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일은 지난 8월 13일 자 <조선일보> 온라인판 기사에서 시작됐다. 제목은 독자 시선을 잡아 당겼다. <"아들아" 소리도 외면… 중병 아버지 굶겨 사망케 한 20대 아들>
56세 아버지가 뇌출혈로 쓰러지자 한 가정에 닥친 비극을 다룬 기사. 아버지는 코에 삽입된 호스를 통해 음식물을 섭취했다. 온몸이 거의 마비됐으니 아기처럼 기저귀를 찼다. 폐렴으로 호흡 곤란이 올 수 있어 누군가 곁을 지켜야 했다. 욕창 방지를 위해 두 시간마다 누운 자세도 바꿔줘야 했다.
22세 아들은 아버지 돌보기를 포기하고 사망에 이르게 했다. 그는 존속살인 혐의로 징역 4년을 선고받았다. 금세 여러 매체가 비슷한 기사를 쏟아냈다. 포털사이트에는 댓글 수천 개가 달렸다. 누구는 "인간의 도리를 어긴 패륜"이라 비난했고, 어떤 이는 "누가 이 청년에게 돌을 던질 수 있느냐"고 연민했다. 비난과 연민, 분노와 안타까움은 서로 뒤엉켜 오랫동안 싸웠다. 기사를 읽고 궁금했다. '왜 죽였지?', '22세 아들은 어떻게 살았길래 저런 선택을 했지?'
가난한 처지에서 기약없이 아버지 돌보는 게 막막했다는 내용은 기사에 담겼지만, 허전했다. 모든 매체의 기사는 대구지방법원 판결문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 청년이 어디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공공기관은 왜 돕지 않았는지, 가난의 정도는 어느 정도였는지…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다.
직접 알아보기로 했다. 익명 처리된 판결문을 받고, 고양시 법원도서관에서 실명 판결문을 확인했다. 아버지가 굶어 죽은 집에 갔고, 치료 받았던 병원을 찾았다. 청년의 친척과 주변 사람을 만났다. 발로 찾은 사실의 조각과 아버지를 죽인 혐의로 구속된 청년의 이야기, 이제 풀어놓는다.
119구급대원이 다급하게 전화한 때는 일요일 오후였다.
급하게 병원으로 달려갔다. 아버지는 의식이 없었다. 의사는 뇌출혈로 응급수술을 해야 한다며 동의서를 내밀었다.
아들 강도영(가명)은 수술을 선택했다. 일단 아버지(56세)를 살려야 하니, 크게 고민하지 않았다. 그때 강 씨는 몰랐다. 자신은 이미 외통수에 걸렸다는 걸, 자기든 아버지든 둘 중 한 명은 죽어야만 끝나는 간병 전쟁이 시작됐다는 걸 말이다.
간병노동이 무엇이지, 가난한 사람이 불치병에 걸리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그 모든 걸 알기엔 강도영은 많이 어렸다. 아버지가 쓰러진 2020년 9월 13일, 그는 공익근무를 위해 대학을 휴학한 21살이었다.
수술 후 아버지 의식은 돌아왔다. 하지만 아버지의 몸은 어제와 완전히 달랐다. 코에는 호스가 연결됐다. 음식을 씹고 삼키고 소화시키는 능력을 잃어 누군가 호스로 음식을 주입해야 했다. 아버지 성기에도 '소변줄'이라는 호스가 연결됐다. 기저귀도 찼다. 타인이 소변과 대변을 치워줘야만 했다. 스스로 약간이나마 움직일 수 있는 신체는 오른쪽 팔과 다리뿐이다.
흔들리는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의사 말을 곱씹자 눈앞이 캄캄했다. 무릎도 저절로 꺾였다. "아버지의 아버지가 됐다"는 현실이, 120kg에 이르는 자기 몸무게보다 무겁게 느껴졌다.
대구시 수성구 OO동에 있는 보증금 1000만 원, 월세 30만 원 집에 도착해선 한동안 불도 켜지 않았다. 캄캄한 집에 가만히 서 있으니, 이제 정말로 이 세상 혼자가 된 기분이었다. 초등학교 1학년 때였다. 엄마가 강도영에게 말했다.
아무리 기다려도 엄마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 후 엄마 목소리를 들어본 적도, 얼굴 본 적도 없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어린 강도영을 맞아준 건 오늘처럼 불꺼진 거실이었다. 아버지는 매일 술을 마시고 밤 12시께 들어왔다.
겁이 많은 강도영은 언제나 불을 켠 채 혼자 잤다. 그게 버릇이 돼 지금도 불을 끄면 불안해서 눈을 감기 어렵다. 아버지가 쓰러지고, 기저귀를 차고, 영원히 일어설 수 없다는 말을 들은 그날도 불을 켜고 뜬눈으로 밤을 보냈다. 눈앞이 어린시절의 거실처럼 캄캄했다.
아버지는 해고된 공장 노동자였다. 해고 기간엔 일주일에 이틀 정도 일당 건설노동자로 일했다. 그러다 다시 자동차 부품공장에 들어갔다. 월급은 약 200만 원, 어떻게든 둘이 살 순 있는데 1개월여 만에 아버지가 쓰러졌다.
눈앞처럼 가슴도 까맣게 탔다. 코로나19 탓에 병원 면회는 금지됐다. 바이러스가 아니어도 강도영이 간병을 하는 건 불가능했다. 병원은 중증 환자의 간병을 교육받지 않은 사람에게 맡기지 않는다.
돈을 벌어야 했다. 아르바이트를 하려고 여기저기 면접을 보러 다녔다. 사장님들은 강도영의 뚱뚱한 몸을 탐탁치 않게 여겼다. 번번이 면접에서 떨어졌다. 돈을 버는 건, 아버지의 아버지가 되는 것만큼이나 어려웠다. 첫 달은 아버지가 일한 1개월 월급으로 어떻게 버텼다.
돈은 조금씩 바닥나고, 쌀은 줄어들기 시작했다. 월세, 가스비, 전기료, 통신비, 인터넷 이용료 등 돈으로 처리해야 하는 모든 게 연체되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A병원에서 2020년 9월 13일부터 올해 1월까지 입원 치료를 받았다. 병원비가 약 1500만 원 청구됐다. 강도영이 평생 본 적도, 만져본 적도 없는 돈이었다. 고모 두 분이 계셨지만 연락 끊긴 지 오래였다. 아버지와 14살 차이 나는 막내 삼촌에게 부탁했다.
삼촌이 돈을 마련했다. 형편이 넉넉해서 통장에서 인출한 돈이 아니었다.
미안하고, 괴롭고, 고마웠다. 삼촌도 아버지와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다. 끔찍한 일이 벌어진 뒤 삼촌은 경찰에서 이렇게 진술했다.
아버지를 비용이 그나마 덜 드는 요양병원으로 옮겼다. 아버지는 요양급여도 받을 수 없었다. 한국의 요양급여는 65세 이상에게만 적용된다. 아버지는 이제 겨우 56세다. 결국 다달이 나오는 요양병원비와 간병비를 또 삼촌이 냈다.
아버지는 가을과 겨울과 봄을 병원에서 보냈다. 삼촌 통장은 바닥났다. 퇴직금을 중간정산 해 평소 왕래 없던 형의 병원비로 썼다는 사실을 숙모가 알게 됐다. 가정 불화가 시작됐다. 삼촌에겐 열 살도 안 된 아이가 둘 있었다.
꽃 피는 3월, 삼촌은 많이 괴로운 듯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강도영은 할 말이 없었다. 멍하게 삼촌을 바라봤다. 삼촌 눈은 이미 붉어졌다.
강도영은 이미 월세 3개월을 밀렸고, 이용료를 못내 전화기와 집 인터넷도 끊겼다. 도시가스도 끊겨 난방도 요리도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젠 집에로 아버지를 모셔와 콧줄로 음식을 주고, 대소변을 치우고, 2시간마다 체위를 바꿔주는 간병노동도 해야 한다.
강도영은 용기를 내 집주인 할머니를 찾아갔다.
집주인 할머니가 10만 원을 줬다. 그걸로 급하게 집 인터넷부터 살렸다. 그렇게 와이파이를 이용해 다시 아르바이트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더는 물러설 곳이 없어 한 편의점 면접에서 처음 보는 사장님에게 울먹이며 말했다.
사장님은 일을 시켜줬다. 시급 7000원. 토요일과 일요일 이틀 동안, 오후 10시부터 오전 10시까지 12시간 노동. 인터넷을 살리고 일을 시작했지만, 끊긴 식량과 배고픔은 해결되지 않았다. 하면 안 되는 일이지만, 유통기한이 임박하거나 지나서 폐기해야 하는 편의점 도시락 등으로 끼니를 해결했다.
그래도 배가 고팠다. 따뜻한 밥이 먹고 싶었다. 전기는 아직 살아 있으니 전기밥솥으로 밥을 할 수 있었다. 힘들게 살린 카카오톡으로 3월 24일 새벽 4시 28분에 삼촌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잠을 자는지 삼촌은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6시간 뒤인 오전 8시 28분에 다시 메시지를 보냈다.
얼마 뒤 삼촌은 쌀, 라면, 즉석카레, 즉석짜장, 간장 등을 사왔다. 강도영은 간장에 밥 비벼 먹으며 약 1개월을 살았다. 알바를 더 알아보려면 살을 빼야 했는데, 탄수화물과 즉석 식품만 먹으니 살이 더 쪘다. 4월 8일 새벽, 요양병원에서 긴급연락이 왔다.
그날 강도영과 삼촌은 괴로운 합의를 했다. 아버지 연명치료를 중단하기로. 안타깝지만 산 사람은 살아야하지 않겠냐고. 마음을 굳게 먹고 병원 담당 의사에게 말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의사가 답했다.
웃어야 할까, 울어야 할까. 의사에게 강하게 말했다.
의사는 "지금 나가면 아버지가 위험하다, 대소변 치우고 식사 제공하는 일을 훈련도 받지 않은 아들이 할 수 있겠느냐"며 반대했다. 아버지는 다시 요양병원보다 비싼 A병원에 입원했다. 병원비 걱정이 머리와 가슴을 지배했다. 강도영은 자기를 받아준 편의점 사장님을 찾아갔다.
사장님은 본사 원칙 상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온 세상이 벼랑끝처럼 느껴졌다. 병원에 다시 강하게 요청했다. 정말 돈이 없다고, 아버지 퇴원할 수 있는 수준이 되면 나가겠다고. 어눌하게 말할 수 있게 된 아버지도 "퇴원하겠다"고 말했다.
강도영 씨는 퇴원 이후의 일에 대해 병원 측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고 퇴원 허가를 받았다. 병원비는 또 삼촌이 냈다. 수술비, 입원비, 요양병원비, 간병비… 삼촌은 약 2000만 원을 병원비로 썼다.
거의 온몸이 마비된 아버지를 대중교통으로 옮기는 건 불가능했다. 사설 응급차를 불렀다. 비용이 8만 원 나왔다. 이 돈도 삼촌이 냈다. 삼촌은 아버지가 먹어야 하는 죽으로 된 식사캔, 기저귀 등을 사줬다. 복잡한 마음 때문에 자기 형의 얼굴은 보지도 않았다.
평생 누워 지내야 하는 아버지와 강도영은 4월 23일부터 집에서 함께 살기 시작했다. 이제 아버지의 삶은 오로지 강도영의 손에 달렸다. 죽 형태의 식사를 콧줄에 넣고, 아버지의 대소변을 치우고, 2시간마다 자세를 바꾸고, 마비된 팔다리를 주무르고… 누군가 죽어야 끝나는 간병노동을 22살 강도영이 감당해야 했다.
가스가 끊기고 월세가 밀린 단독주택 2층 집에서 말이다. 둘의 휴대전화도 모두 끊긴 상태였다. 여기에 더해 여러 금융기관에서 돈을 갚으라는 독촉장이 날아오기 시작했다. 돈은 없는데, 돈을 요구하는 곳은 많고, 돈을 써야 하는 곳은 천지였다.
우울했고, 무기력했다. 때로는 죽고 싶었다. 아버지의 대소변을 치우고 마비된 몸 마사지하던 어느날, 아버지가 아들에게 작게 말했다.
편의점 야간 알바를 하면 그 시간에 혼자 집에 있는 아버지가 걱정됐다. 일에 집중 못했고, 사장님 인내도 바닥났다. 5월 2일 알바를 그만 뒀다. 편의점을 떠나면서 사장님에게 다시 부탁했다.
이번에도 사장은 곤란하다고 했다. 강도영은 일을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가던 그날의 심정을 편지에 적어 <셜록>에 보냈다.
강도영은 아버지가 들어오지 말라고 한 그 방에 5월 3일 밤 들어가봤다. 그때 아버지와 아들의 모습이 강도영 씨에게 유죄를 선고한 1심 판결문에 담겨 있다.
그날이 마지막이었다. 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아들을 바라봤고, 강도영은 그런 아버지를 보면서 한참을 울었다. 그 후 아버지 방에 들어가지 않았다. 강도영은 집밖으로 나가지도 않았다. 아버지가 외부의 도움 없이 굶어 죽어가는 동안 그는 자기방에서 울며 누워서 시간을 보냈다. 모든 걸 포기했는지 집도 치우지 않았다.
강도영은 5월 7일에서 8일로 넘어가는 새벽 꿈을 꾸었고, 그 내용을 편지에 적었다.
그날 저녁 8시 강도영은 아버지 방문을 열었다. 대변 냄새와 함께 무언가 부패한 냄새가 났다.
아버지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방바닥에 누워 있는 아버지에게 다가가 코밑에 손을 댔다. 숨결이 느껴지지 않았다. 119에 연락했다.
강도영은 도망가지도 않고 집에서 가만히 기다렸다. 강도영은 <셜록>에 보낸 편지에 평생 자신이 간절히 원했던 걸 적었다.
꿈을 이루고 싶었던 집, 꿈이 실현되지 않은 집, 아버지가 조용히 죽은, 혼자 울면서 시간을 보낸 집… 그 집을 강도영은 끝까지 지켰다. 119 대원은 경찰과 함께 왔다. 강도영은 집에서 체포됐고 경찰과 함께 집을 떠났다.
지난 8월 13일 대구지방법원 형사11부(재판장 이상오)는 존속살해 혐의로 강도영에게 징역 4년을 선고했다. 강도영은 유기치사를 주장하며 항소했다. 2심 선고는 11월 10일 내려진다.
이 기사는 <프레시안>과 <셜록>의 제휴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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