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글은 2021년 8월 2일자 <프레시안> 게재 <탈춤과 나> ⑩ 심규호의 탈춤에 이어지는 글이다.
'강쟁이 다리쟁이'는 아이들 놀이다. 아이들끼리 편을 짜서 시냇물 아래, 위쪽에 포진한 다음 한 편은 다리를 만들고, 다른 한 편은 다리 위쪽에 둑을 만들어 시냇물을 저장한다. 그런 다음 둑을 터뜨려 아래쪽으로 한꺼번에 물을 흘려보내는데 다리가 온전하면 아래편이 이기는 것이고, 다리가 무너지면 둑을 쌓은 편이 이기게 된다. 아이들의 놀이치고 제법이라는 느낌이 드는 것은 둑을 쌓든 다리를 만들든 함께 마음을 합쳐 일을 해야 하는지라 놀이가 곧 일이고, 일이 곧 놀이인 때문인데, 그 놀이의 이름 또한 예쁘기 그지없다.
아마도 지금은 잊혀진 놀이가 되었을 '강쟁이 다리쟁이'가 이렇다 할 맑은 시냇가가 사라진 지 오래인 서울에 뜬금없이 등장한 것은 1984년 여름이었다. 그 해 여름 전두환 씨가 대통령을 꿰차고 앉은 대한민국은 뻥 뚫린 하늘에서 사정없이 쏟아지는 비로 인해 이곳저곳에서 수재 타령이 한창이었다. 난데없는 폭우야 천재(天災)이니 어쩔 수 없다고 하겠지만 문제는 그 놈의 물난리에 능히 막을 수 있거나 당연히 막아야만 했던 인간들의 인재(人災)가 섞여 있었다는 점이었다. 당시 일봉 조성국 선생님이 사시던 경상남도 창녕군 영산면에도 물난리가 났 는데, 글쎄 그것이 천재가 아닌 인재였다는 것이었다.
워낙 안온한 마을인지라 물난리는커녕 그 심했다는 사라호 태풍 때도 끄떡없던 그곳이 물에 잠기게 된 것은 마을 위족에 새로 만든 저수지 둑 때문이었고 한다. 그런데 그 내력이 참으로 우습다 못해 어이가 없었다.
때는 1982년, 장소는 영산면 남산공원, 주연은 임진왜란 시절 용맹을 날렸다는 현감 전제(全霽) 장군의 충절사적비, 조연은 상수도 공사를 위한 저수지 둑 날림공사.
당시 전두환 씨의 먼 조상이라는 현감 전제의 사적비가 건립되자 역사 사실이 날조되었다는 소문이 돌면서 민심이 흉흉해졌다.(<정사>나 <임진록> 등에는 전제의 전공에 대한 기록이 없다.) 그러자 이를 눈치 챈 나리들이 민심을 위로한답시고 마을에 상수도를 놓아주겠다며 저수지에 둑을 만들었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그 둑이었다. 굳이 만들지 않아도 될 것을 우격다짐하듯 만들어서, 그것도 얼기설기, 얼렁뚱땅, 어영부영 만들어서, 본격적인 장마가 오기도 전에 그만 터지고 말았던 것이다. 그 해 유별났던 엄청난 폭우에 견디지 못한 까닭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고 하겠는데, 늦장마로 다른 지역에선 8, 9월에 물난리가 났건만 7월초 첫 물난리로 기록되었으니 당연히 인재라는 말이 나올 만도 했다. 그런데 더욱 흥미로운 점은, 마당극의 내용 중에 과장되게 나오기도 하지만, 물난리가 난 후 복구 사업을 하는데 물난리에 떠내려간 동상(꽤나 권세를 지녔던 이의 동상) 청소부터 시작하라고 했다니 마을 사람들의 복창이 터져도 유분수가 아닐 수 없었을 터이다.
당시 영산마을의 정신적 지도자이시자 물난리 피해당사자이던 조성국 선생님이 피해보상을 위한 진정서를 들고 사방을 돌아다니셨다고 하는데, 전 씨의 손에 묻은 피비린내가 채 지워지지도 않았던 시절에 감히 누가 진정서에 떡하니 도장을 찍을 것이며, 피해 보상 운운하였겠는가?
하여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중요무형문화재 영산줄다리기 보유자이신 조성국 선생님께 듣게 된 한두레 사람들이 분기탱천하여 이른바 ‘은평 문화권(당시 채희완, 김민기, 박용범 등 문화예술인이 모여 살던 곳이 서울 은평구였다는 점에서 재미삼아 그렇게 불렀다)’에 모여들어 작당을 하기 시작했으니, 사건의 공연화야말로 한두레의 장기가 아니던가.
한두레 사람들이 작품을 짜는 스타일 가운데 하나는 작품에 나올만한 인물들의 그럼직한 모습, 즉 개연성을 그린 후에 본격적인 대본을 만들기 시작한다는 것인데, 그 때도 대략의 인물 그림을 그려가면서 천천히 작품 꾸리기에 들어갔다. 물론 대본은 연습 때는 물론이고 공연하는 와중에도 계속 고쳐졌고, 거의 공연이 끝날 무렵에야 비로소 완전한 형태가 되었다. 이는 '한두레'의 고질적인 폐습이나 또한 장기이기도 했다. 사실 대본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공연의 큰 틀조차 심하게 바뀌기도 하여, 기존의 것이 고스란히 빠지거나 새롭게 들어가기도 하고, 다시 예전 것을 집어넣기도 하며, 엊그제 새롭게 들어간 것을 빼내기도 했다. 그럼에도 문제가 없었던 것은 연출이나 연기자들의 탁월한 연출 또는 연기력이나 임기응변의 역량 때문이 아니라 우리 마당극이 지닌 본연의 힘, 흐르는 물처럼 유유히 흐르다가도 돌연 솟구치며 포말을 뿌리더니 다시 잠잠해지기 하는 바로 그 힘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해 여름은 무더웠다. 연습장은 지금은 사라진 애오개 소극장이었다. 저녁 어스름할 때 모여들기 시작하여 봉산탈춤과 양주별산대로 몸을 풀어 제법 굴신(屈伸)이 자유롭게 될 쯤 몸에서 쉰내가 나기 시작했다. 양동이에 수박과 얼음을 잔뜩 넣어 호쾌하게 들이마시는 즐거움이야 먹어봐야 알 터이고, 한 잔 걸치시고 연습이 끝날 때가 되어 나타나시는 연출자께서는 항시 이제부터 연습 시작을 주장하였으니, 이 또한 당해 봐야 아찔함을 알 것이다. 연습은 이렇듯 더위와 싸우며, 그럴수록 시원함이 배가되는, 냉온탕을 오가며 진행되었다.
작품은 크게 세 부분으로 이루어졌는데, 초장을 여는 ‘판소리 마당’, 물난리는 당한 이들의 애환과 피해 보상에 대한 갈등을 그린 ‘영감 할미 마당’, 그리고 물난리 이후 대책회의를 풍자한 ‘나리 마당’이 그것이었다. 몇 번인지 알 수 없는 머리 맞대기, 술 마시기, 몸으로 그려보기, 만들기, 고치기, 다시 해보기 등등을 거치면서 마침내 작품이 완성되었고, 애오개 소극장에서 시연회를 가졌다. 당시 아직 어설픈 부분이 있어 적지 않게 두들겨 맞은 기억이 새롭다. 당시 필자는 예전에 석관동에서 사시던 정권진 선생님(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심청가'의 예능보유자) 댁을 들락거리며 귀동냥으로 배운 단가 몇 가지로 판소리를 하겠다고 나섰는데, 내가 하면서도 어찌나 어설펐던지. 이후 한두레는 작품 소재의 현장인 창녕군으로 직접 내려가 창녕성당에서 공연을 올렸고, 연이어 마산 여성회관에서 작품을 선보였다. 이리저리 버스 타고 시골길을 돌아다니다 어느 저녁 어스름 뉘엿뉘엿 해는 지고, 좋은 벗들과 편히 앉아 결코 심드렁하지 않은 이야기로 깔깔대던 기억이 새롭다. 내가 한두레에 속해 있다는 동지애가 생기던 시절이다.
'강쟁이 다리쟁이'는 이후 다시 한 번 새로운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한두레와 창무회가 공동으로 재구성하여 1984년 9월 20일부터 23일까지 문예회관 소극장에서 공연하기로 결정된 것이다. 작품의 골격은 크게 바뀌지 않았으나 등장인물이 대거 보충되고, 춤이 크게 강화되었으며, 구성 또한 더욱 탄탄해졌다. 특히 이후 한두레 뿐만 아니라 수많은 마당극, 거리극, 심지어 시위현장에서 선보이게 된 ‘깃발춤’이 바로 그 때 처음 만들어지기도 했다. 당시 참가자의 면면을 보면 다음과 같다. 연출 채희완, 안무 김매자, 기획 유인택, 탈 제작 및 미술 오 윤, 김봉준, 판소리 김명곤, 반주 국립국악원 사물놀이, 무대감독 정희섭, 출연진으로 임현선, 이노연, 김영희, 구재연, 박상대, 주수홍, 심규호, 김선미, 마복일, 정혜진, 강미리, 전양숙, 이지호, 양원모, 김은숙, 정일수, 박정곤, 김선영, 서환옥, 홍준의 등이다. 그리고 조성국 선생님이 그 자리에 계셨다.
문득 이렇게 이름을 쓰다보니 그 중에서 세 분이 이미 고인이 되었다는 사실에 흠칫 놀라게 된다. 조성국 선생님과 오윤 선생님, 그리고 국립국악원 사물놀이 상쇠였던 김용배 님이 그들인데, 어찌 당시에 이리 될 줄 짐작이라도 했겠는가? 지금 생각해보면, '강쟁이 다리쟁이'는 한 시대의 걸출한 인물들이 대거 등장하여 온몸으로 한 시대의 아픔과 절망, 또는 새로운 희망을 갈구하던 몸부림이 아니었나 싶다. 이후 서울 대학가 공연에 이어 대구, 광주 등을 비롯한 몇 번의 지방 공연을 통해 더욱 많은 이들과 만났다. 그리고 십 수 년이 지난 후인 1996년 12월 9일 다시 한 번 그 일부(나리마당)가 공연되었다. 오윤 선생님이 가신 지 10주기를 맞이하여 부산 카톨릭 센터에서 열린 판화 전시회에서 '강쟁이 다리쟁이' 가운데 '나리 마당'을 올린 것이다.(기획은 고인이 된 부산 <극단 자갈치> 강희철이 맡았다) 당시에도 문예소극장 공연 때와 마찬가지로 나리들은 탈을 쓰지 않고 등에 맸다. 너무 크기도 하고, 등에 짊어지는 것 또한 나름 흥취가 있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얼굴에는 찐한 화장이 덧붙여졌다. 그 탈을 만든 분이 바로 오 윤 선생님이었다. 살아계실 때 청계천 어딘가에서 꼼장어에 소주를 함께 마시던 기억이 새록새록 피어오른다.
그리고 또 다시 세월이 흘러 2004년 2월 조성국 선생님을 추모하는 글모음 <연지못 항미정은 그대의 향기>에 '강쟁이 다리쟁이'를 다시 소환하여 짧은 글을 한 편 썼다. 지금 이 글이 바로 그 때 쓴 글인데, 그 마지막은 이렇게 끝난다.
“이미 20년이란 세월이 후딱 지나면서 대본도 색이 바래고, 참가했던 이들도 제각기 나름의 길을 찾아 떠났지만, 그 때의 기억이 여전한 것은 무엇보다 그 작품이 서로를 튼실하게 연결시켜주는 질긴 끈이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 때 조성국 선생님은 제일 큰 어른으로 그 질긴 끈을 잡아 놓치지 않도록 소리쳐 격려해주셨으니, 지금도 우리는 길고 긴 ‘줄 당기기’의 한 편에서, 아니 상생의 양편에서 용을 쓰고 소리를 내지르며 온 힘을 다 바쳐 ‘위여차 어영차’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닐는지.”
글쓴이 심규호 : 한국 외국어대 가면극연구회 78학번, 외대 중국어과 문학박사, 제주산업정보대 총장, 제주 국제대 교수 역임, (사)제주문화포럼 이사장, (사) 제주 한문화네트워크 이사장, 제주탈패 두루나눔 고문
[탈춤과 나] 원고 청탁서
새로운 언론문화를 주도해가는 인터넷 신문 <프레시안>(http://pressian.com)이 <사)민족미학연구소>와 <창작탈춤패 지기금지>와 함께 탈춤에 관한 “이야기마당”(칼럼 연재)을 기획하고 있습니다.
젊은 시절 탈춤이 좋아서, 쏟은 열정이 오롯이 담긴 회고담이거나 증언, 활동일지여도 좋고 아니면 현금 문화현상에 대한 어기찬 비판과 제언 형식의 글이어도 좋습니다.
과거 탈춤반 출신의 세대에게는 아련한 추억을, 신세대들에게는 다소 생소한 전통문화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글 내용이면 충분할 것입니다. 한 때나마 문화패로서 탈꾼으로서 개성넘치는 숨결을 담아내면 참 좋겠지요.
글 말미에는 대학탈춤패 출신임을 밝혀주십시오(대학, 학번, 탈춤반 이름 및 현직)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사진(1-5매)이나 시청각 자료도 곁들여 캡션을 달아 보내주시면, 지난 기억이 되살아나 더욱 생생한 느낌을 전달해줄 것입니다.
알뜰살뜰한 글과 사진제공에 대한 원고사례비는 제공되지 않고, 다만 원고가 묶여져 책으로 발간될 때 책 두 권 발송으로 사례를 대신합니다.
제 목 : [탈춤과 나] (부제로 각자 글 나름의 자의적인 제목을 달아도 좋음)
원고 매수 : 200자 원고지 15-30매(A4 3-5장)
(사진 등 시청각 관련 자료 캡션 달아 첨부하면 더욱 좋음)
보낼 곳 :
(사) 민족미학연구소 (namihak@hanmail.net) 채 희 완 (bullim204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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