뭔가 물밑에서 힘겨루기가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노이 노딜 이후 상당 기간 교착상태에 빠진 남북관계에 변화가 감지되고 있고 북미 사이에도 서로의 의중을 떠보는 행보들이 꼬리를 물고 있다. 하반기 한미연합군사훈련을 둘러싸고 남북미 사이의 힘겨루기가 지속되다가 연합군사훈련이 끝난 8월 말부터 조금씩 대화의 물꼬가 트이는 분위기이다. 그 시작은 제76차 유엔총회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종전선언을 제안하는 것부터였다. 곧바로 김여정 노동당 부부장이 종전선언에 대해 호응을 보내왔고, 곧이어 남북연락사무소 재설치 문제와 남북정상회담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메시지를 보냈다. 물론 김여정 부부장은 안보를 둘러싼 남한과 미국의 '이중기준'을 우선적으로 철회할 것을 요구하고 있으며, 대북 적대시 정책의 철회와 상호 존중을 선행조건으로 내걸었다. 남한에 대한 비방을 서슴지 않았던 북한이 조금이나마 대화의 가능성을 열었다는 것만으로도 우선 평가할 만한 진전이다.
물론 혼란스러운 사건들이 실타래처럼 얽혀 있다. 김여정 부부장의 담화 후 사흘 만에 북한은 다시금 미사일 발사에 나섰으며, 10월 19일에는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시험을 감행하기도 했다. 남한도 이에 질세라 고위력 탄도미사일 개발과 SLBM 발사 시험을 진행했다. 독자 개발한 SLBM 발사 시험 현장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북한의 도발"에 대응하기 위해서라도 "미사일 전력을 지속적으로 증강해 나"갈 것을 천명하기까지 했다. 그러면서도 남한의 통일부는 정치·군사적 상황과 상관없이 코로나 팬데믹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북한을 돕기 위해 인도적 지원에 나서겠다는 의지를 표명하고, 남북연락사무소 폭파를 계기로 끊어진 남북통신선은 북한의 제안으로 복원되었다. 남북 모두 평화와 대화를 주장하면서도 뒤에서는 군비 경쟁을 지속하는 것이 현실이다. 상대방의 평화는 '거짓'이라고 폄하하고 나의 무기는 '정의로운' 것이라는 논리가 남북 모두에게 통용되고 있는 것이다.
이중적 의식은 남북의 지도자 언설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김정은 위원장은 북한이 개발한 무기를 전시하는 국방발전전람회 '자위-2021'에서 북한의 군사력 강화는 남조선이나 미국 등 특정한 국가나 세력을 겨냥한 것이 아니라 바로 "전쟁 그 자체"라고 설명한다. 주체사상에서 이미 천명했듯이 국방력의 '자위'란 자신을 지키는 힘을 뜻하며 결코 누군가를 공격하거나 해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비슷하게 서울 ADEX(국제 항공우주 및 방위산업 전시회) 2021에 참석한 문재인 대통령은 국방산업의 발전을 홍보하면서 "강한 국방력 목표는 평화"라고 주장했다. 남북의 지도자 모두 각자가 만든 무기를 선전하면서 이 모든 것들의 목표는 '평화'라고 외치고 있는 것이다. 전쟁이 없다면 무기도 필요하지 않을 것이 분명한데, 더욱 강력한 첨단 무기가 전쟁을 방지할 것이라는 주장을 계속한다.
남북 모두 '여유가 있어서' 군비 경쟁에 나서는 것은 아닐 터이다. 주지하듯 북한은 코로나 팬데믹, 국제제재, 자연재해까지 겹쳐 최악의 경제상황을 경험하고 있으며 국제사회에서는 고난의 행군에 버금가는 식량난이 닥칠 수도 있다는 경고가 나오고 있다. 그나마 북한 경제를 지탱했던 시장이 팬데믹에 따른 봉쇄 조치로 커다란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는데, 당장 백신 수급이 불안한 북한이 외부와의 교역을 풀기도 쉽지 않아 보인다. 코로나 팬데믹의 상황에서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사회경제적 약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는 남한도 상황이 그리 간단치 않다. 거리 곳곳에는 문 닫은 상점들이 즐비하고 급작스레 변화한 노동구조에서 배제되어 위기에 봉착한 사람들의 수가 셀 수 없이 많다. 그럼에도 문재인정부 들어서 국방비는 36.9% 증액됐고 2020년부터는 50조가 넘는 예산이 국방비로 사용되고 있다. 팬데믹 상황에서도 국방비는 꾸준히 늘어왔으며, 국방부의 계획에 따르면 국방비는 더욱 빠르게 증가할 것으로 보인다. 팬데믹 이후 국가 예산이 필요한 곳이 더욱 많아진 상황에서 국방비의 가파른 증가율이 허탈하게 느껴지는 것은 분명 나만은 아닐 것이다.
평화를 위해서 강한 국방력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아무리 곱씹어봐도 현재 한반도의 군비 경쟁을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다. 대화 국면에서 협상력을 높이기 위해서 강한 국방력을 과시해야 한다는 주장에도 동의하기 어렵다. 그것이 전략적으로 적절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원칙과 가치의 측면에서 절대 받아들여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평화를 위한 방법은 반드시 평화로운 것이어야 하며 그 과정은 더더욱 평화지향적이어야 한다. 일각에서는 전시작전권 전환을 준비하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는 주장도 존재한다. 한미안보동맹이라는 구조적 한계를 재구성함으로써 한반도 평화를 이뤄나가려면 강한 국방력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논리이다. 이는 북한이 체제 인정을 받기 위해서 핵과 군사력이 필요하다고 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주장이기도 하다. 불확실한 미래를 볼모로 잡고 현재의 부당한 행위를 정당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 지금의 군비 경쟁은 경쟁적으로 몸집을 불리고 있는 국방력이 정작 남북 사람들의 삶과는 유리되어 있다는 점 역시 간과하고 있다. 남북의 지도자가 언급한 대로 국방력이 '자위'와 '평화'를 위한 것이라면 한반도 사람들의 삶의 안전과 존엄을 결코 해쳐서는 안 될 것이다. 인민들의 경제적 안위를 미사일 실험보다 우선시해야 하며, 첨단 무기를 자랑하는 것을 멈추고 당장 군대 내 (성)폭력 등으로 고통받는 장병들의 인권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남북 모두 총을 들고서 대화할 수 있다는 오만도 벗어버리면 좋겠다. 무기라는 물질이 가지고 있는 속성과 무기를 들고 있는 사람들의 야욕이 합쳐질 때 무기는 결코 대화를 위한 도구로 기능하지 않았음을 역사는 증명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대화를 시작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나의 강함을 과시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존중하는 자세라는 자명한 사실로 다시 돌아가야 할 때이다. 기회가 그리 많이 남아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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