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지도자가 소수의 측근을 데리고 변방을 떠돌며 저항의 깃발을 올린다. 흡사 중남미의 혁명가 체 게바라나 대장정 시기 마오쩌둥의 비장함이 감돈다. 그런데 저 저항군 지도자는 누구라고? OECD 회원국의 제1야당 대표다. …응?
그는 잠깐이나마 '전복적 리더십'의 상징이었다. 이제는 '전복'만 남았다. 그는 언제나 자신을 핍박받는 약자의 위치에, 정의로운 도전자의 역할에 겹쳐놓는다. 그런데 그는 당 대표다. 응? 그리고 자신을 핍박하는 '사악한 강자'의 위치에는 곧 유권자의 선택을 받아야 할 대선후보를 올려놓았다. 다시 한 번, 응?
2002년 대선 당시 노무현은 당 내 기득권자들로부터 핍박받는 소수파 지도자의 이미지로 대중의 동정을 샀다. 2012년 대선에서 승리한 박근혜는 친이계의 공천 학살을 견뎌내고 당외의 저항군을 이끈 이력이 있다. 2017년 대선에서, 그 사실 여부와는 관계없이, 대선에 승리한 후보와 그 지지자들은 그들이 '자본·검찰·언론에 의해 탄압받는 소수'라고 믿었다. (문제는 그 후보가 대통령이 된 이후에도 그렇게 믿고 있다는 것이다.)
연예기획사가 스타를 푸대접하는 것이 대중의 동정을 사는 경우는 있어도, 소속사에 갑질하는 스타는 비호감만을 산다. 그런데 '우리 아티스트가 나한테 갑질해요'라고 회사 대표가 SNS에 일러바친다면? 대표와 스타는 나란히 쪽박을 찰 것이다. 그러니 아무리 겉모습이 비슷해도 역시 '짝퉁'은 '오리지널'을 따라가지 못하는 것이고, 그 오리지널로부터 "청와대의 부당한 공천 개입에 당당히 기자회견을 하고 내려간 것과 이것은 성격이 다르다"(김무성)라는 핀잔이나 듣게 되는 것이다.
모든 것이 거꾸로인 루이스 캐롤 풍 '이상한 나라'의 풍경은 특히 성차별('젠더 갈등'이 아니다!) 이슈에서 가장 빈번한 배경이 된다. 자신을 핍박받는 약자의 위치에 놓는다는 전술은 그에게 일관된다. 이준석으로 대표되는 일군의 젊은 남성들의 주장에 따르면, 한국은 이미 미국은 물론 서유럽·북유럽의 수준을 넘어선 세계 최고 수준의 성평등, 아니 그를 넘어선 성 역차별 국가이다. 따라서 한국에서 페미니즘을 주장하는 것은 부당하게 남성들을 억죄는 사악한 망동이다. 이에 저항하는 것은 '약자인 남성'의 의무이다. 만국의, 아니 한국의 남성이여 단결하라!
실제로 저항군 지도자 놀이를 하는 와중에도 이준석은 방송 인터뷰에까지 나와 김병준의 '딸 둘이면 페미니스트' 발언을 굳이(!) 거론했다. 부당한 탄압을 받는 젊은 지도자의 면모는 이렇게 또 한 번 부각된다. 그는 말한다. "'딸이 2명 있으니까 페미니스트'라는 발언 같은 경우 '와, 이건 '젠더 이슈'에 대해서 이 분들이 발언을 할 때마다 굉장히 위험한 상황이 발생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아무리 젠더 이슈가 2021년 들어 선거의 중요한 이슈가 되었다고 해서 용어에 대한 개념 정립이 안 된 상태에서 그런 것들을 언급하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는 사태가 발생한다. 항상 제가 복어 요리에 비유하는데, 복어는 자격증이 있는 사람이 다뤄야 맛있는 식재료이지 아무나 하면 독이다. 때문에 젠더 이슈 같은 것은 앞으로 조심스럽게 다뤄 주셨으면 한다."
물은 아래에서 위로 흐르고, 불은 차갑게 얼어붙고 얼음이 불탄다. 총체적 난국이다. 먼저 '개념 정립.' 굳이 사회학·여성학 전문서적을 꺼내러 가지도 말고, 표준국어대사전만이라도 펴보자. '페미니즘'을 찾자. 뭐라고 돼 있나? "성별로 인해 발생하는 정치·경제·사회·문화적 차별을 없애야 한다는 견해." 혹시 이 정의가 여러분이 아는 바와 다른가? 그러면 사전이 틀렸겠나, 여러분이 틀렸겠나? 그러면 다른 국어사전(고려대국어대사전)을 하나 더 펴보자. "여성이 불평등하게 억압받고 있다고 생각해 여성의 사회·정치·법률상의 지위와 역할의 신장을 주장하는 주의."
옳다꾸나 하고 '여성이 불평등하게 억압받고 있다'는 전제에 반대하고 싶겠지만, 한국에서 여성이 차별받는 약자의 위치에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준석은 그 어려운 걸 태연히도 해내지만.) '여성은 약자가 아니다. 고로 페미니즘은 필요없다'는 주장은 매우 극단적이거나 가상에나 존재하는 사례를 끌어와야 비로소 정당화된다. 고유정 사건? 그게 매우 극단적 사례라는 점은 둘째 치더라도, 남자들이 "고유정 때문에 여친한테 살해당할까봐 걱정하며 사느냐?"(장혜영, 11.22)
이준석은 미국 명문대를 졸업했다는 배경 때문인지 '역사적 사회적 맥락을 다 알면서도 정치적 이익 때문에 페미니즘 반대 여론을 선동한다'는 과분한(?) 평가를 종종 받아왔다. 그런데 그게 아닐 수도 있다는 의심이 점점 번져나가고 있다. 그렇지 않다면 무려 BBC로부터 '영향력 있는 여성 100인'에 선정된, 그것도 방송 출연으로 한국에서 대중적 인기까지 갖춘, 급진 여성주의 이론가도 아닌 엄벌주의를 주장하는 보수적 범죄심리학자가, 심지어 지금 자기가 대표를 맡고 있는 당 선거운동을 도와주겠다는데 "우리 당이 선거를 위해 준비했던 과정과 방향에 반대된다"며 반대를 거듭한다든지, 제주도에서 TV 뉴스에 출연해서까지 "영입하지 말자고 했더니 해야 된다고 하더라", "영입 결론을 정해놓고 통보했다"며 이를 자신의 '당무 사보타주'의 가장 그럴듯한 명분으로 삼는 상황이 설명되지 않기 때문이다.
김병준의 '딸 둘 페미니스트' 발언은 김병준 자신의 성평등 감수성 부족을 되잖은 변명으로 때워 보려 했다는 점이 문제인 것이지, 그 말 자체만 놓고 보면 틀린 구석이 없고 이준석이 주장하는 무슨 '굉장히 위험한 상황' 같은 것은 발생하지 않는다. 오히려 위험한 것은 동료 정치인이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로 정체하는 것에 기겁을 하는 듯한 어떤 태도다. 한국에서 딸을 키우면, 예컨대 밤에 학원에서 귀가할 시간을 30분만 넘겨도 혹시나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지 오만 걱정이 들 수밖에 없지 않나? 그러다 보면 자연스레 페미니즘에 동조적이 되는 것이지 그게 뭐가 이상한가? 물론 이준석은 "(여성이 밤길을) 걷기 싫은 이유가 여성이 안전하지 않은 보행 환경에서 비롯됐다는 것은 망상에 가까운 피해의식"(2021.5.8 <한국경제> 인터뷰)이라고 하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대학 시절에는 이준석 못지않게 '페미니즘 싫어'를 외치던 남성들이 결혼하고 딸 낳아 키우면서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거듭나는 경우는 빈번히 목격되는 사례다.
'젠더 이슈'가 2021년 들어 선거의 중요한 의제가 됐다는 말도 어처구니없기는 매한가지다. 아니, 가장 앞장서서 그 이슈를 정치권에 끌어들인 사람이 바로 이준석 본인(과 하태경) 아닌가? '잠재적 가해자 취급'이니, '가르치려 하지 말라'느니 하는 그야말로 수십·수백 년 묵은 선동을 또 한 번 변주하면서 말이다. 일본에서 헤이세이 연간 출생 청년 정치 지도자가 나타나 "한국은 일본을 가해자 취급하는 것을 그만두라. 왜 역사 교육이 잘못됐다는 둥 자꾸 우리를 가르치려고만 하느냐? 이미 불고기도 맛있고 K팝도 대단하니 한국도 강자 아니냐"고 한다면 어떨까? "설사 과거에 잘못이 있었더라도 그건 메이지·쇼와 시대 일이지 나와는 관계없다"고 한다면?
이런 이상한 나라를 가능케 하는 것은 '의도된 무지'다. 여성 차별을 몰랐다고? 그걸 어떻게 모를 수가 있나? (딸이 없어서?) '역차별' 때문에 실제로 피해를 본 사례가 있다고? 완벽한 제도가 어디 있으며, 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제도 하에서도 엄존하는 반대 사례는 도대체 몇 개인지 셀 수나 있을까? 어떻게 시민사회의 수십 년 논의를 다 공으로 돌리고 수십 년 전의 남자들과 똑같은 말을 반복하면서 '아니 모를 수도 있지, 모르는 게 죄냐'고 당당하게 화를 낼 수가 있을까. 이야말로 이상하고도 이상한 일이다.
덧붙여. 물론 '이상한 나라'는 국민의힘에만 있지 않다. 어떻게 "'남혐' 여혐 둘 다 싫어"라는 틀린 구호가 180석 원내 1당이자 집권 여당의 선대위 조직 이름이 될 수 있을까? 혹시 민주당은 광주에서 '영남차별 호남차별 둘 다 없애자 위원회'나 '5.18 당시 계엄군에 의한 피해와 시민군에 의한 피해를 둘 다 규명하는 위원회'를 만들자는 주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일제에 의한 조선인 탄압과 조선인 범죄에 의한 일본인 피해를 둘 다 진상조사하자'는 주장은? 당연히, 차마 언어로 표현되지도 않는 분노가 거칠게 터져나올 것이다. 그게 당신들의 '위원회' 명칭을 본 페미니스트들의 심정이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