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울린 사이로
1985년, 대학 4학년 졸업반이 되었을 때, 전두환 정권의 폭압은 더욱 거세어졌다. 학생들의 반독재 민주화 시위를 사전에 봉쇄하고, 전국연합조직을 결성한 대학생 조직이 노동운동 농민운동 빈민운동 등 사회진보운동 조직과 연대하는 것을 차단할 목적으로 전국학생총연합(약칭 전학련)과 산하의 ‘민족통일·민주쟁취·민중해방투쟁위원회’(약칭 삼민투)를 각종 반정부 사건의 배후조종 세력으로 지목함과 동시에 국가보안법 상의 ‘용공 이적단체’로 규정했다.
서울 시내 가두시위와 새마을본부 점거사건 등으로 이미 수배 중이었던 나는 마지막 학기 종강을 한 달 앞둔 상황에서 노동부장관실 점거농성 사건으로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집시법 등으로 2심 재판에서 1년6개월 형을 확정받았다. 영등포구치소를 거쳐 기결수가 되어 만기 출소할 때까지 청주교도소에서 징역을 살았다.
1986년 건국대 애학투련 사건으로 학생 수감자가 대폭 늘어나면서 교도소 독방이 부족할 정도가 되었다. 우리들의 지속적인 빵투에 지친 교도소 측은 재소자 관리를 위해 우리들 빨간 명찰을 단 기가 센 학생 죄수들 일부를 일반 사동과는 떨어진 병동으로 몰아넣었다.
우리는 복역 규정에 따라 매일 따로 30분씩 운동시간이 주어졌지만, 일반 재소자들처럼 동료들끼리 같이 운동할 수 있도록 시간을 통일시켜달라고 요구를 했고, 이 요구가 받아져, 우리는 매일 같은 시간에 한 장소에서 운동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같이 걷기도 하고 구보도 하고 담벼락에 기대어 햇볕을 쬐는 해바라기도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동지들에게 탈춤을 배우지 않겠느냐고 제안을 했다. 지겨운 감옥생활에 눈이 번쩍 뜨일만한 아이디어였다. 모두 대찬성이었다. 탈춤반 출신 후배(아주대 83 이영훈)가 강사로 나섰고, 모두들 봉산탈춤 기본춤을 배우고 익혔다. 독재권력에 저항해 싸운 전사들이 교도소 높은 담벼락 안에서 “낙양동천 이화정~” 더엉딱 덩딱~ 얼쑤~ 입장단을 외치며 만사위 고개잡이 발들기 황소걸음 외사위 곱사위 양사위.... 몸은 비록 갇혀있었지만, 맑고 자유로운 영혼들은 좌절과 포기를 몰랐다.
1987년 가을, 출소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복지부장관 직인이 찍힌 사면복권장이 부산 집으로 날아들었다. 모교에서도 민주화운동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하여 제적 처리된 학적이 복원되었다는 연락이 왔다. 못다한 마지막 학기 등록금도 장학금 처리하여 수강신청이 가능하도록 해 놓았으니 졸업을 하라는 것이었다. 졸업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 진지하게 고민하였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착한 아들이 대학에 들어가 학생운동에 징역살이까지 험난한 행보를 이어가자 까맣게 타들어가는 속을 술과 눈물로 겨우 견디어 오신 부모님이셨다. 가슴에 맺힌 한을 조금이라도 풀어드리기 위해서는 졸업장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부족하나마 졸업장 한 장으로 부모님의 아픈 속을 달래드렸다. 내 생애 가장 잘 한 일 중의 하나였다.
6.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걸어 봄 신명이
졸업 후 향후 진로에 대한 고민은 의외로 짧았다. 학창시절 ‘애오개 소극장’을 뻔질나게 드나들던 그때부터 나의 미래 활동영역을 문화운동 쪽으로 정해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구체적인 결정은 당연히 ‘놀이패 한두레’(이하 한두레) 였다. 1988년 봄 드디어 한두레 단원이 되었다.
한두레 연습공간에서는 봉산탈춤 강령탈춤 양주별산대 등 일반인 대학생을 위한 탈춤강습과 작품창작을 위한 다양한 시도들이 일상적으로 이루어졌다. 무엇보다도 바쁘고 중요한 사업은 공연활동이었다. 틈을 내서 창작활동을 위한 공.활(공장활동) 체험을 하기도 하였고, 틈틈이 전통혼례식을 주관하기도 하였다.
탈춤과 마당극운동의 대부 채희완 선생님을 가까이서 직접 뵙게 된 것도 그때 한두레 단원이 되고 부터였다. 재학생 시절 비록 책자 속 문장으로만 만나던 선생님이었지만, 그 분의 논평과 주장은 문화예술운동 방법론에 대해 목말라하던 나 같은 이들에게는 그야말로 가뭄에 내리는 단비였고, 든든한 이론적 배경이자 실천적 길잡이였다. 그런 선생님과 같은 단체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나에게는 큰 자랑이자 자부심이었다.
한두레는 채희완 선생님을 필두로 존경하는 많은 선배님들이 계셨다. 한두레 모든 작품 안에는 시시때때로 들러서 조언과 질책과 칭찬과 술을 아낌없이 한 보따리씩 풀어놓는 탈꾼 선배들의 속 깊은 사랑이 녹아있었다. 채희완 정연도 구재연 심규호 박정곤 최현숙 이종현 남기성 홍준의 김경애 이진숙 김순희 김찬우 신영식 마승락....... 한두레 선배님 후배님들과의 아름다운 추억과 에피소드들을 이 짧은 기고문에 다 넣을 수 없어 안타까울 따름이다.
제1회 민족극한마당 한두레 출품작 심규호(외대 78학번) 연출 ‘한춤’의 악사로 첫 역할을 맡았다. 같은 해 박정곤(서울대 80) 연출 ‘우리공장이야기’에서 처음으로 배역을 맡아 출연하였다. 89년에는 박정곤 연출 ‘아버지의 행군’과 ‘일터의 함성’ 두 작품에도 배우로 출연하였다. 나의 한두레 시절은 노동자 대투쟁의 시기였다. 극장 공연보다도 파업 투쟁중인 노동현장 공연이 더 많았다. 봉고차에 악기와 의상과 소품을 싣고 노조, 대학교, 지방극단 등 밀려드는 초청공연으로 전국을 떠돌며 공연하느라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시절이었다.
당시 연극비평과 대중문화비평으로 맹활약을 하시던 이영미(고대 국문 79) 강영희(서울대동양사학 79) 두 분 선배님이 주도하는 ‘민족극연구회’ 활동을 같이 하였던 소중한 시간들도 기억이 난다. 다양한 자료를 읽으며 서양연극의 역사, 리얼리즘, 마당극, 민족극 등에 대한 식견을 넓혔고, 민족극한마당 출품작에 대한 비평과 ‘민족극대본선’ 편집 작업에 작은 힘을 보태기도 하였다. 노동자 관객이 입추의 여지없이 들어차 뜨거운 열기 가득했던 연세대학교 대강당, 박인배 선배님께서 연출하신 노래판굿 꽃다지 1회(1989년) 2회(1990년) 공연에 출연하였던 것도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남아있다.
7. 정처 없이 걸어가네 걸어만 간다
1989년 ‘일터의 함성’을 관람하러온 장동흥(영화집단 장산곶매) 감독에 의해 노동영화 ‘파업전야’에 캐스팅되어 잠시 팔자에 없는 영화배우가 되기도 하였다. 인천 파업현장에서 추위에 떨며 고생고생하며 영상을 찍고 충무로에서 음향 더빙 작업까지 마쳤을 즈음에는 이미 1990년 새해가 밝아오고 있었다. 장산곶매 팀은 정부의 엄청난 탄압과 필름 탈취 시도에도 불구하고 원본 필름을 끝까지 지켜내었고, 그해 여름 마침내 영화가 개봉되었다. 대한민국 최초의 노동영화답게 전국적으로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배우로서가 아니라 문화운동 활동가로서 정말 가슴 벅찬 시간이었다.
20대 후반 몸은 바쁘고 마음은 늘 행복하였으나 수입이 일정하지 않은 탓에 생활은 상당히 고달팠다. 숙식은 거의 2년간 한두레 연습실 혹은 후배 자취방에서 해결하였고, 나중에는 더 이상 오갈 데가 없어서 박인배 이영미 두 분 선배님의 원당 신혼집에서 한동안 무전취식하며 얹혀살기도 하였다. 그 배려와 고마움에 대한 마음의 빚을 갚지도 못한 채, 몇 년 전 어느날 갑자기 박인배 선배님을 먼저 떠나보내고 그리움과 죄스러움에 참 많이 울었다.
1991년이 되면서 한두레 활동을 비롯한 모든 문화예술운동을 잠정적으로 중단하였다. 결혼할 여인을 만났고, 더 이상 의식주 문제에 대한 책임을 나 몰라라 하며 그녀에게 계속해서 떠넘길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직장을 갖기위해 시도도 해보았지만 블랙리스트에 오른 탓인지 정상적인 취직은 불가능하였다. 노조 풍물강사, 구로공단 트럭운전수, 을지로 판촉물상회 알바, 출판사 교정작업, 영어학원 강사, 방송 시나리오작업, 선거홍보팀 활동, 등등 1년 남짓 다양한 직업을 전전하였다. 하지만 살림살이는 전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와중에 결혼을 하고 아들이 태어나면서 경제적 곤궁함에 벗어나기 위해 새로운 결단이 필요하였다. 1993년 마지막 탈출구라 생각하고 대학입시를 준비하였다. 성적이 나쁘지 않아서 이듬해 1994년 바라는 대로 약학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다. 1998년 부산 해운대에서 약국을 개업하였고 부모님을 모시고 아이들을 키우다 보니 세월이 정말 빠르게 흘러갔다.
8. 빼앗긴 들에 봄이 오듯
2013년 8월 부산대학교 예술문화영상학과 교수로 계신 채희완 선배님의 퇴직 기념식이 금정산 산성마을 어느 술집에서 열렸다. 전국에서 참으로 많은 인연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밤늦게까지 각종 행사가 진행되었다. 한 때 딴따라 동지였던 선배님 후배님들을 만나 너무 반가웠지만 죄스러운 마음에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술을 많이 마셨다. 밤이 깊었고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술기운이 완연한 낯익은 중년 여성분이 술집 마당으로 걸어 나와 슬리퍼를 신은 채 비 속에서 홀로 양주 탈춤을 추었다. 가슴 뭉클 몸에 전율이 흐르고 뺨 위로 눈물이 타고 흘렀다. 빗속의 춤꾼은 채희완 선배님의 사모님 홍성원 여사님이셨다.
먹고 사는 형편이 나아지면 딴따라 현장으로 돌아오겠다며 스스로 다짐을 거듭했던 청년은 어느새 50 고개를 넘어서고 있었다. 따져보니 문화예술 현장을 떠나온 지 2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아쉽고 안타까웠다. 더 늦어지면 영영 돌아오지 못하고 후회하며 살 것 같았다. 내 놀던 곳으로 돌아가자, 결심을 하였다.
채희완 선생님이 진두지휘하는 민족미학연구소와 산하 단체인 <창작탈춤패 지기금지>의 단원이 되어 조심스럽게 활동을 재개하였다. ‘낮에는 약사, 밤에는 악사’ 천천히 한 발 한 발 꿈에도 그리던 문화예술현장으로 마침내 복귀하였다. 동료 단원과 관객들에게 누가 되지 않으려고 원광대학교 전통공연예술학과를 졸업하기도 하였다. 지금은 채희완 소장님께서 직접 지도하시는 오래된 탈춤강습 모임에도 꾸준히 참가하여 즐겁게 탈춤 공부를 하고 있고, 민족미학연구소 행사에도 모자라는 역량이지만 정성을 다해 참여하고 있다.
내년이면 하던 일도 접을 법한 내 나이 60이다. 세상 사람들은 흔히 노년을 겨울에 비유하는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새로 시작하기에 참 좋은 봄날이다. 빼앗긴 들에 다시 봄이 찾아오듯 내 인생의 늦은 봄이 다시 시작되고 있다. 덩~딱기 덩덥~, 덩쿵 덩쿵 덩덥~, 얼쑤~~~!!
[탈춤과 나] 원고 청탁서
새로운 언론문화를 주도해가는 인터넷 신문 <프레시안>(http://pressian.com)이 <사)민족미학연구소>와 <창작탈춤패 지기금지>와 함께 탈춤에 관한 “이야기마당”(칼럼 연재)을 기획하고 있습니다.
젊은 시절 탈춤이 좋아서, 쏟은 열정이 오롯이 담긴 회고담이거나 증언, 활동일지여도 좋고 아니면 현금 문화현상에 대한 어기찬 비판과 제언 형식의 글이어도 좋습니다.
과거 탈춤반 출신의 세대에게는 아련한 추억을, 신세대들에게는 다소 생소한 전통문화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글 내용이면 충분할 것입니다. 한 때나마 문화패로서 탈꾼으로서 개성넘치는 숨결을 담아내면 참 좋겠지요.
글 말미에는 대학탈춤패 출신임을 밝혀주십시오(대학, 학번, 탈춤반 이름 및 현직)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사진(1-5매)이나 시청각 자료도 곁들여 캡션을 달아 보내주시면, 지난 기억이 되살아나 더욱 생생한 느낌을 전달해줄 것입니다.
알뜰살뜰한 글과 사진제공에 대한 원고사례비는 제공되지 않고, 다만 원고가 묶여져 책으로 발간될 때 책 두 권 발송으로 사례를 대신합니다.
제 목 : [탈춤과 나] (부제로 각자 글 나름의 자의적인 제목을 달아도 좋음)
원고 매수 : 200자 원고지 15-30매(A4 3-5장)
(사진 등 시청각 관련 자료 캡션 달아 첨부하면 더욱 좋음)
보낼 곳 : (사) 민족미학연구소 (namihak@hanmail.net) 채 희 완 (bullim204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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