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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속일여(聖俗一如) 대동신명(大同神明)...이 울렁거리는 기운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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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속일여(聖俗一如) 대동신명(大同神明)...이 울렁거리는 기운은?

[탈춤과 나] 24. 김원호의 탈춤①

1. 현대미술과 탈춤

유신 말기 나는 미술학도였다. 당시 학교의 풍인 현대미술을 하였다. 사물의 본질, 존재의 의미를 이리저리 지독하게 실험하고 탐구하는, 그런 전위적 삶이 좋았고, 몰두했다. [달과 6펜스]의 스트릭랜드가 좌충우돌 개진시키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낭만부터 진동하였고, 뒤샹과 마그리뜨 등이 기존 관념을 한 방에 전환시키는 미술적 사유에 감격했고, 그 후 온갖 아티스트의 실험성과 그 원형질적인 거친 삶들을 좇았다.

이 와중에 탈춤이, 미술과는 다른 차원으로 이리저리 접속되기 시작했다. 긴급조치 9호가 옭죄는 암울한 시대의 그 허망한 암울함이, 세상을 잊고 본질 탐구와 양식 실험을 하는 미술학도의 감수성도 그냥 내버려두지 않았다. 당시 대학가에는 탈춤이 노도와 같이 퍼지면서 대학 전체의 몸과 마음이 열병처럼 진동할 때이다.

이게 뭐지? 이 울렁거리는 기운은?

이웃 신촌 서강대 탈춤판에 처음 구경 가서, 넋이 나가버렸다. 난 지 처음으로 군중이 대동되는 것을 보았고, 무언가의 대찬 기운은 나를 뒤흔들었다. 신명과 처음 접속한 것이다. 아, 사변에 길들여진 내 몸이 그 벅찬 대동에 나도 모르게 조응하는, ‘새롭고 낯 익은’ 기쁨이라니!

나의 탈춤은 그렇게 감수되며 시작되었다, 대학 탈춤판에는 죄다 싸돌아 다녔다. 얼쑤를 외치며 몸과 마음이 달아오르는 것이 비장하도록 근질근질 좋았다. 그 대동신명의 기운을 계속 누리고 싶었다. 무엇보다 뭔가 존재 신분이 상승되는 것같은 묘한 기쁨이 제일 뽀대났다.

결국은 탈춤을 추기 시작했다. 김봉준 선배가 중심되어, 시대와 몸이 달싹거리는 이들이 탈춤반을 만들었고, 봉산탈춤을 시작으로, 점차 은율탈춤, 양주별산대, 통영오광대 등을 추었다. 홍탈(홍대 탈춤반)을 시초한 김봉준 선배는 고등학교 선배(아직 위계가 남은 시절)로 다가와서 전위미술을 한다고 하는 나를 다소 윽박지르며 흔들어대더니 결국은 나를 반쯤 미치게 하였다. 그러나, 혼란이었다. 미래 가치를 근본적 예감으로 열어젖히려는 현대미술 입장에서는, 몸은 달뜨지만, 탈춤의 미학적 가치는 아직 시시하고 누추하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몸의 설레임은 이리 장할 수가 없었다. 유신말에 많은 이들이 당대 시대정신으로 좇는 가치와 행동들이 나에게도 조금씩 축적되기 시작했다. 이념이 먼저가 아니었다. 탈춤의 대동 열기로 응축되며 다가와 쌓이기 시작했다. 미술을 해서인지, 사물에 대한 본질적 감수성으로부터 탈춤이 접속되었고, 결국은 ‘온 몸으로’ 확장되기 시작했다.

2. 홍탈

홍탈을 준비하면서 김봉준선배를 많이 따라다녔다. 특히 전라도 농민운동 현장의 동행은 내게는 길굿 자체였고, 그 신명은 미술에서 탈춤으로 조금씩 기우는 계기가 되었다.

1978년 즈음에, 몇 개 대학 탈춤반 출신 선배들이 연대하여 창작탈춤을 만들어 전국 순회 공연한 흔적을 따라 다녔다. 대학가의 탈춤을 넘어서 이른바 기층민중의 현장 활동을 시작하는 중요한 계기였다고 생각하는데, 그 현장을 봉준형 따라서 몇 군데 좇아다녔다. 당시 “현장 속으로”라는 기치 하에 대규모로 벌어졌던 농활 지역과 가톨릭농민회의 투쟁 현장에서 판이 벌어졌다. 아직 낯선 창작탈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이야기를 춤 추고 말하는 이 울컥한 재미에 농민들은 달라들어 대차게 같이 놀았다고 기억된다. 나는 처음으로 농촌-농업-농민의 문제를 느끼기 시작했는데, 뭔가 기뻤다. 당시 사회 모순을 총체적으로 들여다 볼 순 없었지만, 이런 일은 무척 근사하게 여겨졌다. 무엇보다 대학탈춤판과는 또 다른, 사회 모순이 현실로서 담지되고 있는 삶의 현장에서에서 만들어지는 신명이라는 구체적 활기였다. 그것을 처음으로 느끼는 것부터 멋졌고, 나아가 나도 뭔가 대단한 일에 꼽사리낀 것 같은 비장함까지 들었다. 무엇보다, 농민과 대학생과 광대들의 육성이 버무려져 내뿜는 그 열기, 그것으로 대동되는 기운이 낭자한 그 시공간을 겪는 즐거움은 나에게는 대단했다. 나도 모르게 달싹거려지는 내 몸과 마음이 이리저리 뒤섞이며 통섭되는, 처음 겪는 혼몽의 경지라니! 대중과 무관하다시피한 엘리트 미술에 천착해왔던 내 의식이, 나아가 삶의 방식이 나도 모르게, 내 심층의식에서 조금씩 성찰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여겨진다.

홍탈은 탈춤을 추었지만, 1979년 창립공연은 ‘농악’이었다. 당시 고대농악대는 고연전 응원의 주축 행사를 이끌고 있었기 때문에 학내에서 합법적인 활동을 하였는데, 이들이 우리를 가르쳐주었다. 덩달아 우리도 겉보기 합법 활동이 되었고 지도교수 문제도 해결되었다. 당시 학내에는 이른바 ‘짭새’둘이 사무실까지 차려놓고 상주해 있었고, 탈춤반은 특히 요주의 대상이었다. 대학가 탈춤 공연은 대부분 시위로 연결되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정치적 구호를 앞세운 일반 시위가 아니라 이리저리 억압에 꽉 눌려있던 감수성부터 터지는, 대동신명으로 고양된 시위라 그 엄청난 열기의 파괴력은 대단했고, 그것을 당국은 두려워했다.

좀 웃겼던 일은, 학교나 짭새나 당시 우리 공연을 막지 않았는데, 탈춤반이 그들에게 아직은 생경한 농악을 공연한다니까 판단이 잘 서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심지어 우리 공연에 대학 총장까지 오셔서 축사를 해주는 일이 벌어져서 우리가 좀 당황했던 기억이 있다. 그러나 머지 않아, 봉준형과 내가 공대 옥상과 본관 타워 건물 꼭대기에서 유인물을 뿌리면서 곧 불온 써클로 정착되었다.

▲창단 공연 끝내고 교정에서 뒤풀이해버렸다. 경찰들은 긴조 9호 집회금지로 강제해산시키고 싶었지만 총장까지 축사한 마당에 속으로만 끙끙 앓았고 우리는 보란 듯이 학내에 막걸리까지 풀어놓고 실컷 놀았다. ⓒ김원호

탈춤(부흥)운동은 이 시기쯤부터 풍물, 민요, 민화 등 민속문화 전반을 조금씩 재생시켜내고 있었고, 당대 이야기를 해야 한다면서 탈굿과 마당극 등도 시작되었고, 노래운동도 출발되었다 주지하다시피, 이는 80년대 민중문화운동으로 발전되는 기반이 된다.

당시 대학 탈춤반에서는 뒷풀이용 풍물 정도를 치기는 했지만, 풍물을 판굿 정도라도 다루는 학교는 많지 않았다. 고대 농악대, 서울농대 농악대, 전남대 농악대 정도였고, 80년대에 들어서야 급격히 확장되기 시작한다. 나는 탈춤보다는 이거다 싶을 정도로 풍물에 맞춤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롤플레잉은 무척 서툴고, 썩 내켜하지 않는다. 그래서 당시 탈춤판의 발전적 양식인 마당극은 나에게는 좀 어려웠다. 춤은 좋았지만, 트라마 트루기를 통해 내가 지금의 레알 현실이 아닌, 어떤 설정된 시공간에서 어떤 다른 사람의 역할을 한다는 것이 무척 쑥스러웠다. 풍물은 지금의 현실 시간에서 그 현실과 접속하는 양식으로 말을 하고 신명을 만들어낸다. 지금의 사람들이 지금의 시간에서, 지금의 감수성과 본 모습대로 직접적으로 교호해낸다는 일이 무척 좋았다. 반경 10m 내에서, 지금 시간에 살아있는 현실 대중과 눈을 맞추고 더불어 썩썩 숨쉬며 심장 박동을 느끼는 교호가 좋았다. 그런 팽팽한 즉흥적 긴장 속에서, 무언가를 주고 받으며 직조해내는, 저 심층 기저에서부터 올라오는 상호소통의 리얼리티가 좋았다. 미술에서 추구하고자 했던, 존재의 근원을 극단적으로 파헤치는 고행으로서가 아니라, 그저 내 온 몸이 동하면서 그리로 접속하는 일이 무척 편했다. 그리고, 살 만 했다.

에피소드 하나. 4학년 때 나는 동아리방에 ‘일하고 춤추고 사랑한다 말하며’라는 문구를 써서 붙여 놓았다. 홍탈이 추구하고자 했던 내심을 선배로서 드러냈는데, 당시 기층(문화)운동이 전개되면서 ‘일과 놀이’라는 개념이 무척 다가왔기 때문이다. 다소 낭만적인 생각이었지만, 세상은 그렇게 진화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그런데, 81년에 복학하고 동아리방에 가보았더니, ‘냉정하고 저돌적인 떨패가 되자’라는 헤드카피가 대신 붙어있었다. 홍탈 탈꾼 중에서 80년에 총학생회장이 된 후배가 붙여 놓았는데, 당시 광주항쟁 직후이고 전두환 정권이 쌩쌩할 때라 다들 비분강개와 사명감의 분위기로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이후 홍탈은 대학 탈춤반답게 80년대 민주화운동에 적극 놓이게 된다.

에피소드 둘. 전두환 신군부의 이른바 ‘쓰리 허’ 중에 허문도가 정권의 민족적 정통성을 얻기 위해 ‘國風81’이라는 대규모 관제 행사를 여의도에 만들었다. 당시 탈춤부흥운동을 주도했던 선배들(채희완, 임진택, 김민기, 이애주 등)을 포섭하려 했는데 거절당했고, 대학탈춤연합에는 학교마다 거액의 출연비까지 제안했는데, 이도 한방에 보기 좋게 거절을 해버렸다. 민속문화 축전을 통한 민족적 정통성을 확보하려던 의도는 날라가버렸고 대중가요제 중심으로 바뀌면서 아다시피 단순한 축제로 귀결되었다.

당시 여의도광장 한 편 20층 정도의 건물 전면에 말뚝이를 형상화한 대규모 걸개그림이 걸려있었다. 

홍탈 후배들과 시장바닥에서 막걸리놀이 하던 중, 갑자기 전야제 때 불태워버리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바로 다음 날 저녁 석유 한 말(신나가 아닌!)을 샀다. 몇 개의 막걸리병에 나누어 배낭에 넣고 무작정 여의도로 갔다. 걸리면 나 혼자 빵에 가면 되지 뭐, 하며 후배들과 말 맞추고 혼자 갔다. 근데 웬 일? 그 건물은 신축 중이었고 국풍 걸개는 건물에서 2m 간격으로 있는 ‘아시바’에 걸려있었고, 3층 높이부터 시작되었다. 난망했다. 간신히 기어올라 아시바에 걸쳐서 석유를 뿌렸지만 아무리 해도 라이터 하나로는 불이 붙여지지 않았다. 낑낑대다 결국 포기하고 내려오면서, 이대로 돌아가면 후배들한테 얼마나 쪽팔릴까하는 기분만 들어서 비참했다. 부미방처럼 조직적이고 사전답사까지 해야하는 치밀한 계획이어야 한다는 것은 그때는 전혀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탈꾼이었다. 막걸리 한잔의 낭만적 의분을 마지막으로 학창시절은 끝나고 더 큰 살벌한 사회로 나오게 되었다.(2편에서 계속)

▲국풍 걸개그림 ⓒ김원호

글쓴이 김원호 : 홍익대 탈춤반 '눈솟말 재인패', 76학번.

[탈춤과 나] 원고 청탁서

새로운 언론문화를 주도해가는 인터넷 신문 <프레시안>(http://pressian.com)이 <사)민족미학연구소>와 <창작탈춤패 지기금지>와 함께 탈춤에 관한 “이야기마당”(칼럼 연재)을 기획하고 있습니다.

젊은 시절 탈춤이 좋아서, 쏟은 열정이 오롯이 담긴 회고담이거나 증언, 활동일지여도 좋고 아니면 현금 문화현상에 대한 어기찬 비판과 제언 형식의 글이어도 좋습니다.

과거 탈춤반 출신의 세대에게는 아련한 추억을, 신세대들에게는 다소 생소한 전통문화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글 내용이면 충분할 것입니다. 한 때나마 문화패로서 탈꾼으로서 개성넘치는 숨결을 담아내면 참 좋겠지요.

글 말미에는 대학탈춤패 출신임을 밝혀주십시오(대학, 학번, 탈춤반 이름 및 현직)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사진(1-5매)이나 시청각 자료도 곁들여 캡션을 달아 보내주시면, 지난 기억이 되살아나 더욱 생생한 느낌을 전달해줄 것입니다.

알뜰살뜰한 글과 사진제공에 대한 원고사례비는 제공되지 않고, 다만 원고가 묶여져 책으로 발간될 때 책 두 권 발송으로 사례를 대신합니다.

제 목 : [탈춤과 나] (부제로 각자 글 나름의 자의적인 제목을 달아도 좋음)

원고 매수 : 200자 원고지 15-30매(A4 3-5장)

원고 마감 : 2021년 9월 30일

(사진 등 시청각 관련 자료 캡션 달아 첨부하면 더욱 좋음)

보낼 곳 :

(사) 민족미학연구소 (namihak@hanmail.net) 채 희 완 (bullim204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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