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1982년, 부산 촌놈이 고려대학교 영문과에 입학하면서 낯설고 두려운 서울 생활을 시작하였다. 대학생이 되면 하고 싶은 것이 너무나 많았지만 무엇보다 우선해서 하고 싶은 것이 있었다. 어릴 때 부모님을 따라 김해 큰집을 종종 갔었다. 명절 고향 방문이거나 친척 결혼식이었을 것으로 기억한다. 공식적인 의례가 끝나면 어른들은 횃불을 밝히고 큰 집 마당 한쪽에서 고기를 굽고 술국을 끓이고 시끌벅적 술을 드셨다. 그리고 마당 가운데에는 북 징 장구 꽹과리 소리가 울려 퍼졌다. 밤늦게까지 노래와 춤과 풍물소리가 끊어질 듯 이어지기를 반복되다가, 등 뒤에 옷 뭉텅이를 넣고 작은 꼬챙이로 들창코를 만든 곱새춤과 병신춤까지 나오면 그날 흥은 절정에 달했다. 세월이 지났지만 즐겁고 흥이 넘쳤던 잔치판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것을 지켜보는 어린 나의 심장은 늘 쿵쾅거렸다.
1973년 초등학교 4학년 때, 어린이날이 처음으로 국가기념일로 지정되면서 전국적으로 축하행사가 열렸다. 우리 학교는 부산 구덕운동장 행사 중 가장행렬 부분에 10명 남짓 치배와 30~40명 규모의 소고잽이로 구성된 농악대를 내보내기로 하였다. 11살 나에게도 행운이 찾아왔다. 방과 후 소고춤 연습시간이 너무너무 기다려졌고, 2~3개월 진행된 연습시간 내내 그렇게 즐겁고 행복할 수가 없었다. 행사가 끝나고 트로피와 부상을 들고 학교로 돌아왔을 때 참가 어린이들 모두가 개선장군이 되어 있었다.
어린 시절의 강렬하고 짜릿했던 그 추억들 탓인지 입시공부에 전념하던 고교시절 내내 대학생이 되자마자 가장 하고 싶은 것 1순위가 풍물과 탈춤과 전통예술을 배우며 캠퍼스의 낭만을 마음껏 즐기는 것이었다. 마침내 대학생이 된 나는 마치 예정된 길을 가듯 아주 자연스럽게 학생회관 4층 고대농악대 동아리 문을 망설임 없이 밀고 들어갔다. 하지만 내가 들어간 공간은 대학생활의 낭만을 즐길 수 있는 가볍고 만만한 놀이터가 아니었다. 시간이 갈수록 전통의 역사와 변혁의 세계관이 만나 뜨겁게 소용돌이치는 거칠고 험난한 바다임을 깨닫게 되었다.
2.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신입생을 맞이한 동아리방은 분주했다. 가무악 연습은 선배로부터 후배에게 기능을 전수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인원이 많아 동아리방이 비좁을 때는 학생회관 넓은 뒷마당(구,정문)이나 강당근처 아늑한 ‘돌 벤치’ 공간 혹은 문과대건물 뒤 외진 ‘서관농구장’을 이용하기도 하였다. 연습을 마치면 고모집 이모집으로 길게 이어지는 술자리에서 선배들의 무용담과 후배들의 라이프스토리 그리고 흥겨운 음주가무가 뒤를 이었다.
처음 동아리에 가입한 새내기들은 1~2개월 동안 기본 장단을 입으로 익히는 동시에 오금질이 들어간 걸음걸이와 경기민요, 남도민요 등을 필수적으로 배웠다. 졸업생 선배(송파산대놀이이수자,윤천수,77학번)로부터 탈춤도 전수되었다.
기본 장단과 걸음걸이 학습에 이어 민요와 소고춤 탈춤을 배우는 데까지가 기초 학습과정이었다. 이후 2~3개월 동안 장고 북 징 잡색(대포수) 호적 등 파트별 연습이 상장고 상북 상징 상쇠 대포수 호적수 등의 주도 아래 진행되었다. 일주일 단위로 상쇠가 주관하는 전체 발표 모임을 열고 연습 진척 상황을 수시로 점검하였다. 전통문화예술에 대한 주제발표 등 이론 수업도 병행하였다. 배움이 깊어지는 만큼 술자리도 잦아지고 소속감도 깊어졌다.
5월이 되면 신입생들 중에서 일부는 어설프게나마 크고 작은 교내 행사에 직접 참여하게 되었다. 강습을 담당한 선배 뒤를 따라 길놀이 판굿 마당극 등 실제 공연에 참여하게 되었다. 1년 동안 단계적인 학습과 크고 작은 공연이 반복되면서 어리바리 새내기들은 천천히 풍물패의 일원으로 자리를 잡아갔다.
방학은 전수와 합숙훈련이 이어지는 매우 중요한 시기였다. 겨울방학이면 어김없이 전북 임실 필봉리 마을회관에서 양순용 선생님으로부터 필봉농악을 전수받았다. 여름방학 때는 김형순 선생님으로부터 우도이리농악, 박염 선생님으로부터 삼천포12차농악, 김타업 하보경 선생님으로부터 밀양백중놀이를 전수 받기도 하였다.
1983년 유화국면이 시작되면서 학도호국단 체제 대신 학생회가 출범하였고, 단과대학에도 문화예술패가 만들어지기 시작하였다. 당시 70년대~80년대 초반까지 서울 경기 일원에 오래된 대학 풍물패는 고려대, 서울대 농대(수원), 건국대 이렇게 세 학교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 동아리들이 자기대학의 단과대학이나 타 대학의 풍물패 창단을 적극 지원하였고, 대학간 상호 교류에도 앞장서면서 풍물패의 양적 확대와 질적 향상을 가져왔다.
3. 가르마 같은 논길 따라 꿈속을 가듯
당시 대학 캠퍼스는 부마항쟁, 민주화의 봄, 광주항쟁 등 시민과 학생들의 민주화 염원을 총칼로 짓밟고 일어선 전두환 군사정권의 극심한 폭압과 감시 아래 있었다. 학내 문화예술 동아리는 암암리에 학생운동과 문화예술운동을 병행하기 시작하였고, 감시와 폭압아래 침묵하던 고대 캠퍼스는 82년 5월 고대농악대의 마당춤극 “뿌리를 찾는 놀이”(연출,79학번,김성호)를 시작으로 새로운 분위기 전환을 가져왔다. 공연 당일 횃불 밝힌 서관농구장에는 학생 반 사복경찰 반 뒤섞여 앉아 있었지만, 공연은 계획대로 진행되었다.
기억을 더듬어 그때 공연을 회고해보면 다음과 같다. 길놀이, 고사, 판굿에 이어 본 공연(창작춤극)이 펼쳐졌다. 판씻이 열두발 벽사의식에 이어 흰옷을 입은 다수의 흰무리들이 평화로운 집단 민중 춤을 추었다. 이어서 검은 옷을 입은 검은무리들이 등장하여 흰무리들과 대결 춤을 추었다. 다수의 흰무리들은 소수의 검은무리에 대항하며 진퇴를 거듭하다가 마침내 검은 무리의 검은 천 장막아래 모조리 빨려들어 가면서 검은 무리가 지배하는 죽음의 세상으로 변하였다. 검은 천 아래에서 한 동안 계속되던 흰무리들의 아우성과 저항의 꿈틀거림이 점점 잦아들고, 풍물소리마저 사라지면서 온 마당이 죽음의 검은 천으로 완전히 덮였다. 객석에서는 탄식과 구호와 고함이 터져 나왔다. 죽음 같은 침묵 사이로 악사들의 무겁고 느린 징소리와 북소리가 시작되면, 검은 장막 아래 갇힌 흰무리들로부터 작은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사알~ 사알~ 사알~ 사알~ 사알~ 악기소리와 흰무리들의 구음소리가 조금씩 커질 때쯤, 검은 천 장막 위로 “살!”이라는 단말마 비명소리와 함께 검은 천 찢어진 사이로 떨리는 흰 손 하나가 불쑥 올라온다. 그리고 다시 사알~ 사알~ 사알~..... “살!”이라는 외침과 함께 불쑥 올라오는 또 다른 흰손 하나. 이렇게 몇 번 반복되다가 한꺼번에 두 개 세 개 네 개의 손들이 동시에 올라오고. 어느새 검은 천 장막 위에 흰무리들의 하얀 손들로 가득 찰 즈음, 흰무리들 모든 손들이 검은 장막 위로 내뻗으며 함께 내지르는 마지막 짧고 우렁찬 “살!!” 소리에 관중들의 박수소리가 터져 나왔다. 죽음의 세상에 저항하며 자유롭게 살고 싶다는 생명의 외침 “살!!”, 더 이상 침묵하지 않겠다는 “살!!” 이었다. 음악이 힘찬 장단으로 바뀌면서 흰무리들은 부활의 몸짓을 시작하였다. 검은 장막 천을 찢고 나와 검은무리와 검은 천을 마당 밖으로 몰아내고 해방의 집단 춤을 추면서 공연은 끝이 났다.
공연 마지막 난장 뒤풀이는 자연스럽게 어깨동무로 이어졌고, 야외 공연장을 빠져나가던 스크럼 행렬은 “독재타도~ 민주쟁취~”를 외치며 교내를 행진하였다. 교문 근처에서 경찰의 최루탄이 터지고 몽둥이와 쇠파이프를 든 경찰들이 교내로 들어오면서 학생들은 해산하였다. 며칠 뒤에는 연출을 맡은 선배와 서클 대표가 성북경찰서에 끌려가 심한 고초를 겪었다. 계절은 여름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4. 나는 온 몸에 풋내를 띠고
1982년 겨울, 부족한 문화예술이론을 학습하고 더 나은 문화예술운동을 실천하기 위하여 78학번 이종일, 81학번 우수홍, 82학번 박승현과 조현모(나) 등이 중심이 되어 교문 밖으로 눈을 돌렸다. 서울대학교 출신 문화운동 선배님들(채희완, 임진택, 박인배, 유인렬(유해정), 정희섭(정이담), 황선진, 김봉준, 유인택, 진철승 등 다수)께서 주도하는 ‘애오개한마당‘ 프로그램에 참가하였다. 전통문화의 재해석, 역할바꾸기(촌극론), 연극, 그림, 노동요, 탈춤, 마당극, 마당굿, 공동체문화, 대동놀이론 등을 배우고 학습하였다. 학습은 다양한 장르 분야의 대가들이 아지트처럼 드나들던 아현동 ‘애오개 소극장’에서 이루어졌다. 그렇게 시작된 소중한 인연은 두고두고 오래도록 이어졌다.
공동체 문화에 관한 연구와 실천 방법론, 마당극에서 마당굿으로의 연행예술의 원리 등을 치열하게 탐구 학습하면서, 대학 내 문화운동의 새로운 발전방향을 모색하였다. 이러한 노력들은 결과적으로 1983년 교내 대학문화의 큰 변화를 가능하게 한 동력원이 되었다.
당시 83년도는 전두환 독재정권 하에 있었고 캠퍼스는 경찰과 정보부 요원들이 상주하며 학생들 동향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상황이었다. 흔한 M.T마저 지도교수 허락과 관할경찰서 사전보고가 없으면 불법 모임이 되었다. 학생은 잠재적인 범죄자이자 통제대상이었다. 교내 축전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고대축전은 축전을 누려야할 주체가 거꾸로 구경꾼이 되어 일회적이며 퇴폐적 대중문화에 끌려가는 참으로 변변치 못한 상황이었다. 1970년대 후반과 1980년대 초까지 봄 축전의 마지막 프로그램이자 하이라이트는 단연코 대운동장에서 이루어지는 연예인 초청쇼와 함께 하는 쌍쌍파티였다. 이러한 문화가 한심하고 부끄러웠다.
고대 농악대는 대학축전의 형식과 내용 모두를 바꾸는 새로운 목표를 세우고 실천하였다. 지난겨울 유인렬(필명,유해정) 선배님과의 공동체놀이에 관한 학습이 큰 힘을 발휘하는 순간이었다. 축전의 명칭부터 ‘안암대동놀이’로 바꾸었다.
임실필봉농악의 마을굿 구조와 원리(문굿~당산굿~샘굿~지신밟이~판굿)를 적용하여, 안암굿(교문~호상~본관~서관~민주광장~서관농구장)을 시도하였다. 공동체 집단놀이로서 경남 영산의 조성국 선생님 외 보유자분들을 모시고 영산줄당기기를 처음으로 대학축전에 도입하였다. 1만 여명이 함께 한 ‘안암대동놀이’는 대학문화운동의 일대 전환기를 맞이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축전기간 동안 풍물굿과 촌극경연대회, 풍물배우기, 민요배우기, 탈춤배우기, 민속놀이 등등 단과대 별로 다양하고 창의적인 홍보를 겸한 놀이마당을 펼쳤고, 영산줄당기기 어르신들의 지도아래 전교 학생들이 그룹별로 조직적으로 참여해서 직접 큰 줄을 만들었다.
축전 마지막 날 대규모 군중들이 암줄과 숫줄을 어깨에 매고 캠퍼스 곳곳의 예정된 코스를 돌았다. 깃발을 들거나 큰 줄을 어깨로 받치거나 손에 손을 잡고 노래를 부르면서 수백 수천의 참여자들이 학교를 동쪽 서쪽 두 편으로 나누어 동시다발적으로 서로 다른 내용의 마당 판을 열었다. 두 줄기로 나눠진 엄청난 규모의 군중들이 풍물패의 인도와 안내에 따라 각각 큰 줄을 앞세우고 대운동장으로 집결하였다. 마지막 프로그램으로 영산줄당기기를 실행하였다. 말 그대로 어마어마한 규모의 ‘대동놀이’ 였다. 새로운 형태의 대학 축전이 탄생한 것이다.
유인렬(서울대75) 선배님의 이론적 도움, 학생들의 자발적 참여, 문화예술 서클들의 조직적이고 분업화된 준비과정, 고대농악대의 기획력과 추진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후 고려대 축제는 ‘안암대동놀이’ 혹은 ‘안암대동제’로 불렸고, ‘대동제’라는 이름과 축전 형식은 전국 대학가의 교내 축전에 큰 영향을 주며 널리 통용되었다.
이후 이화여대, 서울대, 연세대, 성균관대, 한양대 등등 서울 경기 일원의 거의 모든 대학이 축전 이름을 00대동제로 바꾸고 영산줄당기기나 영산쇠머리대기를 축전의 마지막 대동놀이로 도입하였다. 해가 거듭될수록 전국의 모든 대학 축전가 대동제로 바뀌었고, 전통놀이의 현재적 응용을 통한 새로운 대학축전, 건강한 공동체놀이 문화가 탄생하게 되었다.
[탈춤과 나] 원고 청탁서
새로운 언론문화를 주도해가는 인터넷 신문 <프레시안>(http://pressian.com)이 <사)민족미학연구소>와 <창작탈춤패 지기금지>와 함께 탈춤에 관한 “이야기마당”(칼럼 연재)을 기획하고 있습니다.
젊은 시절 탈춤이 좋아서, 쏟은 열정이 오롯이 담긴 회고담이거나 증언, 활동일지여도 좋고 아니면 현금 문화현상에 대한 어기찬 비판과 제언 형식의 글이어도 좋습니다.
과거 탈춤반 출신의 세대에게는 아련한 추억을, 신세대들에게는 다소 생소한 전통문화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글 내용이면 충분할 것입니다. 한 때나마 문화패로서 탈꾼으로서 개성넘치는 숨결을 담아내면 참 좋겠지요.
글 말미에는 대학탈춤패 출신임을 밝혀주십시오(대학, 학번, 탈춤반 이름 및 현직)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사진(1-5매)이나 시청각 자료도 곁들여 캡션을 달아 보내주시면, 지난 기억이 되살아나 더욱 생생한 느낌을 전달해줄 것입니다.
알뜰살뜰한 글과 사진제공에 대한 원고사례비는 제공되지 않고, 다만 원고가 묶여져 책으로 발간될 때 책 두 권 발송으로 사례를 대신합니다.
제 목 : [탈춤과 나] (부제로 각자 글 나름의 자의적인 제목을 달아도 좋음)
원고 매수 : 200자 원고지 15-30매(A4 3-5장)
(사진 등 시청각 관련 자료 캡션 달아 첨부하면 더욱 좋음)
보낼 곳 : (사) 민족미학연구소 (namihak@hanmail.net) 채 희 완 (bullim204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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