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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바이칼호수에서, 우리가 놀 터는 여전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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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중국에서, 바이칼호수에서, 우리가 놀 터는 여전히...

[탈춤과 나] 24. 김원호의 탈춤⑤끝

에피소드 둘. 교주님이 불러서 중국에 탈춤 공연 간 적이 있었다. 교주님 공연에 늘 같이 다니는, 나보다사위 좋은 기라성같은 후배들이 있었는데, 아마 시간 때가 안 맞아서인지 내가 땜빵인 것 같았다. 호기를 놓칠 수가 없어서, 내가 맡은 목중, 취발이, 영감을 열씸히 연습했다. 연변 어디쯤에서 몇 번 놀았는데, 나야 당연 감개무량 잘 놀았다. 이 때 우리의 탈판에 모여드는 조선족들의 행렬은 장관이었다. 대부분 하얀 옷을 입고, 여기저기서 비포장 도로로, 밭두덕길로 모여드는데, 나는 잠시 탈춤 한창 때인 19세기로 돌아온 것 같아 멍해지면서 아울러 커다란 기쁨이 용솟음쳤다. 탈판이 뭔지, 뭔 구경거리인지 그들은 깨끗한 옷을 차려입고 나들이가듯이 오셨다. 그간 객지에 살아왔던 나름의 회한을 뒤에 달고, 탈판에 스스로 길굿을 치면서 모여드는, 몸과 마음이 일여된 정성들이 정갈했던 최고의 관중들이었다.

에피소드 셋. 바이칼에서 굿친 적이 있었다. ‘한러유라시아 대장정’이라는 행사였는데. 당시 김원기 국회의장까지 블라디보스톡으로 날아와서 축사하는 것 보고 이거 국가 차원의 급이구나 여겨졌다. 동팀 부단장이었던 봉준형이 불러서 ‘평화맞이패’ 이름으로 급조된 문화팀으로 참여하였다. 가야금 하는 이정표, 고창농악의 이명훈, 젊은 굿쟁이 백은희와 같이 갔다. 동팀은 블라디보스톡에서 바이칼까지 열 대의 짚차에 나누어 타고 갔다. 서팀은 모스크바에서 출발했고, 이르쿠츠크에서 만나서 바이칼 천지굿을 치르기로 하였다. 동팀은 각 분야 전문가들 40인으로 구성되어서 어떤 일도 못할 것이 없는 최강 사절단이었다. 가는 주마다 혁명광장에서 우리는 마당에서 풍물굿을 놀았고 러시아인들은 무대 위에 올라가서 노래와 춤을 추었다. 보름쯤 걸려 바이칼 알혼섬에 들어갔는데, 굿연구소 박흥주가 김매물 만신을 모시고 와서 부르한 바위가 내려다보이는 마을 언덕에 무화를 걸며 행사장을 만들고 있었다. 이애주선배도 도당굿 반주팀을 대동하고 오셨다. 저녁 해지고 우리 팀이 풍물굿으로 동네를 돌고와서 한 판 놀았고, 몽골 샤만 대여섯이 7-80kg 된다는 철 장식 무복을 입고 두어 시간을 서서 주문을 외었다. 김매물 만신은, 여늬 때와 다름없이 황해도굿을 하였고, 종내는 항아리작두 위에 올라섰다. 압권은 이애주선배의 춤이었다. 목진호, 변집섭 등 도당굿팀의 반주로 ‘유라시아의 빛’이라는 춤을 추었는데, 마지막엔 기다란 휜 천을 어느새 모두 잡게 하더니 그대로 달려가서 바이칼에 전부 빠뜨렸다. 마침 비바람에 번개까지 몰아치기 시작한 한밤중이었는데, 애주누님은 아랑곳없이 바이칼 청정한 물에 우리 모두를 담그었고 저절로 대동춤을 추게 했다. 그야말로 세례를 받고 거듭나는 기분이었다.

▲유라시아의 빛 ⓒ김원호
▲유라시아의 빛 ⓒ김원호
▲유라시아의 빛 ⓒ김원호
▲유라시아의 빛 ⓒ김원호
▲유라시아의 빛 ⓒ김원호

그 며칠 전날 오랜 여정 끝에 바이칼을 처음 맞닥뜨렸고, 감격했고, 일박을 하기로 하였다. 궂은 날씨 밤이 되어 문화팀이 비나리 고사를 하는데, 누군가 자작나무를 태웠고, 신화전문가이자 북미인디언 연구가인 슈나이더가 쑥을 마당에 피우더니 서성거리기 시작했다. 이상한 기운이 형성되었고, 모두들 쑥향을 가슴에 품은 채 서성거렸는데 저절로 맴돌이가 되었다. 순식간에 다들 신인융합되어 ‘서성거리는 춤’이 추어졌는데 무척 아름다웠다. 본성으로 추는 맑은 춤이었다. 이런 기운을 풍물굿판에서 늘 형성하고 싶었다. 지금은 쑥향의례를 만들어 풍물굿 본풀이 하기 전에 인트로로 꼭 한다. 우리 민족의 허브입니다라고 뻥치면서.

▲ 바이칼 쑥향의례 ⓒ김원호

8. 촛불문화와 나라굿

굿쟁이들의 로망인 나라풍물굿을 어를 수 있었다. 2016년 촛불광장이 그리 되게 해주었다. 나는, 그 시절 쯤에 원주 문막 아트코어굿마을이라는 단체에서 소일하며 지냈고, 오로지 생계 차원으로 풍물굿에 관한 네 권의 책도 썼다. ‘탈굿 큰어미와 정화수의례’는 부지런히 다녔고, 알려졌고, 요청하는 곳도 점차 많아졌다. 무척 재미있었다. 탈굿은 보고보고 또 봐도 늘 감동이었다.

혼자 잘 놀고 있는 나에게 2016년 겨울들어서자 굿쟁이 후배인 전동일이 느닷없이 전화하더니, 풍물인들의 시국선언문을 써달라하고, 시국선언 풍물굿판을 열테니 정화수의례를 하자 했다. 내가 좀 할 수 있는 일인지라 그리 하자, 했고, 12월 3일 광화문에서 풍물굿판을 열었다. 당시 광화문 촛불광장을 처음 겪었는데 뭐라 할 수 없는 격조 있는 기운을 느꼈다. 뭐지 싶어 그 해 겨울 내내 시간만 나면 달려갔다. 히야, 당시 풍물굿 광대들은 뭔 정성인지 날마다 풍물굿판을 벌였고~

그 겨울을 지내면서 아, 이것이 나라굿이구나 싶었다. 수많은 이들이 촛불광장에서 자발적으로 형성시켜나가고 있는 ‘촛불문화’ 자체가 나라굿이었다. 자유롭고 활기찼고 장엄했고 무엇보다 따뜻했다. 나라굿을 본래 담당인 풍물굿이 나서서 해야겠다는 발심이 들었고, 종내는 함 이루었다. 전국의 풍물패가 나서서 치른 ‘31백주년 만북울림’이었다. (사)나라풍물굿이라는 단체도 결성되었다. 그 단체의 취지문을 작성하면서 강령 수준의 다짐을 했다.

▲ 만북울림, 정화수의례 ⓒ김원호
▲ 만북울림, 정화수의례 ⓒ김원호
▲ 만북울림, 정화수의례 ⓒ김원호
▲ 만북울림, 정화수의례 ⓒ김원호
▲ 만북울림, 정화수의례 ⓒ김원호

나라풍물굿은, 2016년 촛불광장의 자발적 나라굿을 이어나가고자 발원되었다. 그 해 전국 각지의 여러 광장에서 겨울을 나면서,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나라의 모습’으로 숙성되어나가며 따뜻한 마을을 이루었던 장관을 우리는 잊지 못한다. 자유로운 개성과 영혼들의 창발적 연대라는 그 ‘촛불문화’를 우리 시대 풍물굿의 소명 의식으로 이어나가고자 한다.

나라풍물굿은, 촛불광장에서 시국선언 풍물굿판을 마련하면서 이를 ‘새로운 나라로 가는 길굿’으로 선언했고, 그 기쁨으로 ‘3.1백주년 만북울림’을 치루어내었다. 100년 동안, 우리 민족의 존엄과 자주와 정의를 위해 줄기찬 항쟁을 이룩하게 해준 아름다운 3.1정신이, 모든 사람들의 공명이라는 만북울림을 통해 다시 현실로 들어와 더욱 깊어졌다.

(사)나라풍물굿은, 우리 민족의 ‘몸과 꿈’을 시대정신의 대동신명으로 썩썩 나서게 하는 촉매이자 전위가 되고자 한다. 온 국민이 참여하는 국중대회를 중심으로, 풍물굿이 할 수 있는 일을 전방위적으로 다듬고 새로이 개척해나갈 것이다. 여전한 사회적 질곡을 늘 부단히 넘어서려는 대중들의 감수성과 집단지성의 흐름에 명확하게 놓일 것이다. 풍물굿이 잘 할 수 있는 우리 민족의 집단무의식을 풍성하게 호출하여, 현실인식과 근원의식을 대동으로 진작시켜 나갈 것이다. 새로운 나라로 가는 길을 열어젖히는 풍물굿을 늘 울릴 것이다.

9. 탈춤과 나

봉준형은 ‘더 큰 자아’로 세상과 접속하는 것이 굿이라고 했다. 탈춤과 풍물굿을 같이 향유할 수 있었던 나는 그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오랫동안 굿도 하고 춤도 추어보았더니, 더 큰 자아는 이미 내 속에도 있고 세상 속에도 있다라고 느껴진다. 사람은 존재하는 한, 자신의 근원을 돌아볼 수 밖에 없다. 성속일여의 문화는 더욱 확장되고 심화될 것이다. 신명은 내 안의 신성이 밝아지는 일이고, 당연히 탈의 신명과 풍물의 신명은 성속일여라는 본디 즐거움 속으로 우리를 보내버린다. 유한 존재 인간의 애절한 노래와 춤으로 세상을 극복하며, ‘잘’ ‘살게’ 한다.

사람들의 감수성은 빠른 속도로 다층적이고 다원적으로, 게다가 비선형적으로 확장되고 있고, 오감이 점차 통섭되어가며 사람의 지감각 인지능력은 새로운 소통 언어로 유통되고 있다. 참여, 개방, 공유 이후의 웹 3.0은 영성으로의 진화라고도 발언되어진다.

당연히 새로이 해야 할 일이 본격적으로 많아지고 있다고 여겨진다. 무엇보다 우리는 지금 춤이 모자라다. 풍물굿은 행진과 악기율동만 과하게 남았고, 탈춤은 ‘탈의 춤’의 당대적 확장에 게으름의 시간이 길다.

나는 울울창창했던 젊은 시절에 탈춤을 추었고, 탈춤의 시대정신과 미학을 키워가며 풍물굿을 했다. 한 갑자를 살았지만 그놈의 성속일여 대동신명은 이미 몸과 마음에 머물며 나를 늘 진동시키고 싶어 한다. 과거로의 그리움도 깊어지고, 미래로의 그리움은 여전히 설레인다. ‘온전히 미쳐 날뛰었던 날들에 대한 그리움 등꽃 재재거리던 그 밤 폭풍우의 밤을 향해/나 시간과 몸을 다 해 기어가네’(허수경)이다.

탈춤을 당대 신명으로 다시 추고 싶다. 목중과 노장을 우리시대에도 놀고 싶다. 풍물굿과 더 깊게 어울려 우리 삶의 본풀이를 새삼 또 어르고 싶다. 미래 삶을 격조 있게 예감해주었던 촛불문화는 물밑에서 지금도 당연히 진화되고 있을 터이다. 우리가 놀 터를 여전히 만들어주며 우리를 기다리고 있지 않겠는가. (끝)

글쓴이 김원호 : 홍익대 탈춤반 '눈솟말 재인패', 76학번.

[탈춤과 나] 원고 청탁서

새로운 언론문화를 주도해가는 인터넷 신문 <프레시안>(http://pressian.com)이 <사)민족미학연구소>와 <창작탈춤패 지기금지>와 함께 탈춤에 관한 “이야기마당”(칼럼 연재)을 기획하고 있습니다.

젊은 시절 탈춤이 좋아서, 쏟은 열정이 오롯이 담긴 회고담이거나 증언, 활동일지여도 좋고 아니면 현금 문화현상에 대한 어기찬 비판과 제언 형식의 글이어도 좋습니다.

과거 탈춤반 출신의 세대에게는 아련한 추억을, 신세대들에게는 다소 생소한 전통문화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글 내용이면 충분할 것입니다. 한 때나마 문화패로서 탈꾼으로서 개성넘치는 숨결을 담아내면 참 좋겠지요.

글 말미에는 대학탈춤패 출신임을 밝혀주십시오(대학, 학번, 탈춤반 이름 및 현직)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사진(1-5매)이나 시청각 자료도 곁들여 캡션을 달아 보내주시면, 지난 기억이 되살아나 더욱 생생한 느낌을 전달해줄 것입니다.

알뜰살뜰한 글과 사진제공에 대한 원고사례비는 제공되지 않고, 다만 원고가 묶여져 책으로 발간될 때 책 두 권 발송으로 사례를 대신합니다.

제 목 : [탈춤과 나] (부제로 각자 글 나름의 자의적인 제목을 달아도 좋음)

원고 매수 : 200자 원고지 15-30매(A4 3-5장)

(사진 등 시청각 관련 자료 캡션 달아 첨부하면 더욱 좋음)

보낼 곳 :

(사) 민족미학연구소 (namihak@hanmail.net) 채 희 완 (bullim204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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