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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을 못 추어도 '탈춤'을 출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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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을 못 추어도 '탈춤'을 출 수 있다!

[탈춤과 나] 25 어연선의 탈춤 ①

탈춤과 마당극. 대부분의 사람들이 마당놀이나 춘향전, 심청전 같은 고전을 떠올린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로미오와 줄리엣'이 연극의 전부라고 생각했던 내가 마당극으로부터 연극을 시작하게 된 것은 운명의 장난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어릴 때부터 연극이 하고 싶었던 나는,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연극반에 가입했다. 요즘 세상에서야 대학 동아리나 학생회가 별로 특별할 것이 없지만, 내가 대학을 다니던 80년대 중반은 학생들의 자율적이고 민주적인 활동이 자유로워진지 얼마 되지 않아 학교 곳곳에 활기가 넘치고 있었다. 그런 분위기를 타고 각 과마다, 동아리마다(그 당시엔 써클이라 불렀다) 신입생을 참여시키려고 안달이었다. (영화 1987에 보면 동아리마다 신입생 호객행위에 열성인 선배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강동원 같은 선배가 있다면야 모두 다 그 동아리로 몰릴텐데....)

연기가 하고 싶어 연극반에 가입했지만 학기초 공연은 이미 선배들이 다 준비해놓은 것이라 극장 문지기 노릇만했던 나는 우연한 기회에 연기를 하게 되었으니 국문과 신입생 환영회에서 열린 촌극 경연대회를 통해서였다. 우리 조는 '매 맞은 아내'를 주제로 발표를 했는데, 나는 과감히 아내를 폭행(?)하는 남편 역할로 화려하게 배우 데뷔를 하였다. (여대였기 때문에 남자 역할도 모두 여자가 할 수밖에 없었다) 당당히 1위를 차지한 우리 조의 촌극은 학교 전체 신입생 환영회에서 재공연의 영광을 가져다주었으며, 나는 신입생 가운데에서도 탑클라스의 인기를 누리게 되었다.

여러 동아리에서 끊임없는 선배들의 러브콜이 이어지는 가운데, 국문과 마당극에 참여하게 되었다. 마당극이 뭔지, 탈춤이 뭔지, 문화운동이 뭔지 몰랐다. 나는 근사하고 우아한 연극이 하고 싶은데, 구리구리한 마당극이라니? 하지만 하필이면 연극반에서 신입생에게 관심이 없던 시기였던데다가 과 직속 선배들의 끈질긴 꼬드김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 어쨌든 마당극도 연극이니 한번 해보자 싶어 참여를 결심했다. 그런데 먼저 세미나를 해야 한단다. 탈춤과 대동놀이, 문화운동 이론, 한국 근현대사와 작금의 정세 등 요상한 공부를 시키는게 아닌가?

마당극이란 탈춤이라는 우리 전통 연희에 양식적 뿌리를 두고, 이 시대의 이야기를 담아내야 한다고 했다. 양식과 내용의 변증법적 통일! 사회적 이슈를 담되 예술적 완성도가 떨어지면 안 된다는 쉬우면서도 지극히 어려운 과제가 주어져 있었다. 마당극은 그저 연극이 아니었다. 서구에서 주입된 왜곡된 연극사를 바로잡고 우리 민족의 전통 예술을 되찾을뿐더러, 그안에 담겨있는 민중들의 공동체 정신도 되살려야 한다! 그것이 공동창작이며 우리가 추구하고 지향하는 연극(마당극)이었던 것이다!!! (무슨 말인지도 잘 모르면서....)

세익스피어를 공부하고 싶었던 새내기들은 역사적 사명과 집단 지성의 힘으로 로미오와 줄리엣은 떠나보내고 말뚝이와 취발이를 받아들였다. 채희완, 임진택, 류해정, 박인배, 정이담 등 마당극 시조새 선배들의 어렵디 어려운 논문들을 성경처럼 읽어가며 공부했다. 특히 국문과 학생들의 창작에 대한 열정과 진지함은 그 누구에게 뒤지지 않아서 대본의 완성도를 위해서 밤새워 토론하고 집필하는 시간이 이어졌다. 어렵긴 하나 공부하는 게 아주 싫진 않았고, 대본 쓰는 것도 재미있었다.

그런데 큰 문제가 있었다. 바로 탈춤이었다.

연극이라고 하면 근사하게 차려입고 멋진 대사나 읊조리면 될 줄 알았는데, 기본기로 탈춤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봉산탈춤 기본을 배우기 시작하였는데, 탈춤을 배우기 위해서는 '오금질'이라는 동작을 기본적으로 해야 했다. 오금질은 '덩닥기 덩딱 (얼쑤)'라는 타령장단을 입으로 크게 소리 내며 기마 자세에서 앉았다 일어났다를 반복하는 동작이었다. 자세를 제대로 잡기도 어려웠지만 한 두 번만 해도 장딴지가 아파온다. 피티 체조하듯이 오금질 열 번, 스무 번을 겨우겨우 해내고 나면 잘 걷기도 어려웠고, 다음 날 때쯤 되면 화장실에서 쭈그려 앉을 수도 없는 상태가 되어 다들 엉금엉금 기어 다니다시피 했다. 워낙 몸치, 운동치였던 나는 탈춤을 배우기가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열심히 하는데도 실력이 늘지 않는 나에게 선배들이 구제불능이라는 치명적인 진단을 내리기까지 했다.

힘들어도 입장단은 크게 외쳐야 했다.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다리가 점점 안 움직이고 목소리가 작아지고 신음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나올 때면 어김없이 선배들의 고함이 들려온다.

‘입장단 안 하나!!!’ ‘더 크게!!!’

토할 것만 같았던 탈춤 연습 시간. 솔직히 그 시간이 제일 싫었다.

▲덕성여대 국문과 마당극 <땅을 잃어버린 하늘> 마당극 <밥>을 각색하여 공연하였다. 가운데 하얀 옷을 입고 앉아있는 사람이 필자이다. (1987, 덕성여대 쌍문동 캠퍼스 L관 중정) ⓒ어연선

그러나 마당극은 재미있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마당극을 처음 도입한 국문과 선배들의 실력도 상당한 편이었고, 도움을 주러왔던 외부 전문 극단의 선배들도 열성적이었다. 무엇보다 당시 공연을 같이 했던 선후배 동기들과 합이 잘 맞았다. 이후 연극계로 진출하거나 유명 드라마 작가가 된 친구, 후배도 있다. 1986년 공연했던 ‘쟁기’는 소값파동을 다룬 작품으로 민족극대본선 대학극편에도 실릴 정도로 수작이었다. 1987년에는 연희광대패의 마당극 ‘밥’을 각색한 작품으로 꽤 주요 배역을 했다. 여름방학이면 놀이패 한두레가 운영하는 탈춤 강좌에 가서 보충수업을 받기도 했다. 열심히 연습하다 바지의 중요한 부분이 찢어지는 불상사는 탈춤을 배웠던 누구나 겪었던 일이리라.

▲1980년대말~1990년대 마당극 전성기에 활동한 민족극연구회는 여러 편의 민족극(마당극)대본선을 펴냈다. 그중 대학극편에 내가 1986년에 공연한 ‘쟁기’ 대본이 실렸다. ⓒ어연선

그렇게 시간이 흘러 자연스럽게 선배가 되자, 춤에는 구제불능이었던 신입생은 후배들에게 탈춤을 가르치는 선배가 되어 있었다. 물론 봉산탈춤 기본, 그것도 외사위까지만 가능했고, ‘바담풍’해도 ‘바람풍’했던 후배들이 있어서 다행이었지만.... 그렇게 마당극에 심취한 나는 1988년 3학년이 되면서 국문과 문화부장이 되어 그해 공연을 책임지게 되었다. 마침 그해 제 1회 민족극한마당이 열렸고, 후배들, 동기들과 함께 열심히 마당극을 보러 다녔다. 놀이패 신명의 ‘일어서는 사람들’, 놀이패 한두레의 ‘한춤’, 극단 현장의 ‘횃불’... 주옥같은 작품들을 보며 웃고 울었다. 탈춤을 잘 춘다고 해서 우수한 작품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느끼기도 했지만, 그래도 마당극에는 멋진 탈춤이 녹아들어있어야 했다. 그래도 탈춤을 좀(아주 조금) 배웠다고, ‘누구누구는 정말 춤 잘 추더라’ ‘역시 탈춤은 00극단이야’ 하며 품평을 하기도 했다.

80년대 중반 마당극은 대학가를 중심으로 확산되었고 전문극단들도 생겨나 각 학교 축전마다 가장 인기있는 프로그램 중의 하나로 자리잡았다. 1학년때부터 놀이패 한두레를 비롯한 전문 극단이나 다른 학교의 탈춤반 선배들이 오셔서 탈춤도 가르쳐주고 공연 연출을 해주기도 했다. 3학년 때 연출로 온 분은 놀이패 한두레의 심규호 선배였는데 그 분은 정말 춤을 잘 추셨다. 연출력에 대해선 일말의 의구심이 있으나 탈춤을 비롯해서 마당극과 관련된 다양한 썰을 풀어내는 입담은 정말 대단했다(믿거나 말거나 하는 이야기도 많았지만). 그때의 인연은 지금까지 이어져서 벌써 30년이 훌쩍 넘어 이제는 같이 재미있는 노년을 꿈꾸는 관계가 되었다.

대학에서의 탈춤과 마당극의 경험은 졸업 후 직업 연극인의 길로 뛰어드는 계기가 되었다. 대학시절 내내 전문 마당극 단체들과의 교류가 있었지만 우여곡절 끝에 극단 ‘현장’에 입단하게 되었다. 한두레 아니고 현장? 아마도 탈춤을 잘 못 추어서? 일부는 맞고 일부는 틀리다. 대학시절 내내 탈춤에 도전했지만 언제나 기본수준 이상으로 진도가 나가지 않는 탈춤 실력으로는 도저히 탈춤 잘 추는 사람들이 우글거리는 단체에는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던 것은 맞다. 그러나 그 당시 자신감 뿜뿜 넘치던 내가(요즘 말로 근자감이다) 그 이유만으로 극단 ‘현장’을 선택한 것은 아니었다.

80년대 말, 노동자 대투쟁의 열기속에 극단 ‘현장’은 창단공연 ‘횃불’과 대표작이 된 노래극 ‘노동의 새벽’으로 전국적으로 노동연극 전성시대를 열었다. 마당극은 풍자와 해학이 넘치는 전통 탈춤 구조로 양식화되는게 일반적인데 가끔은 고전 탈춤의 형식에 치우쳐 극적 구성이 취약하거나 정서적 공감이 잘 되지않는 경우가 있었다. 그런데 노래극 ‘노동의 새벽’은 좀 달랐다. 마당극이라고 하기도 어렵지만 정극도 아닌 이 작품은 전 작품 ‘횃불’이 굿 구조의 마당극이었던 것과 달리 현실 속 인물들의 생생한 이야기와 노래가 마음을 흔들었다. 마당극도 이렇게 만들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나를 극단 ‘현장’으로 이끌었다. 탈춤반 출신이 대부분이었던 많은 마당극 단체와는 달리 극단 현장에는 연극반 출신이나 사회단체 출신들도 많이 섞여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탈춤 기본기가 천차만별이어서, 춤을 잘 못추는 단체라는 평을 받기도 했다.

▲극단 현장 <노동의 새벽> 부부 장면. (1988. 서울 미리내소극장) ⓒ어연선

어연선 : 덕성여대 국문과 마당극패 출신, 극단 <현장> 단원 및 대표 역임. 세종문화회관 공연기획팀장 등을 거쳐 현재 광명문화재단 대표이사로 재직중.

[탈춤과 나] 원고 청탁서

새로운 언론문화를 주도해가는 인터넷 신문 <프레시안>(http://pressian.com)이 <사)민족미학연구소>와 <창작탈춤패 지기금지>와 함께 탈춤에 관한 “이야기마당”(칼럼 연재)을 기획하고 있습니다.

젊은 시절 탈춤이 좋아서, 쏟은 열정이 오롯이 담긴 회고담이거나 증언, 활동일지여도 좋고 아니면 현금 문화현상에 대한 어기찬 비판과 제언 형식의 글이어도 좋습니다.

과거 탈춤반 출신의 세대에게는 아련한 추억을, 신세대들에게는 다소 생소한 전통문화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글 내용이면 충분할 것입니다. 한 때나마 문화패로서 탈꾼으로서 개성넘치는 숨결을 담아내면 참 좋겠지요.

글 말미에는 대학탈춤패 출신임을 밝혀주십시오(대학, 학번, 탈춤반 이름 및 현직)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사진(1-5매)이나 시청각 자료도 곁들여 캡션을 달아 보내주시면, 지난 기억이 되살아나 더욱 생생한 느낌을 전달해줄 것입니다.

알뜰살뜰한 글과 사진제공에 대한 원고사례비는 제공되지 않고, 다만 원고가 묶여져 책으로 발간될 때 책 두 권 발송으로 사례를 대신합니다.

제 목 : [탈춤과 나] (부제로 각자 글 나름의 자의적인 제목을 달아도 좋음)

원고 매수 : 200자 원고지 15-30매(A4 3-5장)

(사진 등 시청각 관련 자료 캡션 달아 첨부하면 더욱 좋음)

보낼 곳 :

(사) 민족미학연구소 (namihak@hanmail.net) 채 희 완 (bullim204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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