은, 모든 부문 중 가장 적은 14.5% 수준의 감축만 하면 되는데 과연 누가 웃는 자가 되는 걸까? 그 중에서도 철강 산업은 10년간 2.3% 감축이라는 '면제' 수준의 감축량 할당을 받았는데, 국가 총 배출량의 15%를 차지하는 포스코와 현대제철이 이렇게 '철강 산업'이라는 '부문의 이름' 뒤에 숨겨져 있어도 괜찮은 것일까?
사실, 기후위기 대응이라는 측면에서 한국의 NDC는 몇 편의 시리즈로 펴내야 할 만큼 문제적이다. 대응 목표의 불충분함, 불확실성, 달성 수단의 모호함과 같은 문제가 곳곳에 산재해있다. 이런 문제는 단순히 정부와 탄소중립위원회가 시간에 쫓겨 졸속으로 안을 만들었다는 데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COP26에서 선진국과 개도국의 갈등이 부분적으로 드러났듯, 국내 감축의 문제도 '부문별 수치'만으로 포섭되지 않는 '계층 간 불평등'의 문제가 있는 것인데 우리 NDC는 이 문제를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NDC'를 넘어서는 정의로운 전환을 상상하자
가장 많은 온실가스를 배출하는 부문이자, 그만큼 가장 많이 줄여야 하는 전환 부문의 핵심 기조는 '석탄 퇴출'이 아니라 '석탄 축소'다. 한국 정부는 중국과 인도에 감사해야 할 지경이다. 그런데 이 불충분한 에너지전환 목표에는 '현장'마저 없다.
석탄발전량 비중이 현행 35%에서 21.8%까지 떨어진다는 것은 향후 10년 사이 몇 개의 발전소는 폐쇄되거나, 폐쇄까진 아니더라도 각 발전소들의 '쉬는 날'이 늘어난다는 것이다. 여기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전환에 관한 대책은 온실가스 감축 계획의 일부여야만 한다. 또, 막대한 오염물질을 배출하는 대형 발전소지만 거기서 나오는 경제적 편익에 의존하는 지역들의 전환도 과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탄소중립위원회에 '공정전환분과'가 있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내용이 없다.
석탄의 빠른 퇴출과 더불어 청정 에너지원으로서 재생에너지의 확대는 갈급한 일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 지난 기간 동안 쌓여온 해묵은 문제를 풀지 않으면 재생에너지 중심으로의 에너지전환은 '정의롭다'고 평가하기 어렵게 될는지도 모른다. 얼마 전 농민총궐기에 태양광 패널 모형으로 만든 칼을 목에 차고 나타난 농민들이 그 아픈 현실을 증언한다. 정부의 적절한 개입과 통제 없이 시장이 주도하도록 내맡겨진 재생에너지 확대는 어느 결에 무분별한 개발주의의 언어로 지역 공동체와 생명의 터전에서 받아들여지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은 보급 목표를 늘리는 것만큼이나, 재생에너지 시장제도의 계획적 디자인과 입지에 관한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
2030년까지는 석탄발전이 사라져야 한다는 기후과학의 경고, 그리고 다른 위험한 에너지가 그것의 대체자가 되어선 안 된다는 역사적 경험, 에너지 소비를 낮추고 2050년보다 빠른 시점에 탈탄소에 도달해야 한다는 책임성. 우리는 이것들을 원칙으로 해야 한다. 여기에는 막대한 재원이 소요된다는 것을 확인하고, 그 재원을 부담해야 할 책임계층, 기업들을 호명해야 한다. 더 이상 정부가 노동자, 농민, 비수도권 주민, 저소득층, 청년·청소년을 '기후위기의 피해를 최소화해야 할 계층'으로 구분해선 안 된다. 저 말인즉, 불가피한 피해를 전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탄소배출에 따른 기업의 부과금을 대폭 확대함으로써 '오염자 부담'의 원칙을 준수하고, 전환을 위한 정부 재정 지출을 늘리고 조직을 편성해야 한다. 일종의 '기후 비상 내각' 체제의 수립이다. 정의로운 전환은, 시장과 기술의 새로운 블루 오션을 터주는 것이 아니라 소외되어 온 주체들에게 시대의 주도권을 돌려주는 것이다. 에너지전환도, 국외감축도, 다른 배출부문의 온실가스 감축도 그러한 '정의'의 관점에서 다시 점검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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