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학교 외교학과 1학년 때인 1971년 겨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뒷골목을 걷고 있던 중에 한 건물에서 장구소리가 나기에 그 소리를 따라갔다. 문 앞에 <봉산탈춤 강습회>라고 써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무료”라고도 써 있었나? 방을 채운 많은 여성들이 양손에는 한삼을 들고 내보기엔 매우 이상한 동작들을 하고 있었고 웬 나이 지긋한 할아버지가 그 사이를 열심히 지나다니며 팔의 높이나 고개를 흔드는 방법 등을 가르쳐주고 계셨다. 그 분이 바로 인간문화재 이근성 선생님이었고 봉산 기본을 추던 시범 조교는 손진책 (후일 극단 미추 단장) 군이었다. 그날이 인간문화재를 눈 앞에서 처음 본 날이었으며 봉산탈춤과 인연이 시작된 날이다.
1971년의 교양과정부를 마치고 1972년 3월부터 동숭동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에서의 외교학과 강의가 시작될 즈음 문리대에 탈춤반이 있다는 말을 들었고 바로 찾아가서 만난 것이 채희완 형. 생긴 것이 딱 노장이었는데 실제로 그는 공연에서 매번 노장역을 맡았다. 70학번 진홍순형과 윤대인형, 성주, 그리고 나와 같은 71학번 장만철이도 법대 한 구석에 있던 창고형 연습장에 들러 각자의 폼으로 춤을 보여주곤 했다. 흥미 있는 점은 그들이 모두 문리대의 인문학부 학생들로서 각각 미학, 동양사학, 중어중문학, 고고인류학 전공자인데 반하여 나는 사회과학인 외교학 전공이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현상은 다른 대학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전공의 차이는 춤을 대하는 자세에 있어 남들은 잘 모르는 차이를 보이게 된다. 아무튼 채희완이라는 존재는 70년대 초반 한국 대학가에서 들불같이 일어났던 탈춤 운동에 있어서 인간문화재 같은 것이었다.
연습생 시절이었던 1972년 봄, 수업 시간을 제외한 나머지는 연습장인 탈반에 가서 살았다고 과언이 아니다. 회완이 형의 시범을 따라 추고 또 추고 그러다가 쉬고 점심때가 되면 짜장면 먹고 와서 또 춤추고,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냈다. 가끔 오시는 인간문화재 선생님들과 같이 오시는 전수자들이 보여주는 시범이나 한마디 말은 가뭄에 단비였고 우리는 그렇게 탈꾼이 되어 갔다.
나로서는 그 봄에 연세대에서 열린 5개대학 (고대, 연세대, 이대, 숙대의 정치외교학과, 그리고 서울대 정치학과와 외교학과) 정외과 채육대회 뒤풀이 장기자랑 때 서울대 대표로 지목되어 봉산탈춤 기본 한마당을 춘 것이 대중 앞에서 춤을 춘 첫 경험이었다. 당시 유행하던 아래위 교련복 차림에 봉산탈춤이라, 그 장면의 사진이 없는 것이 정말 아쉽다. 노래도 하나 하라고 하기에 <선구자>를 불렀더니 모든 학생들이 따라 불렀다. 이게 무슨 조합이었던가?
1972년 5월말 이대 축전에 초청받아 첫 무대에 나갔다. 내 배역은 이(2)목. 첫목은 누워서 춤을 추는 말 못하는 탈이었는데 2목은 미친 듯이 무대로 튀어나가 “어이쉬 어이쉬 쉬이”하여 객석을 조용하게 만들어 놓은 다음 관중들은 잘 알아듣기 힘든 대사를 쏟아내고 현란한 춤사위로 무대를 휘젓고 다닌다. 이어 삼목에 의해 쫒겨나갔다가 맨 나중에 팔목춤에서 내가 좋아하는 연풍대로 끝나면 나의 역은 끝나는 것이다. 나를 보는 아니 내 가면을 바라보는 그 많은 눈들을 그리고 무대에서 퇴장할 때 우뢰와 같이 터져 나왔었다고 나는 생각하는 박수소리를 나는 평생 잊지 못한다.
봉산탈춤의 진수는 가면 속에서 어떻게 하면 대사 전달을 제대로 하느냐와 얼마나 기운차게 뛰면서 춤을 추는가 그리고 종이로 만든 가면이 마치 살아있는 귀신처럼 표정을 살리는 것인데 이것을 위해 항상 고민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첫 공연 이후 나는 앞으로 춤은 봉산탈춤 하나만 추겠다는 결심을 굳히게 된다. 봉산도 제대로 못 추면서 무슨 다른 탈춤을 추겠다고? 실제로 인간문화재 선생님들은 평생 그 춤 하나를 추신 분들인데 나는 이 나이에 시작해서 앞으로 얼마나 오랫동안 춤을 추겠다고 다른 춤을 넘볼 것이냐는 생각이 들었다. 대학가 탈춤의 초창기인지라 인간문화재 선생님들로부터 직접 배운 소중한 자산을 나 혼자라도 끝까지 지키고 싶기도 했다. 이근성, 김선봉, 양소운, 윤옥, 김기수 선생님으로부터 직접 사사를 받았다는 영광을 어찌 잊겠는가? 낙산에 있던 정병욱 교수님 댁에 놀러갔을 때 집을 꽉 채운 책들을 보고 놀았고 공연장에 녹음기를 들고 나타나시는 이두현 교수님의 언제나 엄숙하신 표정, 그리고 여자 춤을 가르쳐준 애주 형 또한 잊지 못한다. 나는 언젠가는 김선봉 선생님이 추시는 춤을 배워서 소무역을 해보고 싶었다. 본래 탈춤은 남자들이 추는 것이었으니 그렇게 해보고 싶었고 공연이 끝나고 마지막에 가면을 벗었을 때 늙은 할아버지가 소무였었다는 반전을 관중들에게 선물하고 싶었다. 대전고 선배이신 김기수 선생님께서는 후배에게 특별히 많이 관심을 가져 주셨는데 내가 귀국 후 성동구민회관에서 있었던 봉산탈춤 공연 전과정을 사진 찍어 달라는 부탁을 하셔서 CD로 만들어 드린 일도 있다.
대학가에서의 탈춤이라는 것이 동아리 활동이고 매년 레퍼토리를 바꾸게 되는 것은 당연하기도 하지만 나 개인으로서는 한번 몸에 익힌 봉산탈춤 동작만을 하고 싶었다. 일단 서울대에서 탈춤이 시작되자 다른 여러 학교에서 탈춤반이 생겼고 그러면 처음을 봉산탈춤으로 시작을 하게 되는데 그들을 가르칠 일이 나에게 맡겨지는 경우가 늘어갔다. 마치 봉산탈춤 전담 조교처럼. 뿐만 아니라 인간문화재 선생님들이 출연하시는 모든 공연을 쫓아다니게 되니 출연할 사람이 부족하면 그 자리를 채우게 되기도 하고 충무로에 있는 <한국의 집>에서의 수차례의 공연과 MBC TV 출연 등 여러 기회에 선생님들 틈에 끼어 공연을 하기도 했다. 나는 탈춤이 알바였다. 거기에는 밥이 있고 출연료도 있고 또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있다는 자긍심도 있었다.
한번은 KIST인가에 갔을 때 공연이 끝나고 리셉션을 하는 자리에서 거기 대학원에 다니던 서울 문리대 출신 하나가 내 얼굴을 알아보고는 내가 탈춤으로 전공을 바꾼 줄로 알고 놀랐던 일도 있다. 이 시절 나의 대학 생활은 짬만 나면 춤 연습을 하는 것과 국립극장 등으로 다양한 민속 공연을 쫓아다니는 것, 그리고 다른 대학의 탈반들에게 봉산탈춤을 가르치러 다니느라 바빴다. 그때 만난 서울사대의 홍혜례 씨는 나의 가장 가까운 외교학과 선배와 결혼하여 내가 형수님으로 모시게 되었고 혁조는 수도공고에서 교편을 잡은 이후에도 계속 봉산에 몸을 담았다. 그 많던 대학생들 가운데 혁조 하나 건진 셈인데 그동안 봉산탈춤보존회가 어떻게 나눠졌고 어떻게 해왔는가를 생생히 기억하고 있는 소중한 인물이다. 그동안 어떻게 했기에 대학가 탈춤이 전멸했느냐고 면전에서 욕을 퍼부었던 것에 대해 사과한다. 그게 어디 혁조 탓이겠는가?
2학년초에 처음으로 양주군 주내면에 있는 양주별산대에 들어가 거기 계신 선생님들과 어린 전수자들을 만난 이후에는 일요일마다 방학마다 아예 양주에 들어가서 살았다. 공연도 보고 화관에서 하는 여러 대학생들의 연습을 지켜본 다음에는 스스로 야학 선생이 되었다. 상근이네 사랑채 다음에는 종관이네 문간방에 머물면서 저녁에는 어린 전수자들에게 영어와 한문을 가르쳤다. 이들이 해외공연을 나갈 경우 인사말은 할 수 있어야 하고 양주별산대에서 자기들이 말하는 대사의 의미를 정확하게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수업이 끝나면 막거리 술판이 벌어지고 노래가 이어진다. 다들 춤추고 노래하는 이들인지라 노래 솜씨들이 보통이 아닌 데다가 젓가락 장단에 맞추어 부르는 흘러간 옛 노래는 온 동네를 밤늦도록 시끄럽게 했을 것이다. 아침이 되면 억지로 깨워서 구보. 춤을 잘 추려면 건강이 중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인데 나는 태권도복에 검은띠를 메고 구보 인솔을 하고 아이들은 “하나, 둘, 셋 넷”을 우렁차게 외치면서 잘도 뛰었다. 내가 잘하지 못하는 수학을 담당했던 선생님들은 저녁에 와서 가르치고 늦게 버스로 서울로 돌아가곤 했는데 정말로 고마운 탈춤 후배들이었다.
4학년때 우연히 서울 YMCA 간사님과 얘기를 나누다가 고등학교 학생들에게 탈춤을 가르쳐주면 어떠하겠느냐는 얘기가 나왔고 나는 그 프로그램을 <금요탈판>이라 명명하고 주로 동덕여고 학생들을 대상으로 봉산탈춤을 가르쳤다. 사대이 기환이가 큰 도움을 주었는데 한번 공연을 하고 싶다는 여러분들의 요청이 있어서 공연을 기획하게 되었는데 1920~30년대인가 공연 장면을 담은 필름을 상영하였는데 이것이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영상이라고 했다. 공연하는 날에는 여러 인간문화재 선생님들과 전수자분들이 와 주셨다. 주로 대학생들의 공연을 봐왔던 나로서는 고등학생들의 열정과 노력에 깊은 감명을 받았는데 보다 젊은 층으로도 탈춤을 보급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런가 하면 명동에 있는 서울 YWCA에서 창주형이 아주머니들을 대상으로 봉산탈춤을 강습하고 있는 걸 구경갔다가 시범을 한번 보이라고 해서 춘 적이 있는데 이 또한 나이가 좀 있으신 분들에게는 봉산탈춤이 다이어트에도 좋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대학생으로서의 마지막 춤은 외교학과 71학번들의 졸업 파티에서 추었다. 외교학과 교수님들이 보시기에 국제정치학을 전공하는 학생이 뚱딴지같이 봉산탈춤을 춘다는 것을 의아해하셨지만 동주 이용희 교수님께서는 아무 흐뭇한 표정이셨다. 그도 그럴 것이 교수님 자신이 우리나라 국제정치학의 태두이신 동시에 <한국회화> 분야의 최고 권위자였기 때문이셨는지라 나를 이쁘게 보셨으리라. 실제로 이용희 교수님은 대학교에서는 나의 롤모델로, 통일원에서는 장관님으로, 그리고 세종연구소에서는 소장님으로 모시는 별난 인연을 맺게 된다. 우리 동기들은 내가 탈춤에 미쳐서 자기들과 어울려 노는 시간이 적었고 정기공연때는 문리대 마당에서 밤중에 횃불을 켜 놓고 춤추는 것을 보기도 했지만 그들이 고시공부하고 있는 동안 나는 도대체 무엇을 했는지, 또 내가 졸업후에 어떤 방향으로 나갈지를 행동으로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다. 그 때 추었던 춤이 첫목. 대리석 바닥에 누워서 춤을 추느라 등이 시리기는 했지만 나는 마음껏 한삼을 뿌리고 천장이 무너져라 뛰어올랐다. 앞으로 외교 중에서도 문화외교를 맡아서 하겠다고 속으로 외치면서 말이다.
1975년부터 1977년까지 동해안 제1해안전투단에서 해안소대장을 하는 동안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된다. 강릉에 있는 관노가면극과의 만남이 바로 그것이다. 1년에 한번인가 정기공연을 하는데 그 춤은 강릉여고 학생들이 추는 것을 알았고 몇 차례 학교로 찾아가서 연습 장면을 지켜보기도 했다. 단오제 기간 중에 강릉을 찾아오신 임석재 교수님 앞에 나타난 전투복 차림의 소대장이 서울 문리대에서 봉산탈춤을 췄다는 사실이 신기하기도 했을 것이다. 아무튼 강릉여고 무용선생님께는 미리 부탁을 들여놓았다. 내가 전역하고 서울에 가서 학생들을 데려 올 터이니 춤을 좀 가르쳐 달라고 말이다. 나는 그 말을 숙대 탈춤반에 전했고 병숙이와 그 일행은 바로 강릉행 버스를 탔다. 얼마 동안 강릉에 살면서 춤을 배운 숙대생들은 그 가을에 관노가면극을 공연했는데 이는 관노가면극이 태백산맥을 처음으로 넘은 것이라고 한다. 강릉여고 학생들이 연습 장면을 각 과장마다 장면마다 사진으로 찍어 만든 소중한 자료를 숙대생들에게 빌려주었는데 돌려받지 못했다.
2년 간의 소대장 복무를 마치고 전역을 한 다음에 다시 찾아간 곳은 역시 양주별산대. 전수회관 가까이에서 살면서 춤추는 인생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려고 한 것이었다. 대학생 때와 다른 점은 이제는 상근이네와 종관이네 문간방에서 문전걸식형으로 야학을 하며 지내는 것이 아니라 동네에서 가게를 하던 성화네 집에 방을 얻어 놓고 전수회관에 가서 장구도 쳐주고 유학 준비도 하고 서울에 와서 탈춤 공연을 보러 가곤 했다. 바로 이 시기에 국립영화제작소에서는 <봉산탈춤> 영화를 제작하고 있었는데 평소에는 굳게 문이 닫혀 있던 비원 깊은 곳의 넓은 풀밭에서 선생님들이 춤추는 것을 바로 옆에서 보는 특권을 누렸고 용인민속촌에서 밤새워 촬영하던 날은 거기 사는 분들이 어떻게 구경꾼으로 영화에 나오는지도 보았고 가면을 불에 태우는 놀라운 장면도 보고 있었는데 나보고도 한 장면에 나가라고 하시는 바람에 의상을 챙겨 입고 내가 나갈 순서를 기다리는 돌발상황이 벌어지고 말았다.
그러는 동안 문화외교 분야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려면 본격적으로 춤도 최고로 잘 추고 새로운 탈춤 대본도 써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1978년 당시의 드라마센터(현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에 입학 시험을 쳐서 들어갔다. 탈춤을 하려면 전통적인 춤을 이어 나가는 것과 아울러 창작 탈춤을 만들어야 할 것인데 이 때 필요한 탈춤대본을 쓰기 위해서는 전문적인 글쓰기 훈련이 필요하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었다. 문예창작과에 계셨던 최인훈 교수님과 김병익 교수님의 응원 그리고 총무과에 계시던 운용이형의 든든한 지지에 힘입어 나의 문학 수업은 신나게 나갔다. 나이가 좀 차이가 있는 문학 전공인 종우와 명행이 등 나의 문창과 동기들은 지금까지도 나에게 전폭적인 애정을 보내주고 있다.
앞에서 말한 1977년 가을에 찍은 영화를 내가 만난 것은 미국 유학 시절이었다. 워싱턴에 있는 주미 한국대사관에 놀러갔다가 <봉산탈춤>이라는 커다란 릴에 담긴 필름을 발견했는데 혹시,나 그게 아닌가하는 느낌이 들기에 영화를 집으로 빌려오고 학교도서관에서 영사기를 빌려서 우리 아파트에 주변에 살던 유학생 가족들을 초청하여 영화 감상회를 했는데 내가 등장했던 장면이 나오는 것이 아닌가? 다행인 것은 출연자 모두 가면을 썼기 때문에 어느 것이 나인지를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고 나만 알아볼 수 있었는데 맨 마지막 장면에 가서 출연자 모두가 탈을 위로 벗는 순간 내 얼굴이 드러나는 순간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더 놀라운 일은 1982년 여름에 있어났다. 바로 양주가 아닌 워싱턴에서 양주산대를 만난 것이었다. 1982년은 한미수교 100주년이 되는 해로서 미국 정부는 해외에서 한 나라와 50개 주의 한 주에서 한 팀, 이렇게 두 팀이 워싱턴 기념탑과 의사당 사이에 있는 National Mall이라는 거대한 잔디밭에서 한달 이상 축전을 벌이는데 이때 한국에서는 양주별산대가 초청되어 온 것이다. 나는 주말마다 아들을 데리고 아내와 함께 공연을 보러 가서 하루를 보냈고 한 공연이 끝나 누구든지 무대로 나와서 자유롭게 춤을 춰도 좋다는 사회자의 말이 나오면 남들이 주저주저하고 있을 때 노련하게 깨끼춤을 추면서 나가 분위기를 띄웠고 그러느라 일부러 하얀 고무신을 신고 갔다. 한국음식이 그리워진 그분들을 좁지만 학생 아파트인 우리 집으로 초청하여 집밥도 대접하고 양주도 마시며 미국 여행이나 공연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등 즐거운 시간을 갖는 행운을 누렸다. 내가 학위를 받고 귀국하여 세종연구소 연구위원, 관동대 교수, 경기대 교수 및 국제대학장으로 일하면서도 짬만 나면 양주에 놀러가고 지금은 양주별산대 보존회장인 종관이와 순홍이는 물론 유경성 선생님이나 여러 이수자들과 정이 많이 든 것은 워싱턴에서의 만남이 큰 몫을 했을 것으로 본다.
내가 마지막으로 춤을 춘 것은 그 다음 해 큰아들이 다니는 CYC (Center for Young Children, University of Maryland 사범대학 부설)에서 각국의 문화를 소개하는 주간에 우리 탈춤을 소개하는 기회였다. 마침 양주에 있던 경희에게 급전을 쳐서 가면과 의상, 버선, 짚신 그리고 한삼 등 공연에 필요한 모든 것과 함께 반주 음악을 녹음 테이프에 담아 부쳐달라고 했고 경희는 그 바쁜 일을 신속하게 처리해주는데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탈춤의 기원, 탈에 관한 설명 그리고 테이프에서 나오는 반주에 맞추어 춤을 추었는데 외국인들의 눈에 얼마나 신기했을까 상상이 잘 가지 않는다. 그 가면과 의상 일체는 우리 집의 가보로 갖고 있다. 언제 다시 춤을 출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지금까지는 봉산탈춤과의 인연을 말했는데 그 인연은 1978년 여름 중대한 고비를 맞는다. 바로 국제정치학이냐 탈춤이냐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 생겼기 때문인데, 타협안으로 나온 것이 탈춤 추는 것을 일단 중단하고 국제정치학을 전공해서 그 분야의 직업을 갖되 탈춤 공연을 보러 가는 것 등은 얼마든지 좋다는 것과 후일 정년퇴임 후에는 다시 춤을 춰도 좋다는 대단히 비현실적인 조건이었다. 1978년 4월 통일원 공산권 담당관실 보좌관으로 임명 받았고 한국외대 대학원 동구지역과에서 석사, 미국 메릴랜드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를 거쳐, 귀국 후 세종연구소 남북한담당 연구위원, 관동대학교 북한학과 교수, 경기대학교 러시아학과 및 러시아어문학과 교수 그리고 국제대학장을 마치고 정년 퇴임하기까지 그 약속을 지켰다.
지금도 봉산이나 양주산대 공연이 있으면 놓치지 않고 보러 가고 가급적 사진과 동영상에 담는다. 내가 직접 춤을 추는 것은 어쩔 수 없어서 접었다 하더라도 후세에 탈춤의 역사를 남겨주는 일은 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요즈음도 어느 대학에서 탈춤 공연이 있다는 소식이 들려 오기를 애타게 기다린다. 북한을 다루면서 알아보고 싶었던 것은 봉산탈춤을 황해도 현지에서 추는 것을 본 적이 있다는 첩보의 진위를 파악하고 언젠가 북한을 자유롭게 방문할 기회가 오면 황해도 현지에 가서 봉산탈춤에 관련된 모든 것을 조사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북한에 있는 주민들과 우리 국민들이 황해도 봉산에 모여 함께 봉산탈춤을 한판 벌이는 것을 보는 것이 꿈이라면 꿈이다. 이것이 내가 통일을 간절히 바라는 여러 이유 중의 하나다.
*대학 시절 여러 대학을 돌면서 춤도 가르치고 공연도 보고 했는데 사진이 하나도 없다. 이제라도 누구든 사진을 보여주면 후사할 생각이다.
김덕중 : 서울 문리대 민속가면극연구회, 1972~1975. (전) 경기대학교 교수
[탈춤과 나] 원고 청탁서
새로운 언론문화를 주도해가는 인터넷 신문 <프레시안>(http://pressian.com)이 <사)민족미학연구소>와 <창작탈춤패 지기금지>와 함께 탈춤에 관한 “이야기마당”(칼럼 연재)을 기획하고 있습니다.
젊은 시절 탈춤이 좋아서, 쏟은 열정이 오롯이 담긴 회고담이거나 증언, 활동일지여도 좋고 아니면 현금 문화현상에 대한 어기찬 비판과 제언 형식의 글이어도 좋습니다.
과거 탈춤반 출신의 세대에게는 아련한 추억을, 신세대들에게는 다소 생소한 전통문화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글 내용이면 충분할 것입니다. 한 때나마 문화패로서 탈꾼으로서 개성넘치는 숨결을 담아내면 참 좋겠지요.
글 말미에는 대학탈춤패 출신임을 밝혀주십시오(대학, 학번, 탈춤반 이름 및 현직)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사진(1-5매)이나 시청각 자료도 곁들여 캡션을 달아 보내주시면, 지난 기억이 되살아나 더욱 생생한 느낌을 전달해줄 것입니다.
알뜰살뜰한 글과 사진제공에 대한 원고사례비는 제공되지 않고, 다만 원고가 묶여져 책으로 발간될 때 책 두 권 발송으로 사례를 대신합니다.
제 목 : [탈춤과 나] (부제로 각자 글 나름의 자의적인 제목을 달아도 좋음)
원고 매수 : 200자 원고지 15-30매(A4 3-5장)
원고 마감 : 2021년 9월 30일
(사진 등 시청각 관련 자료 캡션 달아 첨부하면 더욱 좋음)
보낼 곳 :
(사) 민족미학연구소 (namihak@hanmail.net) 채 희 완 (bullim204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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