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 투쟁에서 권력투쟁의 현실로 뛰어든 생태주의자
서구 근대화 산업화는 재앙이라고 소리치는 김종철은 분노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나아가 그는 분노에 그치지 않고 끊임없이 대안을 모색하던 현실주의자이기도 했다.
2004년 8월 25일 천성산 터널 철회를 내걸고 지율스님이 청와대 앞에서 57일 동안 목숨을 건 단식농성을 벌였다. 그 당시 현장을 찾아온 노무현 정부의 곽결호 환경부 장관을 향해 "당신들 뭐야" 하며 "진실된 태도"를 보이라고 입에 거품을 물고 소리치는 장면은 김종철의 진면목을 압축해서 보여준다.(☞ 바로 가기 : 유튜브 '대구MBC Program' 8월 18일 자 '대구 MBC 창사특집 다큐멘터리 <우리에게 희망은 있는가: 녹색을 꿈꾼 지식인 김종철>')
김종철은 지율스님과 같은 맥락에서 개발과 성장의 고속열차에 혼자서라도 브레이크를 잡으려고 혼신의 힘을 기울인 실천가였다.
계란으로 바위 치기는 늘 실패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바위가 계란 하나만 한 크기이고 속성 또한 바위로 보이긴 하지만 아직은 바위가 아닌 뭉쳐진 흙덩어리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그리고 대부분의 국가 제도와 정책은 초기에는 바위가 아니라 그냥 설익게 뭉쳐진 흙덩어리에 불과한 경우가 많다. 그래서 온 힘을 다해 계란을 투척하면 부서지기도 한다.
<녹색평론>을 근거지로 펼친 김종철의 수돗물 불소화 반대 투쟁은 아마도 김종철이 온 힘을 다해 계란을 던져 거둔 현실 투쟁의 거의 유일한 승리로 기록될 수 있을 것이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2011년 후쿠시마 사건 이후 김종철의 분노는 녹색당 창당과 정당 활동으로 곧바로 이어졌다.
2012년 3월 4일 녹색당이 공식 창당되었다. 4.13 총선을 한 달 정도 앞두고서였다. 2011년부터 녹색당의 전임강사를 자처한 김종철은 전국을 돌며 강연을 통해 녹색당 창당을 홍보하고 당원 가입을 독려했다.
그러나 한국의 정당정치 현실은 냉엄했다. 총선에서 녹색당은 겨우 0.48% 득표율을 기록하는 데 그쳤다. 결국 3% 조항에 걸려 정당 자체가 해산되고 말았다.
카리스마인가, 돈인가, 쪽수인가
한국에서 녹색정치의 실험은 2012년 녹색당 창당 이전인 2004년 6월 10일 "풀뿌리의 생명력과 연대로 시민사회의 대안적인 가치를 실현하자"는 선언과 함께 출범한 초록정치연대가 효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초록정치연대 또한 2006년 지방선거에서 2명의 기초의원 당선이라는 저조한 성적을 올리면서 2008년 자진해산하고 말았다.
한국의 정당정치 현실에서 당을 창당하려면 '3김(김대중·김영삼·김종필)'처럼 널리 알려진 카리스마형 리더가 있거나, 정주영의 국민당처럼 돈이 있거나, 아니면 이른바 표를 가진 '쪽수'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정당으로서 대의정의 권력투쟁 게임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 한국의 정치는 철저하게 정치 엘리트 기득권자들이 벌이는 그들만의 리그다. 그리고 일단 권력투쟁의 여의도 정치 게임 속으로 들어가면 이 세 가지를 모두 갖추어야만 한다.
녹색당은 이 세 가지 모두 미약한 상태에서 후쿠시마 사태라는 재앙의 절박함만을 가지고 서둘러 창당한 측면이 강했다. 사실 녹색당 창당은 널리 알려진 생태주의자 김종철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창당에 들어간 돈뿐만 아니라 총선용 현수막 제작비에 필요한 거액의 비용 또한 대부분 김종철이 개인 후원자에게서 조달한 돈이었다. 녹색당이 정당법의 요건을 갖춰 창당할 수 있었던 것 또한 <녹색평론> 독자들이 상당수 당원에 가입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2012년 총선에서의 녹색당 득표율과 녹색당 해산은 김종철에게는 충격에 가까운 실망스러운 결과였다. 그 뒤 2020년까지 지방선거와 총선에서 녹색당은 당선자를 내거나 의미 있는 득표율을 올리지 못했다.
그러면서 김종철은 특히 청년과 여성 문제에 대한 김종철의 발언 논란을 계기로 녹색당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녹색당은 현재 창당 주역들이 거의 탈당하고 당원 수도 대폭 줄었다고 알려져 있다.
김종철의 녹색당은 어느 역에 멈춰 섰을까
2012년 풀뿌리 민주주의 정당을 표방한 녹색당의 창당 방식은 겉으로 내세운 표방과는 달리 이른바 기존 여의도 정당정치 문법인 하향식 중앙정치 방식과 하나도 다를 바 없었다. 풀뿌리 시군구 녹색당원들을 기반으로 한 상향식 정당 창당 방식이 전혀 아니었다. 이것은 총선 날짜에 맞춘 역산의 창당이었다는 현실과는 관계가 없는 문제였다.
4.13 총선의 실패 이후 정당이 해산되고 녹색당플러스라는 이름으로 정당활동을 하면서도 이 점은 마찬가지였다.
녹색당은 녹색가치와 대의만 있었지 권력을 잡고 녹색사회와 녹색국가를 실현하기 위한 청사진, 곧 치열하고 구체화된 실천 전략은 거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녹색당 지지 호소와 녹색당 선전 선동은 열심히 했다고 하지만, 그것은 중앙당의 일이었을 뿐이다.
한마디로 녹색당에는 풀뿌리 조직화 전략이 없었다. '반(反)정당의 정당'을 기치로 내건 녹색당이 기득권 정당 정치에 반기를 들고 대항하는 저항세력으로서 내세울 수 있는 유일한 무기는 풀뿌리 시군구에서 주민들을 조직하는 일상의 민주주의 정치 활성화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조직된 주민들의 '쪽수' 밖에 없었다. 카리스마의 지도자도 없고, 돈도 없을 때 풀뿌리 정당의 돌파구는 쪽수의 확대뿐이다.
창당 이후 10년이 지난 지금도 녹색당에는 시군구의 일상 정치 활동이 거의 전무하다. 이는 창당 당원으로 올해 초까지 녹색당 당원이었던 필자의 경험이기도 하다.
2011년 녹색당 창당 당시 필자는 하향식 조직화와 시군구 일상의 직접 민주주의 연대연합 정치활동 전략에서 김종철과 견해를 달리했고, 당원으로 가입해 당비는 내겠지만 당 활동은 하지 않겠다고 양해를 구했다. 이에 대해 김종철은 충분히 이해하고 공감했다. 물론 그러나 현실의 실천과 선택은 다른 문제였다.
녹색당 전임강사 김종철은 이미 2012년부터 녹색당과 거리를 두고 있었다. 2013년 7월 녹색전환연구소를 창립한 것도 그 일환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2020년 6월 25일 세상을 떠날 때까지 김종철은 녹색당의 출발역 그 자리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녹색당은 '반(反)정당의 정당'이 아니었다
대의정의 정당은 선거정당이다. 당원들이 지역에서 벌이는 일상의 민주주의 정치활동은 거의 없거나 아예 없다. 오직 선거 때 후보를 정하고 투표를 할 때에만 당원들에게 '참여'를 요청한다.
한국의 시군구 지역, 특히 읍면동에는 거의 모두 지역 주민들의 현안, 이른바 민원이 다양하게 존재한다. 시군구의원이나 시장, 국회의원들은 이런 민원을 해결해주는 해결사 역할을 한다. 한국의 정치인이란 자신의 지역구 유권자들 민원을 해결해주는 해결사다.
그런데 이런 민원의 상당수는 사실 조금만 법과 제도, 민원 해결 절차를 알면 주민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들이다.
녹색당이 반(反)정당의 정당으로서 풀뿌리 민주주의 정당이라면 녹색당의 정당 활동가는 이런 주민들의 민원을 주민들이 주체가 되어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할 수 있게끔 촉진하는 직접 민주주의 조직가여야 했다. 녹색당은 이런 주민정치 조직가에 대한 양성과 교육 전략도 전무했다.
한국의 국회의원과 광역-기초의원, 자치단체장 수는 약 4300여 명에 이른다. 여기에 국회의원 보좌관, 자치단체장이 임명할 수 있는 정무직 공무원과 산하기관장, 국고 지원을 받는 정당 실무자들까지 합하면 정당정치 활동가 숫자는 1만여 명을 훌쩍 넘는다.
시군구 지역에서 한 사람의 정당정치 활동가가 100명 이상의 당원을 조직하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다. 개인의 인맥을 총동원하고 지역의 시민사회단체와 노동-농민단체 등과의 연대연합을 꾸준히 확대해 나가면 적어도 200명 이상은 충분히 가능하다.
200명 당원이 내는 1만 원 이상의 당비를 근거로 매일 읍면동 지역을 돌면서 4년 동안 민주정치 촉진자로서의 정치 활동을 했는데도 시군구 의원이나 자치단체장 선거에서 당선이 안 된다면 그게 이상한 일이다. 4년 해서 안 되면 8년을 하면 아마도 거의 당선이 된다. 이는 이미 기존의 정치인들 사례를 통해 충분히 입증된 방식이다.
녹색당에는 이런 전업 정치 활동가들이 없었다.
주권자 주민 한 사람 한 사람은 힘이 없고 무력하기 짝이 없다. 그래서 서슴없이 정치인들은 주권자 인민을 '개돼지'라고 지칭한다.
그러나 주민이 두세 사람 이상 모여 개인 문제가 아닌 지역 문제를 논의하기 시작하면 그 순간 그 두세 사람은 곧바로 대한민국의 주인인 주권자로서 정치의 영역으로 들어가게 된다. 주민 100여 명이 서명을 하고 조용히 떼를 지어 일렬로 줄을 서서 집단으로 시청이나 군청으로 걸어가 똑같은 민원을 한 명씩 100번을 제기하면 그렇게 큰 예산이 들어가지 않는 어지간한 민원은 거의 즉시 해결될 수 있다.
이것이 풀뿌리 직접 민주주의 정치고 주민조직화의 힘이다. 이것이 인민이 자신의 힘을 깨닫고 '개돼지'에서 자존감을 회복한 주권자로 거듭나는 거의 유일한 길이다.
그런데 녹색당에는 이런 일상의 직접 민주주의 정치 활동이 거의 없었다.
기후정치와 녹색당
1898년 창당한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은 19년의 활동 끝에 1917년 혁명을 성공시키고 집권에 성공했다. 1921년 창당한 중국공산당은 28년 만인 1949년 집권에 성공하면서 중화인민공화국을 출범시켰다. 물론 이들은 인민이 고루 평등하고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사회주의 이상사회를 공약했지만, 수천만의 인민을 학살하고 굶겨 죽이는 악몽과도 같은 독재정치를 펼치고 말았다.
1990년 민중당이 출범한 지 30여 년이 지났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의 진보정당이 금수저 계급과 관료주의를 허물고 흙수저 계급이 주인이 되는 직접 민주주의의 사회와 국가로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인민들이 얼마나 될까. 진보정당이 집권의 희망이 있는 정당이라고 보는 유권자가 얼마나 될까.
녹색당은 이같은 진보정당만큼의 무게감조차도 없는 것이 현실이다. 녹색당을 집권 가능성이 있는 정당으로 인식하는 국민이, 아니 녹색당원들조차 과연 얼마나 될까.
기후위기 시대 전 세계 진보정당도 바뀌고 있다. 그린뉴딜을 선도하는 미국의 샌더스와 오카시오 코르테즈라는 카리스마 정치인의 탄생에는 민주사회주의를 지지하는 수많은 청년들, 알린스키의 주민조직화 전략에 따라 지역에서 주민을 조직하는 주민활동가들, 유기농 협동조합들, 탈탄소 에너지전환 도시운동 활동가들, 원주민 조직과 이주민 조직들, 소수자 조직들 등등 풀뿌리 직접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수많은 주민들이 밑바탕에 있다.
이제 기후위기 의제는 대의정을 허무는 직접민주주의 실천 의제와 불평등 타파 의제와 결합되어 있다. 그리고 이 점이 서구의 진보정당을 녹색으로 물들이고 있는 주요 동인이다. 노르웨이 노동당과 녹색당의 총선 승리는 그 한 예이다.
독일 녹색당은 독일의 '68혁명'과 '신사회운동'이라는 튼튼한 기반을 토대로 창당했다. 이제 독일 녹색당은 소수당의 연정 전략을 뛰어넘어 집권을 넘보는 제1당으로 도약하고 있다.
한국의 정치현실에서 녹색당은 시민사회운동과 함께 진보정당운동의 토대 위에서 연대연합의 전략으로 집권 전략을 수립하는 것이 필요하다.
1992년 리우기후정상회의로부터 30년이 지났다. 과연 지금 한국의 기후 시민운동과 녹색당이 기후위기를 극복하고 적응할 수 있는 기후주권자들을 얼마나 조직화·세력화했을까.
우리는 이같은 질문에 대한 성찰과 반성에서부터 기후정치를 새롭게 시작할 수밖에 없다. 그동안 수도 없이 들었던 구호, "지구적으로 생각하고 지역적으로 실천하자"는 디지털미디어 시대 만고불변의 사회운동과 정치운동 지침이다.
지금은 기후정치의 정책 대안이 없어서 집권을 못 하는 시대가 아니다. 정책 대안은 이미 그린뉴딜을 포함해서 전환도시운동 등등 무수히 제시되어 있고 실제 전 세계에 걸쳐 실행되고 있는 중이다.
20대 대선이 '대장동'이니 '항문침'이니 듣지도 보지도 못한 용어로 점철되고 오직 네거티브 폭로전으로만 일관하고 있다. 아마도 내년 3월 대선 당일까지 점점 더 심해져 가히 상상을 절할 가짜뉴스와 폭로가 난무할 것이다. 20대 대선은 이념과 정책이 실종되고 오직 네거티브와 포퓰리즘만 난무하는 최초의 선거로 기록될지도 모른다.
김종철이 멈춰 선 녹색당의 출발역은 20대 대선을 앞둔 오늘의 녹색정치 현실을 다시 성찰하게 만든다.
그 역이 기후위기 정치의 재출발역이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한국의 녹색국가와 녹색사회를 향한 풀뿌리 직접 민주주의 정치는 김종철의 출발역에서 다시 출발해야 한다. 물론 기후위기 정치에 동의하는 주권자들과 어깨동무한 연대연합의 출발로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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