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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춤은 당대 감수성 한복판에서, 어떻게 영역을 열어젖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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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탈춤은 당대 감수성 한복판에서, 어떻게 영역을 열어젖혔을까?

[탈춤과 나] 24. 김원호의 탈춤②

3. 필봉굿

임실 필봉굿은 내게는 커다란 인연이었다. 78년에 전북대 탈춤반인 <한마당>이 갓 결성되었고, 그들이 전주대사습놀이에 쓸만한 굿이 나왔다고 연탈(대학탈춤반연합?)로 통해 연락을 주었다. 79년에 홍탈이 창단공연을 농악을 하고나서 그 해 여름에, 전격적으로 필봉으로 전수를 갔다. 전북대 한마당, 홍탈, 서울대 연극반이 필봉굿을 처음 전수 받았다. 아마, 대학가 최초로 현장의 풍물굿을 전수받았을 것이다. 처음 보는 현장의 굿은(전라도에서는 농악/풍물을 대부분 굿이라 칭하였다) 그야말로 신천지였다. 그 굿을 낼 만하게 생긴 사람들이, 그 굿에 딱 맞춤하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이, 그 됨됨이의 연조로 어우르며 굿이라는 것을 명징하게 그대로 드러낸다. 그 때깔로 가락을 내고 춤을 추며 세상의 양택을 구한다. 편한데 푸짐하다. 곧 신명길이 된다.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 같은 처지로, 구성과 연출에 의한 작위, 보여주기 위주 연행의 농악만을 겪어봤던 눈에는 그 자연스러운 깊이를 당최 헤아릴 수가 없었다.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우리는 기본 가락만 익혔음에도 불구하고, 깔아놓고 달아나가고 쑤셔대는 그 기제, 특히 경과구인 ‘갠-지갱은 우리를 늘 주술적 상태로 몰아댔다. 참으로 온 몸이 행복했다.

전수 끝난 다음 날부터 홍탈은 이른바 무림 강호의 비전처럼 회자되는 ’굿문서‘를 찾으러 다녔다. 필봉굿의 양순용 상쇠께서, 우리의 탐구욕을 읽어서인지, 그리고 당신도 이참에 굿의 전모를 새삼 다시 정리하고 싶어서인지, 일정 기간을 동행해주었다. 임실, 순창, 남원 중심으로 굿이 세시로 연행되고 있다는 마을은 죄다 찾아다녔는데, 굿이 많이 남아있었다. 이 때 굿이 무엇인지, 그 원형적 질은 무엇인지, 기층문화로 왜 전승되어왔는지가 가늠되기 시작했다.

굿이 점차 마음으로 들어오며 미술을 접어 말어 하며 방황을 하다가 결국 이즈음 붓을 억지로 꺾어버렸다. 헛헛하기도 해서, 다음 해 아예 필봉 마을로 들어갔다. 마침 대보름 전이라 걸립굿이 벌어졌는데, 난생 처음 겪는 장한 광경에, 헛헛함은 무슨 개뿔! 양순용 상쇠는 근동에서 알아주는 명 상쇠였고, 정월 초이레부터는 근처 마을 뿐 아니라 이웃의 군에까지 걸립굿으로 모셔졌다. 편제도 6쇠 4징 6장 15소고 10허두잽이 3기수로 편성된 대규모인데 규모가 큰 것만 아니라 그 규모의 미학도 좋았다. 나도 소고잽이로 끼어서 실컷 돌아다니며 굿을 익혔다. 이때 풍물굿이 고유의 어법으로 엄격한 절차기제를 통해 사람들과 무언가를 깊이 소통하는지를 헤아릴 수 있었고, 이것을 중심으로 풍물굿에 대한 미학이 본격적으로 싹트기 시작했다. 하루 왼종일 걸리는, 문굿-들당산-마을샘굿-마당밟이-판굿-날당산의 절차과정은 무척 짜임새가 있고 아름다웠다. 그 중 요체는 가가호호 마당밟이였고, 벽사진경과 양택(陽宅. 삶터를 밝게 함)으로서의 의례와 놀이가 며칠간의 신명 상태로 이루어졌다. 대보름 판굿은, 마을 구성원 모두의 양택이 이루어져야 그 대동의 질이 수준 높게 결정된다. 그야말로 며칠을 쳐야 대동굿이 되고 집단신명이 일어나는 것이다. 마을굿과 마당밟이의 정수를 누린 이 시기가, 내가 이런저런 다른 일을 하면서도 풍물굿에서 결국 도망가지 못한 결정적 자양분이 되었다.

당시 필봉마을은 마흔 네가구인데 청년이(2-30대) 근 스무명이나 있었다. 전반적으로 이농이 가속화될 때라 이례적인데, 굿이 재미있어서 어지간하면 안 나간다고 한다. 당시는 좀 웃기는 이야기로 흘려들으면서도, 굿이 무엇을 건드렸을까? 노상 궁금하였다. 이들이 있어서 필봉생활은 무궁무진 재미있었다. 마을회관의 작은 방을 내주어서 그곳에서 기거하며 마을 머슴 노릇(실제로는 논두렁건달)을 하였다. 봄의 나뭇짐, 여름의 모내기와 김매기, 가을 추수 때는 일손이 모자라는데 그 때 ’놉‘을 나가면 점심과 저녁, 두 번의 새참, 그리고 2천원을 주었다. 먹고사는 생활은 되었다. 당시 새마을 담배가 40원, 환회와 개나리가 100원, 최고급 청자가 150원 할 때이다. 새참 때 부리나케 잠시, 일 끝나 밤에 두세두세 모여 하는 담배치기 화투놀이는 청년들의 강장제였다. 굿치는 것과 화투놀이 외 놀 것은 없었지만, ’일과 놀이‘(?)를 하면서 재미나게 지냈다. 농촌 현실이 조금씩 눈에 들어오고, 노동도 하고 굿도 조금씩 익혔다. 그해 오월, 한창 모내기 때 광주항쟁이 일어났다. 그리고 시절은 급히 하 수상해져가고 있었다. 늘 불안했고, 그 와중에도 나는 필봉에서 불안하게 풍물굿을 익히며 살았다.

4 탈춤과 풍물굿

돌이켜보건대 탈춤은, 유신 시대에 역설적으로 맞춤했다. 유신 말기의 탈춤은, 정치적 폭압과 사회적 암울함과 인간 존엄의 말살 등 부조리한 온갖 것을 한 방에 다른 차원으로 녹여내버리기 시작했다. 일찍이 겪어보지 못했던, 뭔가 산다는 재미를 한 차원 높여 넘어서는 장쾌함이 있었다. 그 아우라는 팍팍한 삶에 묘한 활달한 동질성을 사회의 전 부문에 흐르게 했다. 새로이 용솟음치는 문화적 동지감(?)이었다. 모두 나서서 그런 판에 대동되고 싶어 근질근질해지는 문화동질성이 형성되어져 나갔다. 그까짓 정치권력의 문제는 하위범주화시켜버리며, 당대 문화의 정신을 새롭게 재생하기 시작했다고 여겨진다. 집단의 상호소통이라는 것을 처음 겪게 해주었고, 무엇보다 그 몰입도는 내게는 세상 처음 탈아의 지경까지 이르게 했고, 나아가 새로운 정신문화사의 주 흐름을 형성시켜낼 것 같은 원석 덩어리와 조우하는 기쁨을 주었다. 사람 삶의 영역이 확장되는 것 같았다.

탈춤은, 대중들의 당대 감수성 한복판에서 어찌해서 그런 영역을 열어젖혔을까? 현실에 대한 해학과 풍자? 정치적 억압에 대한 카타르시스? 그것만은 아니었다. 탈춤의 이면에 존재론적 깊이가 있었기 때문이라 여겨진다. 해학과 풍자라는 현실 덕목이 전부가 아니라 그 이면에 ‘내 안의 또 다른 나’의 이야기가 이중 교호되었기 때문이다. 존재와 근원에 대한 점검과 성찰도 호출되고 추어졌기 때문이다. 탈춤은 근본적으로 더 나은 삶으로 가려했고, 삶의 존엄성까지 사위를 들어 추려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낭자하게 벌어지는 상호소통은, 나의 안팎을 엮어대며 모든 것을 내외상합시키는 에너지룰 용솟음치게 하였다. 세상살이 이면에 있는, 심층의식, 집단무의식이 길어올려지면서 뭔가 내 삶이 심도 있게 확장되는 기쁨은 상당했다. 해학과 풍자를 통해 정치 영역의 쓰임새로 겉보기 열광했지만, 내 삶이 깊이 확장되는 것 같은 그런 기쁨은 말할 수 없이 컸다.

사람은 유한존재의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현실은 현실존재와 근원존재가 같이 있게 된다. 피팍한 현실 생활 속에서도 끈질기게 호출되는 것은, 나는 어디서 왔지? 나는 누구지? 나는 왜 살지? 나는 죽으면 어디로 가지?라는 근원존재에 대한 물음이다. 근대 문명에서 스스로 퇴행하면서 타히티로 간 고갱은 신인융합의 걸작 'Where Do We Come From? What Are We? Where Are We Going?' 으로 화두를 던졌고, 시인 김광섭은 별을 빌어, 화가 김환기는 무수한 토톨로지의 고행을 통해 ‘우리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랴’라는 존재론적 그리움을 말했다.

불투명하고 불안하지만 느닷없이 저 밑바닥에서 싸하게 오는 한가닥 서정 때문에 우리는 이따금씩 페이소스에 젖는다. 근원 존재에 접속하는 것이다. 더 나은 삶을 살고자 점검하자는 호출이다. 탈판에서도, 겉보기 정치적 폭압에 대한 카타르시스를 갖지만 나아가 그 이면인 근원존재까지 건드리려는 탈의 춤에 많은 이들은 열광적으로 자신을 들여밀 수 밖에 없다. 얼쑤로 터지면서 자신의 존재를 환희하고 성찰하는 열락의 기쁨을 갖고자 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탈을 쓰면 묘하게도 신명이 저절로 났다. 일상의 번잡한 관계 속에 있었던 나를 잊거나 벗어난 차원이 되고, 그 시공간에서 무언가를 말하기 시작하는데, 스스로부터 자연스러웠다. 自然은 말 그대로 ‘스스로 그러함’이고, 본성대로 살자라는 것이다. 세속에서는, 본성은 현실존재와 근원존재가 일여된 것이 아닐까? 그런 본성으로서의 춤, 그런 제의 담당자로서의 깊은 욕구가 솟아나왔다. 탈춤이 탈을 쓴 가장 커다란 이유라 여겨진다.

탈춤은 기본적으로 근원을 호출하는 제의의 놀이이다. 내 안의 신성을 호출하여 또 다른 나와 어울리기 위해 위해 ‘탈’을 썼고, 그런 추상성을 ‘말’하고 싶어 ‘춤’을 택했다고 여겨진다. 현실-비현실, 일상-비일상, 현실-근원의 문제를 말하는데 ‘탈춤’은 무척 근사하게 핏팅된 장르이다. 그래서, 탈춤은 풍자나 해학의 이면을 깊이 사유할 수밖에 없었다. 단지 유신 시절에는, 정치적 폭압을 이겨내려는 혈로를 뚫기 위해 풍자와 해학을 다소 과도하게 내세웠을 뿐이다. 이후 탈춤의 본면목적인 가치를 충분히 숙성시키지 못한 채, 현실 이야기 트루기 중심의 마당‘극’으로 거의 재편되어나간 것은, 지금은 좀 아쉽게 여겨진다. 물론 마당극은 탈춤의 힘을 당대성으로 적극 해석하고 발전시켜 나름의 어법을 가져나간 혁혁한 문화운동이 되었다.

나는 봉산의 대부분 역할을 추었고, 다른 탈춤은 기본무 정도를 놀았는데, 여전히 지금도 목중춤과 노장춤이 좋다. 춤의 추상성으로 주로 말하기 때문이다. 취발이, 양반, 미얄 등은 아무래도 서사적 트루기가 우선되지만 목중과 노장은 그런 드라마틱한 롤플레잉이 우선 되지 않아서이다. 목중은, 불목하니부터 상좌승까지 절집의 여러 급의 수도승들이 나와 각자 나름 속세에서 춤을 추는 이유를 고사를 빌어 화두 같은 이야기를 던져놓고 그것을 갖고 ‘춤’을 춘다. 겉보기에 파계하는 모습이라고 하는데 동의하기 힘들다. 역시 이면이 있다고 여겨지는데. 뒤집어 보면 포교의 춤이다. 한시적 세속이 되어 세속과 적극 어울리자는 것이고, 그런 판에서 불법을 전하자는 것이다. 당연히 멋들어지게 춤을 추어야 그런 상념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춤이 모자라면 세속 입장에서의 단순 풍자로 소통될 뿐이다. 노장춤은 더욱 그러한데, 파계하여 세속의 여자를 취하는 구조로만 보면, 초두에 내놓은 춤의 의미와 그 비장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없다. 고승이 파계한다는 것은, 실재나 본면목에 근접해가고 있는 최고의 덕목을 버린다는 것인데, 속세의 여인 한 사람으로 졸지에 낙마한다는 얘기만으로는 그리 감동적이지 않다. 

당시 최고 권력의 하나를 풍자해서 낙마시키고는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은 물론 겉보기 재미는 있다. 그것을 포함해서 오히려 파계의 의미를 잘 헤아려본다면, 우리도 늘 고단한 삶을 이겨내고 해탈하고 싶지만 고승처럼 고난의 면벽 수련을 지속할 수 없는 세상살이 속에 있다라는 깊은 슬픔을 공감하는 일이 아닐까? 석가를 좇는 것은 현세불이 되자는 것이다. 석가는 어쨌든 지금 사는 생애에서 모두가 해탈하여 부처가 되기를 재촉한다. 세상사람 모두가 생계를 파기하고 석가처럼 보리수나무 아래 앉아있을 수는 없는 일이어서 대다수 민중들은 미륵을 늘 기다리는 편이다. 지금은 고단하지만 미래불인 미륵이 언젠가는 와서 우리를 구원해줄 것이다라는 그런 희망의 실끝을 품은 채 현실의 삶을 버틴다. 그런 현실 속에서 그래도 몇십 년 닦은 고수인 노장을 호출하여 자신의 처지를 대입시킨다. 풍자보다는 스스로에게 하는 해학인 것이다. 본면목 경계에 근접하고 있는 나름 고수를 세속으로 끌어들어 낭자한 웃음 속에서 자신을 성찰한다. 그렇게 해탈의 길굿이라도 어울릴 수 있게 하는 것이 고승 파계의 춤, ‘탈의 춤 노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다시피 원효도 파계했는데, 고승 원효가 저자거리 광대가 되어 무애무(無㝵舞)라는 본면목 경지의 춤을 세상에 날랐다. ‘벼랑 끝에서 추는 끝이 없는 춤’은 원효의 몫이 아니라, 본면목이 하방하여 스스로 성속일여가 되어 사람들을 재촉하고 다독이는 춤인 것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노장춤은 지금 우리 시대에도 당연히 어울리는 아름다움의 춤이라고 생각한다. ‘놓일 자리’를 잘 만들어 지금도 추어야 할.

이 지점에서 탈춤과 풍물굿은 미학적 동질성을 갖는다. 풍물굿의 요체는 성속일여 (聖俗一如) 대동신명(大同神明)이다. 현실에서, 현실 존재와 근원존재를 같이 호출한다. 세상의 시간에 내 안의 신성을 밝게 드러내며 대동한다. 대동은 쪽수의 문제가 아니라 두 가지 한 몸의 존재 양식을 현실 삶에서 일여시키는 것을 뜻한다. 그런 신인융합의 차원으로 풍물굿은 세상살이의 중요한 세시, 존재론적 통과의례를 마련한다.

게다가 마을굿 양식이다. 본성대로 더불어 살자고 하는 공동체의 제의 놀이이다. 절차기제가 엄격하고 밝고 오지게 재미있다. 들당산으로, 겉보기 공동체성을 다지거나 다른 공동체와의 한시적 공동체를 서원하지만, 원래는 근원적으로는 이미 같은 공동체임을 확인하고 서로 그리워했다라는 것을 고백하는 놀이이다. (마을)샘긋으로는 생명찬가를 부른다. 집 돌돌이는 양택(陽宅), 즉 삶터를 밝게 해준다. 자연으로 통하는 나와바리를 제각각 갖고 있는 각 가택신을 통해 뭇생명과 어울려 살아야 한다는 것을 새삼 확인한다. 요즘 말로 생태의 굿이다. 판굿은 그런 기쁨을 축적시켜서 하는 대찬 대동신명이다. 날당산은, 다시 팍팍한 현실로 돌아가지만 세시로서 또 만날 수 있다는 것이 약조되는 별리의 아름다움이다. 그래서 삶과 죽음의 경계와 그 두려움을 이겨낸다.

탈춤운동의 내용과 미학적 가치의 고갱이를 가지고, 80년대의 나는 주로 풍물굿으로 춤 추고 노래하면 ‘민중문화운동’의 흐름 속에 저절로 흘러 들어갔다. (3편에서 계속)

글쓴이 김원호 : 홍익대 탈춤반 '눈솟말 재인패', 76학번.

[탈춤과 나] 원고 청탁서

새로운 언론문화를 주도해가는 인터넷 신문 <프레시안>(http://pressian.com)이 <사)민족미학연구소>와 <창작탈춤패 지기금지>와 함께 탈춤에 관한 “이야기마당”(칼럼 연재)을 기획하고 있습니다.

젊은 시절 탈춤이 좋아서, 쏟은 열정이 오롯이 담긴 회고담이거나 증언, 활동일지여도 좋고 아니면 현금 문화현상에 대한 어기찬 비판과 제언 형식의 글이어도 좋습니다.

과거 탈춤반 출신의 세대에게는 아련한 추억을, 신세대들에게는 다소 생소한 전통문화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글 내용이면 충분할 것입니다. 한 때나마 문화패로서 탈꾼으로서 개성넘치는 숨결을 담아내면 참 좋겠지요.

글 말미에는 대학탈춤패 출신임을 밝혀주십시오(대학, 학번, 탈춤반 이름 및 현직)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사진(1-5매)이나 시청각 자료도 곁들여 캡션을 달아 보내주시면, 지난 기억이 되살아나 더욱 생생한 느낌을 전달해줄 것입니다.

알뜰살뜰한 글과 사진제공에 대한 원고사례비는 제공되지 않고, 다만 원고가 묶여져 책으로 발간될 때 책 두 권 발송으로 사례를 대신합니다.

제 목 : [탈춤과 나] (부제로 각자 글 나름의 자의적인 제목을 달아도 좋음)

원고 매수 : 200자 원고지 15-30매(A4 3-5장)

원고 마감 : 2021년 9월 30일

(사진 등 시청각 관련 자료 캡션 달아 첨부하면 더욱 좋음)

보낼 곳 :

(사) 민족미학연구소 (namihak@hanmail.net) 채 희 완 (bullim204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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