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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발 '국민통합'을 말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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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발 '국민통합'을 말하지 말라

[김종구의 새벽에 문득]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2019년에 발간한 '사회통합 실태 진단 및 대응 방안 연구' 보고서를 보면, 국민이 인식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사회통합 정도는 10점 만점에 4.17점에 불과하다. 2016년 4.18점에서 2017년에 잠깐 4.50점으로 올라갔으나 2018년에 4.17점으로 다시 떨어진 뒤 계속 그 수준을 맴돌고 있다. 촛불혁명의 영향으로 반짝 상승이 있었으나 그 뒤 사회 갈등이 더 심각해졌음을 보여준다.

한국 사회는 지금 온갖 갈등의 화염이 들끓고 있는 무간지옥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념갈등, 노사갈등, 빈부갈등 등 고전적인 갈등에다 정규직-비정규직의 갈등, 세대갈등, 젠더갈등, 세대 안의 불평등 갈등 등 갈등의 종류도 훨씬 늘어나고 심각해졌다. 갈등은 우리 사회의 통합을 저해하는 원인이자 그 결과로 작용해 점점 더 사회를 깊은 나락으로 빠트리고 있다.

갈등관리에 일차적 책임을 지고 있는 정부의 사회통합 노력과 성과는 매우 실망스러운 수준이다. 이 정부는 '포용적 복지국가'를 국정 비전으로 제시하며 사회통합 강화와 사회혁신 능력 배양 등을 강조했으나 결과는 참담하다. 이런 사정을 겨냥해 야권 후보들은 국민통합을 앞다투어 강조하고 있다. 윤석열 전 검찰총장은 고 김대중 전 대통령 12주기인 18일 국립 서울현충원의 김 전 대통령 묘역을 참배한 뒤 "김대중 정신은 한마디로 국민통합 정신이다. 그 정신으로 이 위기를 극복해야 한다"고 말했다. 지난 4일 최재형 전 감사원장의 대선 출마 선언 키워드 역시 '국민통합과 미래희망'이었다. 그는 "지금 우리나라는 거의 내전적 분열 상태에 있다"며 "국민통합을 이뤄서 나라를 다시 세울 수 있는 강점 있는 후보"가 자신이라고 주장했다.

이들이 자신을 국민통합 달성의 적임자라고 주장하는 것은 자유다. 그러나 어떤 면에서 통합의 적임자인지는 알 길이 없다. 통합의 첫걸음은 상대방에 대한 최소한의 인정에서 출발한다. 본디 정치라는 것이 적과 아군의 구별 짓기라고 하지만, 윤, 최 두 사람의 정치적 존립 근거는 오직 현 정권에 대한 반대뿐이다. 그들이 굳이 통합을 했다고 한다면 그것은 '긍정의 통합'이 아니라 '부정의 통합'이다. 상대 진영에 대한 적대적 정체성을 형성해 지지 세력을 묶어내는 데는 성공했을지 몰라도 대한민국 공동체 안의 '우리'라는 정서적 일체감을 일깨우고 아우르는 긍정적, 미래지향적 통합은 아니다.

윤 전 총장은 갈등의 실체적 현장이었던 '서초동 집회'와 '광화문 집회'의 한쪽 당사자다. 이 둘 사이의 아득한 간격을 메워나가는 게 통합과 화합일 터인데 '갈등 유발자'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서초동에 울려 퍼졌던 검찰권의 과도한 행사 등에 대한 규탄의 목소리를 진지하게 성찰하고 수용하려는 마음도 없이 어찌 이 험난한 갈등의 해협을 건너 화합의 땅에 안착할 수 있겠는가. 불가하다!

갈등관리와 통합을 위한 국가지도자의 역량은 매우 중요하다. 정치적 관용의 정신에 입각해 서로 생각이 다른 집단·세력 간의 소통을 촉진하고, 갈등 사안에 대한 조정과 중재, 정치적 타협과 설득 능력을 발휘해야 한다. 과연 윤 전 총장과 최 전 원장은 이런 역량과 자질이 있을까. 그들이 살아온 이력을 보면 관용, 조정, 타협, 설득 등의 단어와는 동떨어진 세상에서 살아온 사람들이다. 온통 호령하고 단죄하고 처벌하는 데만 능한 전문가다.

편협한 '이분법적 사고'는 통합의 최대의 적이다. 갈등에 대한 단선적이고 분절적인 접근은 통합이 자라날 공간을 황폐화시키고 질식시킨다. '주 120시간 노동' 발언 등 자본과 사용자의 이해만 중시하는 인식의 편협성으로 통합이 과연 이뤄질 것인가. "노조가 법 위에 군림하는 관행을 뿌리 뽑겠다" "최저임금 인상은 범죄와 다름없다"는 따위의 무지막지함으로 산업 평화가 도래할까. 기대난망이다.

최재형 전 원장이 명절 때 온가족이 애국가를 4절까지 부른다며 자랑한 것도 유의해 볼 대목이다. 그 뉴스를 듣고 머리에 떠오른 것은 가부장적 질서 등의 단어가 아니라 그 옛날 극장에서 듣던 애국가였다. 장엄하게 울려 퍼지는 애국가를 차렷 자세로 경청한 뒤 곧바로 포복절도 코미디 영화나 짙은 러브신의 애정 영화를 감상하는 것은 얼마나 우스꽝스럽고 그로테스크한가. 최 원장한테는 매우 미안하지만 소설 <강안남자>의 주인공이 '중요한 순간'에 애국가를 부르는 장면마저 불경스럽게 떠올랐다. 그의 우스꽝스럽고도 기묘한 애국가 행사를 지금이야 그냥 웃어넘길 수 있지만, 국가 최고지도자의 '컬트적 애국심'은 자칫 국가경영에 섬뜩한 위험 요인이 될 수 있다.

윤 전 총장이 '김대중 정신'을 거론한 것도 호남 유권자들의 마음을 사기 위한 '구애용 멘트'란 느낌만 들 뿐 통합을 향한 진정성은 전해지지 않는다. 그가 살아온 삶에서 고 김대중 대통령의 삶과 오버랩되는 부분이 하나도 없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이미 자신의 본심을 너무 노출했다. "(대구에 오니) 고향에 온 것 같은 느낌이다", "코로나 초기 확산이 대구가 아니었으면 민란이 일어났을 것이다." 특정 지역의 표심 공략을 위해 지역을 가르고 편을 나누는 발언을 서슴지 않는 행태가 어떻게 지역통합, 국민통합과 양립할 수 있는가.

국민통합이라는 말은 아름다운 단어다. 그러나 언어는 사용자가 누구이고 어떤 맥락에서 나온 것인지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지금 정치권을 떠도는 통합이라는 말은 순결함을 잃은 언어, 독을 품고 있는 언어다. 국민화합을 향한 간곡한 염원의 발로가 아니라 상대 진영 공격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한 언어다. "편가르기 정치"를 비판하면서 또다른 '편가르기 정치'를 하는 무기다. 두 대선 예비주자께 간곡히 당부한다. 다른 말은 몰라도 국민통합이라는 말은 제발 하지 말아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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