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 총회(COP26)가 글래스고 기후합의(Glasgow Climate Pact)을 남기고 폐막했다.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에 "정말 아직도 사람을 믿나?"라는 대사가 나온다. 아직도 유엔 기후총회를 진심으로 믿는 사람이 있을까?
오징어 게임의 무대 안팎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을 간단히 묘사하면 이렇다. 목숨 걸고 생존 게임에 참여해 인생 역전을 노리는 사람들, 생존 경쟁을 은밀히 즐기는 돈 많은 게임 주최자들, 그리고 이들 사이를 이어주면서 게임을 운영하는 관리자들. 마지막으로 추악한 게임의 진실을 폭로하려는 소수.
기후협상도 오징어 게임과 닮아 있다. 기후위기에 책임은 없지만 탄소예산을 빼앗길 처지에 놓인 궁지에 몰린 피해자들, 기후위기에 책임이 상당하지만 화석에너지 기반에서 쌓아올린 부와 권력을 유지하려는 가해자들, 그리고 공개, 비공개 협상장에서 이들 사이를 중재하는 전문가들. 마지막으로 불평등한 협상의 규칙을 전복하려는 다수.
협상 현장에서 실제 나타나는 인물 구성과 그 세력 관계는 훨씬 복잡하지만, 기후협상은 오징어 게임이 지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후총회의 공식 결과인 글래스고 기후합의와 총회 기간 발표된 선언들을 종합해서는 "고마워, 나랑 같이 해줘서"라고 한다면, 그건 강자의 대사일 뿐이다.
최신 기후과학은 1.5도 상승 시기가 더 빨라지고 있음을 경고하면서, 현재 1.1~1.2도 경로에 진입한 것으로 평가한다. 그리고 최근까지 각국이 제출한 중장기 감축목표를 고려하면 세기말에는 2.1~2.4도 상승이 전망된다. 1.5도 경로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해서는 2030년까지 온실가스를 19~23기가톤 추가로 줄여야 한다. 그러나 파리협정에 의한 글래스고 기후합의는 배출 격차를 어찌할 도리가 없다. 단지 각국 정부에 내년에 다시 한번 2030년 목표치를 높여서 제출해주길 요청할 뿐이다.
국제탄소시장 관련 이행규칙이야 시간 문제이지, 어떤 식으로든 배출 틈새를 허용하면서 마련될 것으로 예상됐다. 반면, 손실과 피해는 기후위기에 대한 법적 책임과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인정하지 않는 선진국의 입장 변화 없이는 쟁점 해소가 불가능한 영역이다. 이번에도 이변은 없었다.
그렇다고 과거 협상 결과와 차이가 없는 것은 아니다. 화석연료를 화석연료가 부르지 못하는, 결정문의 언어 관행에 조금 변화가 생겼다. 저배출 에너지시스템으로의 이행 등을 통한 감축 조치를 예시하는 합의문 조항에 "탄소저감 장치가 없는 석탄발전소의 단계적 감축과 비효율적인 화석연료 보조금의 단계적 폐지(the phasedown of unabated coal power and phase-out of inefficient fossil fuel subsidies)"가 포함된 것이다.
석탄과 화석연료라는 단어가 들어갔다는 사실을 침소봉대하는 걸까. 누군가는 글래스고 기후합의의 최대 성과로 치켜세우지만, 탈석탄을 비롯한 탈화석연료를 주장해온 기후정의 입장에서는 별다른 감흥이 없는 사건이다. 그동안 거의 모든 결정문 작성 과정에서 핵심 용어와 주요 내용의 후퇴를 경험했듯이, 이 사건도 새로운 무대에서 선보인 익숙한 반전에 가깝다. 애초 명확하게 표현된 "석탄발전소의 단계적 폐지"에는 탄소포집․저장을 뜻하는 수식어가 붙고, 폐지가 아니라 감축으로 변경됐다. 마찬가지로 "화석연료 보조금의 단계적 폐지"에는 비효욜적이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결과적으로, 석탄발전소와 화석연료 보조금을 유지하려는 몇몇 나라의 정치경제적 이해관계를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기후취약국포럼(Climate Vulnerable Forum)이 결정문 제목으로 제안했던 글래스고 기후비상합의(Glasgow Climate Emergency Pact)에서 '비상'이 삭제된 것 이상의 퇴행을 의미한다.
사실 글래스고 기후총회는 공식적으로 석탄을, 나아가 화석연료를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하겠다는 의지가 표출됐다는 점에서 주목받았다. 이런 점에서 과거에 비해 기후총회의 문법이 일부 바뀌었다고 볼 수 있지만, 결국 화석 마인드는 기후협상의 오징어 게임 경향을 바꿀 수는 없었다. 그것도 화석에너지 의존도가 높은 일부 나라들은 기후정의의 이름으로, 정의로운 전환의 이름으로 기업 이윤과 사회 보장을 그린워싱했다. 2018년 카토비체에서 폴란드가 그랬던 것처럼, 올해는 인도와 중국이, 그리고 적지 않은 나라들이 이에 동조했다. 정의로운 전환의 오용과 남용이 기후 담론의 보수화를 이끌고 있다. <대혼란의 시대>(에코리브르, 2021)에서 아미타브 고시가 지적한 것처럼, 인도와 중국 등 아시아에서 효과가 없는 기후 전략은 전 세계적으로도 효력을 발휘할 수 없을 것인데, 반대로 아시아 스스로도 덫에 갇히지 않으려면 침묵에 가까운 지체 전략을 수정해야 한다.
글래스고 기후총회의 두 번째 특징은 공식 결정문 밖에서 확인할 수 있다. 총회장 안팎의 기후정의 흐름을 온전히 충족하지는 못하지만, 총회 전후로 다자간 기후클럽이 활성화되고 있다는 점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동안 탈석탄을 주도한 탈석탄동맹(Powering Past Coal Alliance)에 이어, 그리고 더 포괄적인 형식과 급진적인 내용을 담고 있어 새롭게 관심을 받고 있는 화석연료확산금지조약(Fossil Fuel Non-Proliferation Treaty)과 함께 향후 탈탄소 국제레짐의 새로운 축을 형성할 것으로 보인다.
교토의정서에 비해 파리협정에서 유엔 다자주의가 성과를 기대하기 어려운 조건에서 부문별 다양한 형태의 이니셔티브가 부상하고 있다. 비록 국제법상 구속력은 없지만, 위에서 언급한 새로운 흐름들은 나름 긍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한국의 관심사는 편의적이고 편파적이다. 중앙정부는 지방정부에 못 미친다. 이미 탈석탄동맹에 가입한 충남도, 전남도, 경기도, 강원도, 제주도, 서울시, 인천시, 대구시와 단순 비교하더라도 그렇다.
100개가 훌쩍 넘는 국가들이 참여한 '국제메탄서약'과 '산림과토지이용선언'에는 한국 정부 이름을 당당히 올렸다. 그런데 '국제탈석탄전력전환성명'에 참여했음에도, 정부는 원론적 지지 입장에 불과하다며 세부 공약은 인정하지 않는다는 태도를 취한다. 탄소중립 시나리오상 탈석탄을 2050년으로 상정하고 있기 때문에 2039년까지는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국내외 신규 석탄발전소 건설이 진행되고 있는 마당에 화석연료 사업 전반에 대한 공적금융 중단은 꿈도 꿀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좀 솔직하거나 외교 매너는 지켜야 하는 게 아닐까. 해당 성명의 1, 2, 4항만 승인한 보츠와나, 헝가리, 인도네시아, 필리핀, 그리고 1, 3, 4항만 승인한 모로코처럼 말이다.
정부가 확정한 2030년 감축목표인 2018년 대비 40%는 내년에 상향될 수 있을까? 여전히 불충분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지만, 정부의 자화자찬은 이를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대신 지방정부들이 국가를 견인할 수 있을까? 이마저도 힘들 것이다. 시민사회의 탈탄소 반란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오징어 게임 시즌2>가 어떻게 전개될지 모를 일이지만, 판을 근본적으로 바꾸지 못한다면, 아니면 예기치 못한 기후위기 시대가 도래하지 않은 이상, 우리 사회도 탄소 뺏기라는 잔혹 게임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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