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놀이판 녹두골
애오개가 민중문화운동협의회로 확장 전개되면서, 나는 전주로 내려가게 되었는데, 아직도 묘한 일이었다. 지역으로 내려가 지역활동을 강화하자고 해서 나는 당시 필봉굿을 통한 연고지인 전주로 왔는데, 지금도 어떻게 내려왔는지(선배들이 내려보낸 것 같은데), 일 끝나고도 오랫동안 왜 소환되지 않았는지를 아무도 말해주지 않는다. 결국 나는 30여년 동안이나 전주에서 살았다.
지역에 문화운동 조직을 만들려 했는데, 뒤져보니 ‘백제마당’이라는 단체의 활동이 체크되었다. 움직임이 이미 있었던 것이다. 박인배선배가 와서 같이 마당극을 만들고 연출했다고 한다. 수소문 끝에 이영란, 김주면, 정형수 등을 만날 수 있었고, 곧 군 복무 중인 좌장 박종일을 만났다. 당연히 의기투합되었고, 머지않아 ‘놀이판 녹두골’을 만들었다. 김홍관, 김주영이 달려왔고, 원광대 탈춤반 쌀패 출신 김승호, 백인선, 전북대의 전미숙, 조남식, 노정순, 송호용, 조경기, 나경렬, 군산대의 김복숙, 신석호가 합세하였다. 양은숙, 류현순 등 많은 이들이 이후 명맥을 이었다. 이들은 전북의 문화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고 내쳐 진화시킨 주역들이다.
이들은 무척 다양한 활동을 하였다. 당시 탈춤 대행으로 유행하기 시작한 마당극을 시시때때로 여러 개 만들어 이른바 현장공연을 다녔다. 섬진강 다목적댐 건설 때 물에 잠기는 마을을 떠나 계화도 간척지로 이주했는데 거기서조차도 개발논리로 쫒겨나는 사람들의 이야기인 ‘계화도 땅풀이’를 필두로, 고추파동, 소몰이투쟁 등 당장의 정세가 요구하는 마당극을 늘 부리나케 창작하고 공연하였다. 제목조차도 기억나지 않는 마당극 포함하면 열 댓개의 마당극을 만들었던 것 같다. 땅풀이는, 명품 탈굿인 교주님 한두레의 ‘강쟁이 다리쟁이’의 힘도 받았는데, 녹두골 식구들의 빼어난 연기가 가미되어 지금도 공연하고 싶을 정도이다. 완성도도 있어서, 익산, 대구, 서울까지 초청받아 공연을 하였다. ‘탈굿 소몰이’도 이리저리 초청을 받은 작품인데, 이 둘은 문선대 의무빵 초점 마당극을 벗어나 우리도 무척 재미있어한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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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곤 선배, 조항용 선배가 내려와서 ‘장사의 꿈’을 공연해주었고, 미술공동체 ‘두렁’ 동인들이 녹두골 공간으로 엠티와서 우리 나라 최초로(?) 지하실 벽화를 멋들어지게 그려주었다. 당시 굿공부 한다고 하다 우연히 만난 선유도 보건소장 서홍관을 통해 원단 씻김굿을 하는 만신을 모셔서 실제로 우환 있는 집을 씻어주고 그 중 하이라이트를 녹두골에서 공연도 하였다. ‘마당은 삐뚤어졌어도 장구는 바로 치자’라는 김용택시인의 출판기념회를 문화예술판으로 만들기도 했다.
탈춤과 풍물 강습을 했는데, 찾는 이가 엄청 많았다, 당시 우리만이 아니라 전국적인 현상이었다. 우리는 당시에는 인기(?) 직업이라 늘 밤에는 강습생들과 뒤풀이 막걸리판이 벌어졌다. '못 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 ‘한다리를 들고 날라리를 불거나/고갯짓을 하고 어깨를 흔들거나’(신경림)를 안주 삼아, 80년대식 따뜻한 인간 관계들을 맺으며 나름 재미있게 살았던 시기였다. 기존 텍스트의 전수에 심하게 바빠져서, 탈춤과 풍물의 진화 노력에 좀 무뎌진 시기라는 단점도 있었지만, 그 성과는 대단했는데, 몇 년 동안 강습을 통해 연을 맺은 분들이 근 천여명이었다. 당시 정비공단 노동자풍물패 등도 조직했고, 이른바 두레조직 활동이라는 이름으로, 농촌 지역에 풍물패를 예닐곱군데 조직도 했다. 농악 지역에 풍물이 역으로 들어간 것이다. 이제와서 생각해보아도 대단한 열풍이었다.
에피소드 하나. 전북기독교농민회가 농민운동을 당시 용어로 가열차게 시작할 때인데 군 단위 청년 간부들 십수명이 풍물을 배우고 싶다해서 추운 겨울 마이산 깊숙한 제각에서 남 몰래 어울린 적이 있었다. 슬슬 풍물도 사찰을 받기 시작할 즈음이었다. 이 때 변소에도 꽹가리를 들고다녔던 박형진이라는 걸출한 이가 나왔다. 재미가 오져서 쇠를 못 놓겠다는 것이었다. 당시 풍물에 대한 갈망은 이 정도까지 나갔다. 박형진은 이후 농민 상쇠로서 여러 가지 활동을 하게 된다.
80년대 중반부터 민주화운동이 사회 전 부면에서 달궈지기 시작했다. 문화운동 내부에서도 각 부분운동으로 적극 들어가서 전체 운동을 적극 촉진시키자는 의견이 나와서 설왕설래하였다. 결국 녹두골도 논의를 한 결과, 공장, 농촌으로 갈 사람은 이전하고 지금의 근거지는 시민문화운동을 주축으로 하자라는 결론을 내었다. 나는 맑시즘에 푹 빠져서 기층 민중들과 같이 살면서 운동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고, 결국 노동운동을 하기로 했다. 나와 박종일이 직업훈련원에 다니면서 정비기능사 2급 자격증을 따서 각각 공장에 들어갔다. 녹두골은 온고을이라는 이름으로 개편하고 정형수가 주도하여 활동을 계속하였다. 지금 생각하면, 이것이 녹두골이 쌓아온 혁혁한 문예적 기반과, 더 나아갈 수 있는 전망과 실천력이 흩어지는 안타까운 일이 되었다.
나는 정비공장, 지관공장을 거쳐 주물공장에 다니다가 87년 대투쟁 때, 진형국이라는 노동자를 만나 노동조합을 만들었으나, 곧 반장들의 계략으로 조합은 깨지고 해고되었다. 지방노동위에 제소해서 이겨서 복직되었으나, 1680도 쇳물이 안전화 사이로 들어와 산재를 당하고, 곧 공장을 그만 두었다. 사명감은 투철했으나 활동과 생활은 신나지 않았던 시기였다. 곧 본향같은 문화판으로 되돌아왔고 이후 조직 중심의 일을 하였다. 전북민중문화운동연합으로 진전되었고, 전국문화운동단체 대표자회의로 일이 커졌다. 전국을 돌며 번갈아가며 모여서 광대 수다 떨며 일하면서 기운을 차렸다. 이 때 각 지역 풍물패들과 같이 만든 창작판굿이 ‘풍물판굿 91연대’였다. 그러다 종내는 서울의 민중문화운동연합과 합쳐져서 노동자문화운동연합을 결성하기에 이르렀는데, 90년대 중반부터 흐지부지 소멸되었다.
7. 탈굿 큰어미와 정화수의례
1980년대 민주화운동 시절 대규모의 ‘사회적 신명’이라는 굿적 열기와 깊이를 만들어내었던 풍물굿은 그 대단원 이후로 기운이 조금씩 빠지기 시작했다. 문선대식 활동 위주가 지속되어간 것, 그리고 이후 근대농악의 판굿 위주 공연 형식으로 단순 재생되면서 대략 고착화되어 나간 것이 중요 이유이다. 요체는 당대 감수성을 먼저 나서서 들여다 보려 하지 않은 점이다. 꽹과리 치면 사람들은 신명은 나겠지 하며 치배들만 억지 유사신명에 자족했다. 대중의 감수성은 진화하며 당대적 신명을 삶의 현장에서 욕망하는데 그를 잘 들여다보는데 다소 게을렀다. 게다가 인터넷 시대가 열리면서 문화지형은 급격히 바뀌고, 대중들의 감수성은 점점 더 차원을 달리하며 진화되고 있다. 이제는 훌륭한 풍물굿 한 판의 문제가 아니라 풍물굿이 놓일 문화지형까지 챙겨가며 만들어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풍물굿 텍스트만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이 놓일 자리(콘텍스트)까지 사유해야 하고 그런 문화적 동질성의 지형을 마련해야 살아남는 커다란 전환의 지점에 맞닥뜨려진 것이다.
80년대 말에 나이가 차서 결혼하고 생계활동을 하였다. 사이사이 남원농악단 풍물교육연구소에서 몸 좀 풀다가 쓴 책이 [풍물굿 연구]였는데 풍물굿진영에서 처음으로 나온 책이라 많은 사람들이 읽어주었다. 대안학교 교사, 동북아평화연대에서 NGO 활동 등을 하면서도 풍물굿에 대한 그리움은 놓지 않았던 것 같다. 강화도의 한 대안공동체에서 생명축전을 열었는데 그 때 매향(埋香)제를 만들면서 풍물굿의 의례성에 대해 길을 열어보았다. 2004년에 마차레(지극히 채우고 비운다는 뜻. 영고와 동맹의 우리말)라는 이름의 제천 행사에 정화수의례라는 의례굿으로 시작해보았는데, 풍물굿과 무척 맞춤했고 이후 국내외 여러 지역에서 속깊은 호응을 얻으며 조금씩 퍼져나갔다.
2010년에 동북아평화연대 활동을 끝으로 기어이 풍물굿 광대로 돌아왔다. 원주에 있는 광대패 모두골의 정대호가 와서 좀 편히 지내라해서 2년 동안 한적한 시골에서 지냈다. ‘원주풍류굿’이라는 풍물굿을 만들어 공연하면서 예열을 하였다. 이때 극작도 하는 미술대학 출신 춤쟁이 이진희의 극작 ‘허균전-벗어나면 꿈이라’는 연극도 연출했는데, 이 인연으로 결국 다시 탈춤을 조우하게 되었다. 이진희는 이전에 ‘두 에미’라는 창작탈춤도 만들었다는데, 어느 날은 ‘탈굿 큰어미’라는 작품으로 횡성의 한 행사에 공연나갔다. 놀러삼아 따라갔다가 공연하는 것을 보고 술이 확 깼다. 이거다 싶었다. 그간 행해왔던 정화수의례굿과 결합해보니 안성맞춤 윈윈이 되었고, 곧 ‘탈굿 큰 어미와 정화수의례’로 가동해보았는데, 반향이 쎄게 왔다. 기뻤다.
이진희의 탈춤 큰 어미는, 고성오광대 큰어미에서 처첩갈등은 버리고 춤만 가져와 독자적인 내러티브를 만들어낸 창작탈춤이다. 처음에는 세 어미가 나오는 구성이었는데, 정화수의례굿과 더불어 현장에서 점차 진화하면서 지금은 이진희 혼자 추고 있는데 당대성을 확실히 얻었다고 여겨진다. 메나리토리의 음악과 퉁소와 결합하면서 춤으로서의 추상성을 얻어나갔다. 정화수의례도 이로써 모성(母性)성을 확실히 획득했고, 점차 ‘시대의 모성’으로 발전하게 되며 지금은 다음과 같은 의미로 행해지고 있다.
정화수 치성은, 여성-모성들이 오랜 세월 스스로 대물림해온 근원 의례입니다. 전국 도처에서,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날마다, 새벽 첫 샘물 한 그릇에 별빛 기운을 담아 축원을 합니다. 객지에 나가 있는 내 생명들이 삶 속에서 늘 무탈하기를, 나아가 그 생명이 사는 세상과 세상 사람도 모두 무탈하기를 빌고 축원하였습니다. 나와 세상을 상생시키는 심도를 가진 기막힌 비손과 축원이었습니다. 단지 물 한 그릇의 정성으로 우리의 본향(本鄕)을 날마다 호출하고, 우리 존재의 근원 의식을 생활 속으로 날라다 주었습니다. 작은 물 한 그릇의 영성으로 하는 ‘날마다 제천(祭天)’인 것입니다.
정화수는, 우물 井자와 꽃 華자를 사용합니다. 물은 생명을 상징하므로 정화수는 ‘생명꽃’이 됩니다. 우리 모성들은 저마다 스스로 생명꽃을 피워온 것입니다. 심한 질곡의 역사 속에서도 여전히 세상은 이리 따뜻하고 살아볼만한 곳이 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갈등과 대립과 원망과, 오해와 억측이 더욱 더 쌓이는 시대입니다. 남녀노소 누구나 가져야 할, ‘시대의 모성’이 절절한 시기입니다.
이 뜻은 공연을 통해 나름 상호소통되면서, 지금까지 2만여개의 정화수가 일상으로 분양되었고 풍물굿이 놀 문화지형을 조금씩 형성하고 있다.
21세기 초반 강화도 대안학교 있을 때, 이대 탈춤반 출신 전미숙을 만났다. 그의 남편 서울대 탈춤반 권영덕이도 덩달아 만났다. 70년대 말 이대 탈반은 대단했는데, 구재연, 박찬숙, 전미숙, 김영현 등은 스타 탈꾼이었다. 이대 탈판은 남자들이 교정에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통로여서 감개무량한 상태로 입성해서인지 춤도 무척 잘 추는 것 같았다. 이대 탈판은 항상 구름관중이었다.
친분 있었던 대안학교 학부모, 전교조 교사, 환쟁이, 광대 남편 둔 전업주부, 유치원 원장을 하는 ‘아줌마’들이 풍물을 해보고 싶다해서, 불문곡직 놀고 뽀개는 굿을 만들고 치면서 무척 재미나게 지냈는데, 어찌 알았는지 교동 어디에선가 공연 요청이 들어와서 다들 허둥댄 적이 있었다. 정신 차려 머리 맞대고 단체 이름부터 만들었는데, 근사한 개념들을 다 제치고 ‘풍물패 우리 미숙이’로 정하고 대장기에 새겨넣었다. 대한민국 최초로 대장기에 사람 이름이 들어간 사례이지 싶다. 얼마나 잘 놀았는지 그 때 돈으로 100만원의 굿전이 들어와서 잘 먹고 잘 썼다.
강화도를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전미숙이 암투병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권영덕이 지 마눌 지가 치료한다고 다시 입시공부해서 한의대에 다닌다는 소식도 묻어왔다. 하이고 이 광대들이...하면서도 이 순애보는 짠했다. 결국은 유명을 달리했고, ‘우리 미숙이’도 흐지부지 없어졌다. (5편에서 계속)
글쓴이 김원호 : 홍익대 탈춤반 '눈솟말 재인패', 76학번.
[탈춤과 나] 원고 청탁서
새로운 언론문화를 주도해가는 인터넷 신문 <프레시안>(http://pressian.com)이 <사)민족미학연구소>와 <창작탈춤패 지기금지>와 함께 탈춤에 관한 “이야기마당”(칼럼 연재)을 기획하고 있습니다.
젊은 시절 탈춤이 좋아서, 쏟은 열정이 오롯이 담긴 회고담이거나 증언, 활동일지여도 좋고 아니면 현금 문화현상에 대한 어기찬 비판과 제언 형식의 글이어도 좋습니다.
과거 탈춤반 출신의 세대에게는 아련한 추억을, 신세대들에게는 다소 생소한 전통문화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글 내용이면 충분할 것입니다. 한 때나마 문화패로서 탈꾼으로서 개성넘치는 숨결을 담아내면 참 좋겠지요.
글 말미에는 대학탈춤패 출신임을 밝혀주십시오(대학, 학번, 탈춤반 이름 및 현직)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사진(1-5매)이나 시청각 자료도 곁들여 캡션을 달아 보내주시면, 지난 기억이 되살아나 더욱 생생한 느낌을 전달해줄 것입니다.
알뜰살뜰한 글과 사진제공에 대한 원고사례비는 제공되지 않고, 다만 원고가 묶여져 책으로 발간될 때 책 두 권 발송으로 사례를 대신합니다.
제 목 : [탈춤과 나] (부제로 각자 글 나름의 자의적인 제목을 달아도 좋음)
원고 매수 : 200자 원고지 15-30매(A4 3-5장)
(사진 등 시청각 관련 자료 캡션 달아 첨부하면 더욱 좋음)
보낼 곳 :
(사) 민족미학연구소 (namihak@hanmail.net) 채 희 완 (bullim204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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