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제 대학교수로서 정년을 한지 도 1년을 넘긴 사람이지만, 1970년대의 탈춤운동을 얘기하려니 두렵고 떨리는 마음이다. 그 시절의 이상과 좌절에 대한 기억을 되새기는 일이 감당하기 어려운 심적 혼란을 가져올 수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살아오면서 내게 지속적으로 커다란 영향을 주었던 활동에서 탈춤을 빼놓을 수 없고, 또 아직도 탈춤운동에 부여된 과제가 여전히 남아 있다고 믿기에 기억을 더듬어 당시를 회고해 보려고 한다.
2. 내가 탈춤을 처음 본 것은 1974년 연세대학교에 입학했을 무렵이다. 각 써클들이 자신들의 활동을 신입생들에게 소개하는 프로그램이 대강당에서 있었다. 갑자기 장구와 북, 깽쇠 소리가 들리더니 탈을 쓴 사람들이 덩실덩실 춤을 추는 것이다. 그 자리에서 같이 보던 동창생 녀석과 “우리 저거 하자”고 의기투합하고, 탈춤반을 찾았다. 그리고 입학한 지 한 달쯤 되었을 때, 봉산탈춤 공연을 정식으로 감상하게 되었다. 그것은 연세대학교 교양학부와 1973년 창립된 연세탈춤연구회가 공동 주최한 신입생 환영공연에서였다.
당시 연세대학교의 교양학부(모든 대학은 학생들의 교양교육을 위해서 1학년을 교양학부에서 운영하고 있었다)는 대학생들에게 한국적 교양을 심어주려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 프로그램을 마련하신 분은 교양학부장이셨던 성래운 교수님(교육학과)이셨다. 당시 공연 팜프렛에 실린 초대글에서 성래운 선생님은 그 프로그램의 목표를 이렇게 밝혔다. “만약에 대학교육에서 한국말을 영어나 또는 그밖의 외국어로 바꾸어 놓는다면, 그래도 한국의 대학임을 분명하게 알 수 있을까요? 그간의 한국의 대학은 지나치리만큼 구라파나 미국이나 일본의 대학을 흉내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지난해 교양학부에서 한국가면극에 대한 특강을 열었고, 한국가면의 전시회를 마련하였으며, 연세탈춤연구회의 조직을 후원하였고, 봉산탈춤 공연을 연세탈춤연구회와 공동으로 주최하였던 것도 한국에 있는 대학을 한국의 대학다웁게 하려는 여러 시도 중의 하나이었던 바,... 이를 통해 연세인이 되신 신입생 여러분이 한국적 교양의 폭을 넓히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성래운 교수님은 한국의 대학교육은 한국적인 내용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교육철학을 갖고 계셨고, 무엇보다도 대학생들에게 한국적인 교양을 갖추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하셨다. 그분이 중심이 되어 마련된 연세대학교의 교양교육에서 나는 탈춤을 교육프로그램으로 접하게 되었고, 풍류신학자이신 유동식 교수님의 <한국 종교와 기독교>, 판소리 연구의 권위자 김동욱 교수님의 <민속학 입문> 등의 강의를 통해서 한국 문화에 대한 이론적 기초를 습득할 수 있었다.
교양학부는 탈춤 이외에도 국악 활동과 마당극 공연을 지원하였다. 탈춤, 판소리, 풍물 등의 민속예술을 현대 연극의 기법과 접목하여 시도한 마당극 연습에 학생들을 참여하게 하여, <양반전>, <흥부전> 등을 제작하였고, 교양학부 학생들에게 관람하도록 하였다. 당시 고 마광수(전 연세대 국문과 교수) 선배가 대본을 쓰고, 연출을 맡았다. 나는 1975년 공연된 <흥부전>에 춤꾼으로 참여하였다. 교양과정에서 탈춤, 국악, 마당극을 맛본 학생들은 일회적인 행사에 만족할 수 없었다. 탈춤 연습에 참여했던 몇몇 주동자들을 중심으로 연세탈춤연구회가 만들어졌듯이, 국악에서는 1974년에 국악연구회, 마당극에서도 1974년에 고전극연구회가 창립되었다. 이 세 단체는 1975년에는 합동으로 <고전의 향연>이라는 행사를 대학축전에서 개최하기도 하였다. 1976년에는 아예 <무악두레제>라는 민속축전을 대학축전으로 출범시켰다. 그것은 대학 대동제의 효시에 가깝다.
3. 1973년 창립된 이래로 1970년대 말엽까지의 연세탈춤연구회의 활동은 크게 세 가지로 구분된다. 첫째, 전통 탈춤의 전수와 공연, 탈춤을 비롯한 한국 민속에 대한 조사와 연구, 둘째, 도시 빈민가와 농촌 지역 봉사활동과 공연, 셋째, 창작탈춤 공연 등이다. 뒤에 다시 언급하겠지만, 1970년대 대학탈춤운동의 양상 가운데서 연세 탈반이 보인 두드러진 활동은 도시와 농촌에서의 봉사 참여와 공연, 대학교회를 중심으로 벌어진 종교적 주제의 창작탈춤, <무악두레제> 등의 민속축전행사 주최 등을 꼽을 수 있다.
창립 초기 연세 탈반 회원들은 우리 민속과 그 전승 주체인 민중의 삶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모였다. 내가 기억하기로 당시 연세탈춤연구회의 창립취지문은 창립 목표를 이렇게 담고 있었다. “두둥실 달밝은 밤, 마디 마디 신을 풀어내던 민중예술, 모두에게 전하고자 우리는 모였노라”. 민중의 애환과 슬기를 담은 민족 문화예술로서 탈춤을 배우고 전승하려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관심사였다. 물론 그러한 관심은 당시의 대학문화, 나아가 당시의 한국 사회의 현실에 대한 비판적 시각에서 비롯된 것임에 틀림없다. 그것은 쌍쌍파티와 그룹사운드를 동원한 페스티벌로 상징되는 대학문화에 대한 염증,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찾으려는 열망, 서민 대중의 표현 양식과 한국 전통적인 정서와 감수성을 회복하려는 진지한 욕구, 이러한 것들이 초창기 대학생들을 탈춤반으로 모여들게 한 주된 동기였다.
그러나 일단 탈춤의 맛을 보고 나면 마약과 같이 그것에 빠져들게 하는 것은 어떤 학문적, 사회적 관심보다는 탈춤 자체가 갖는 매력 그 자체였다. 탈춤이 가지고 있는 멋과 흥, 여유, 눈물과 웃음, 해학 등을 탈과 춤, 재담, 음악, 마임, 공연 분위기에서 맛보고 나서는 스스로 탈꾼이 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또한 탈춤반 특유의 집단적 분위기가 있었다. 진현숙(국문 72) 선배가 어느 공연 팜프렛에서 쓴 대로 “낭자히 벌어진 탈판에서 우리 할아버지들의 맥박을 느낀 젊은이”들이 만들어내는 분위기, “탈판의 진실을 맛 본, 우리의 체취를 맡은, 그래서 더 이상 남의 뒤꽁무니를 쫓지 않는 젊은이”들이 만들어내는 분위기였다. 내가 대학 1학년 때 만난 나의 선배들, 백규서(신학 72), 문창룡(도서관 72), 원종일(도서관 72), 정각교(경영 72), 진현숙(국문 72), 이화택(법학 73) 등은 정말 모두 그런 사람들이었다. 티를 내거나, 남을 면박주거나 하지 않는 너그러운 분위기, 제멋대로인 듯하면서도 커다란 흐름을 형성하는 분위기, 뭔지 헐렁하고, 질탕하기도 하고, 약간은 퇴폐적이어도 서로 이해하는 분위기였다. 그런 분위기가 우리를 서로에게서 도망치지 못하도록 묶어 놓았다. 마치 피의 부름을 받은 사람들처럼, 단군의 손자나 손녀가 된 것처럼, 무슨 동지나 공범자처럼 뭉치고, 춤추고, 술 마시며, 몰려 다녔다. 거의 같이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도 다들 살아 남아서 우리 사회의 변화와 발전에 기여한 것은 행운이라고나 할까? 그런 체험을 공유해서인지 지금도 탈반 선후배들은 가장 좋은 친구들로 자주 만나고 있다.
그러한 분위기는 각기 속한 대학을 넘어서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서울에서는 서울대, 서강대, 이화여대, 연세대 등 4개 대학의 탈꾼들이 대학을 넘어서서 자주 교류했다. ‘독수리집’이라는 신촌 시장 안의 주막에서 각 대학 탈꾼들이 모였던 적이 많았는데, 통행금지 시간이 되면 모두 학교 담을 넘어 교양학부에 있는 우리 탈춤반 사무실로 모여들어서, 같이 밤을 세워가며 술판을 벌였다. 그 때 같이 몰려 다니던 친구들 중에는 서강대의 최종덕(전 상지대 교수), 서울대의 이선복(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 등이 지금까지 가장 친한 인생 친구로 남아 있다. 그 때도 여러 대학이 모이면 대장은 서울대 대학원생이었던 채희완 선배셨다. 한번은 이대 앞에서 채 선배를 비롯해 몇 사람이 모였는데, 통행금지는 되어 가고, 여관비도 없는 터라, 근처 내부 공사 중인 가게에 들어가 밤을 새운 일도 있다. 물론 다음 날 아침에는 누군가 나와서 해장을 겸한 맛있는 조반을 사주곤 하였다.
그러면서 배우고 공연했던 것이 봉산탈춤(73년 창립공연, 74년, 78년 신입생 환영공연), 통영오광대(74년 제 2회 정기공연, 76년 제 4회 정기공연), 양주별산대놀이(75년 제 3회 정기공연) 등이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전통탈춤을 충실하게 재현해 보고 싶었다. 민중예술의 아름다움, 미의식, 민중들이 꿈꾸던 이상세계를 전달하고 싶었다. 말뚝이 탈 속의 자신이 이 시대의 말뚝이라도 된 듯이 양반의 허세를 풍자하고 몰아 부쳤다. 신입생 시절 봉산탈춤 먹중춤 연습으로 허벅지를 단련하였고, 공연 때마다 상당한 시간을 연습에 투자했기 때문에 춤, 소리, 악기 연주 등에서 상당한 정도의 기량을 보였다고 기억한다. 당시 대학가에서는 춤에는 역시 채희완 선배가 최고의 고수였지만, 연세대의 정수범(건축 74), 서울대의 정연도(지질 75) 등도 유명한 대학생 춤꾼이었다. 인간문화재 선생님들이 탐을 낼만큼 기량이 뛰어난 친구들이 여럿 있었다. 당시 탈춤 공연에는 어김없이 횃불이 등장했다. 횃불을 밝히고 공연할 때면 노천극장이 수천명의 대학생들로 가득찼다. 각 대학의 탈꾼들이 신촌으로 몰려 와서 함께 밤을 지샜다.
당시 탈춤반들은 정기적으로 모여서 스터디를 했다. 주로 한국의 문화와 민속에 대한 것이었다. 이두현 교수의 <한국 가면극>을 비롯하여 탈춤에 관한 조동일 교수의 논문들을 많이 읽었다. 유동식 교수님의 <한국 무교의 역사와 구조> 등도 읽었다. 시간이 가면서 사회과학 서적들이 주요 독서 대상이 되어 갔다. 당시 ‘수양회’라 불렸던 MT에서는 “가면극의 학문적 정립”, “전통의 창조적 수용”, “탈춤에 담긴 민족의 얼과 생명력” 등을 주제로 토론하였다. 서울의 4개 대학이 공동으로 “전통문화의 창조적 수용”이라는 주제로 심우성 선생님을 모시고 심포지움을 준비하다가, 당국의 제지로 중지된 적도 있다. 1975년부터는 매해 민속촌 답사 활동을 하였는데, 나는 1976년 밀양, 진주, 통영 등을 중심으로 영남지역의 민속조사, 1977년에는 진도 답사에 참가하였다.
4. 연세 탈반의 활동 중 도시 봉사와 농촌 봉사에 참여한 일을 잊을 수 없다. 그 활동은 1973년 겨울, 선배들이 시작했던 활동인데 박정세 선배(당시 연세대학교 신학대학원생, 전 연세대 신학과 교수 겸 교목실장)가 주도하여 기독학생회(SCA)와의 협력 아래 진행되었다. 당시 기독학생회는 성남 판자촌, 망원동 판자촌을 비롯한 서울 인근의 빈민촌에서 동하계 봉사활동을 했고, 농촌 지역에서도 봉사활동을 했다. 그 기간 동안 탈춤반에서는 2-3명의 회원을 교대로 파견하여, 초등학생, 부녀회, 청년회에서 탈춤강습을 했고, 그 마을의 노인들을 중심으로 풍물패를 조직하였다. 나는 1974년 여름에는 망원동과 경기도 어느 농촌 마을, 1975년 겨울은 성산동에서 이 봉사활동에 참여했다. 1974년에는 민경율(행정 74), 1975년에는 김하운(경제 74)과 조승철(경제 74)이 함께 했다. 봉사활동이 마무리되는 시점에서 마을 축전을 벌였다. 마을의 풍물패와 대학의 탈꾼들이 모여서 길놀이를 하고, 탈춤을 공연하는 등 옛 고을굿을 재현하는 것이었다.
올해 돌아가신 서울대의 이애주 선배, 채희완 선배, 그리고 김영동씨, 임진택씨, 서강대의 곽관주씨, 이대의 홍성원씨를 비롯하여 대학가의 탈춤 고수들이 모여서 제법 큰 판을 벌였다. 얼마 전 고 박인배씨가 이 섹션에서 쓰신 원고에서 농촌 봉사활동에 참여했다는 것도 바로 연세 탈춤반이 주관한 봉사활동 지역에서의 축전 행사였다. 이러한 봉사활동은 대학생들과 민중들의 접점이 되었다. 후에 인천산업선교회에서 탈춤반 출신들이 활동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다. 어느 날인가 채희완 선배가 나를 불러내더니 인천항으로 데려가서 배에 태웠다. 인천 앞바다 어느 섬에서 모 상사의 노조원들이 수련회를 하는데, 탈춤에 대한 선배의 강의 및 강습에 나를 조교로 데려간 것이다. 채 선배는 탈춤에 대해서 강연을 하시고 나는 봉산탈춤 먹중춤을 가르쳤다. 그날 밤은 밤새 노조원들과 이야기를 나누느라 한숨도 못 자고, 배에서 계속 토하며 돌아왔던 기억도 있다. 우리는 고아원, 양로원, 난지도 개척교회, 군부대, 공단 등 우리가 탈춤을 소개하고 탈춤으로 봉사할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단 몇 사람이라도 갔다. 난지도에 정수범과 이순규(간호 74), 나, 셋이서 가서 번갈아 춤추고, 장구치고 했던 적도 있다.
이러한 대학 내외의 활동을 위해서는 악기뿐만 아니라, 의상, 탈 등이 필요했기 때문에 우리는 탈을 만드는 일, 의상을 마련하는 일에 힘썼다. 송승근(의예 73), 고 김승호(의예 73), 박지태(치의예 74) 등이 중심이 되어 탈을 제작하는 일을 거듭했는데, 그 기량이 상당한 수준이 되었다. 사자탈까지 제작하여, 다른 대학에도 의상과 탈을 대여해 준 일이 많았다. 탈을 만드는 일은 우리가 탈춤에 대한 애정과 깊은 이해를 갖게 한 좋은 프로그램이었다.
5. 창작탈춤을 만드는 일은 탈춤반의 지속적인 숙원이었다. 1974년 봄 이대에서 공연된 <소리굿 아구>를 보고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그런데 그 무렵 이승욱(토목 72) 선배가 매주 어디론가 연습을 다녀서, 한번은 따라나섰다. 용두동 옛 서울 사대 무용연습실에서 고 이애주 선배가 대학원 졸업 공연으로 <땅끝> 이라는 창작춤극 공연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거기는 내가 낄 자리가 아니었다. 각 대학의 최고 춤꾼들과 김영동(대금연주자), 이종구(작곡가), 챼희완(서울대 대학원, 미학), 김민기(가수, 서울대 회화과 4), 김석만(서울대 지리학 4), 장만철(서울대 고고학 4) 등 기라성 같은 선배들이 참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왠지 꼭 참여하고 싶었다. 그래서 연습 때마다 달려가서 물도 떠다 드리고, 잔심부름도 했다. 그리고 내가 적어도 봉산탈춤의 먹중춤은 잘 출 수 있다는 것을 보여드렸다. 나의 정성과 열의에 감탄하셨는지, 이애주 선배와 채희완 선배가 나를 섬마을 주민들 중 한 명으로 캐스팅해 주었다. 탈춤반에서 활동한 지 한 학기도 한 되어, 최고의 춤꾼들과 한 무대에 선 것이다. 나는 당시의 팜프렛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공연을 마친 후 어느 날 채희완 선배는 당시 대학생으로 가기 어려운 명동의 고급 음식점에서 나에게 밥을 사주었다.
1975년 2월 <땅끝>에서 모였던 선배들이 유신 찬반투표 저지를 위한 공연을 준비하였고, 각 대학의 탈꾼들이 참여하였다. 이화여대의 강정례 선배가 먹중춤을 강도높게 훈련시켰다. <구리 이순신>, <금관의 예수>, <땅끝> 등을 연습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경찰의 급습으로 연습이 중지되고, 대부분 경찰에 연행되었으며, 모임은 해산되었다.
이러한 경험에서 얻어진 역량은 1975년 연세대 대학교회에서 박정세 선배의 주관으로 <애순이>라는 창작탈춤을 준비하는 데서 발휘되었다. <애순이>는 구약성경의 에스더서의 내용을 탈춤극으로 제작한 것이다. 교회가 탈춤을 수용해서 종교적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했던 초기의 시도 중의 하나였다. 이런 작업이 제일교회에서도 진행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첫번째 공연의 대본은 진현숙 선배(국문 72, 전 원주 육민관 고등학교 교장)가 썼다. 문창룡 선배가 연출을 했고, 나는 조연출을 맡았다. 채희완 선배의 힘도 빌렸다. 1977년에는 내가 대본도 개작하고 연출을 맡아, 제법 그럴듯한 공연을 해냈다. 그러나 창작탈춤을 만드는 일은 전문성과 특별한 재주를 요구하는 작업이라 내가 할 수 있는 작업의 범위를 넘어선다는 것을 깨달았다.
6. 대학원에 진학하자 탈춤에서 조금 멀어지는 듯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당시 학생처장이셨던 철학과의 박영식 교수님이 나를 찾으셨다. “자네, 탈춤했지?”하고 물으신다. “자네 후배들이 하도 데모에 앞장서서 아무도 지도교수를 안 맡으려 해서, 할 수 없이 내가 맡았으니, 알아서 해.” 내가 탈춤반 한 것을 모르실 리가 없었다. 3학년 때, 척추 디스크 수술을 하고 춤을 출 수 없게 되자, 이제 “공부나 하지?”하시면서 학문의 길로 이끌어 주셨던 분이셨다. 연세춘추에서 주관한 논문 현상 공모에 “전통문화의 올바른 전승”이라는 논문으로 내가 당선되었을 때, 선생님이 연세춘추 주간이셨다. 그 분은 나중에 연세대학교 총장, 교육부 장관을 역임하셨고, 나를 학자로, 또 대학 행정가로 이끌어 주셨다.
우리의 탈춤운동을 이끌어 주시고 도와주셨던 선생님들을 잊을 수 없다. 성래운 선생님은 박정희 유신 정권에 저항하시다가 해직교수가 되기 전까지 연세탈춤연구회의 지도교수를 맡으셨다. 우리가 봄, 가을 가졌던 수양회에 슬리핑 백을 지고 나타나셔서, “탈춤과 민중의식” 등을 주제로 우리들과 토론하셨다. 토론하다가 학생들이 담배를 태우려 자꾸 자리를 떠나자, 선생님은 그러지 말고 같이 피우자고 제안하실 정도로 제자들에게 마음을 여셨고, 시낭송으로 시대의 아픔을 전해 주셨다. 성래운 교수님에 이어 지도교수를 맡아 주셨던 김동욱 교수님은 국문학자, 민속학자로서 우리 활동의 본질을 꿰뚫어 보고 계셨다. 판소리 연구의 권위자셨던 선생님은 “이두현이가 내 바바리 코트 위에 가면을 놓고 사진 찍었어” 하시면서 같이 민속 조사 다니시던 얘기를 해 주셨다. 연초가 되면 우리 탈반 회원들을 댁으로 부르셔서, 한 상 차려 주시고 양주를 내놓으셨다. 그리고 액자를 만들 수 있게 카드 크기의 종이에 한문으로 좋은 글을 적어 주시고, 1,000원씩 세배돈을 얹어 주셨다.
지금도 내 방에는 선생님이 써주신 “風月無邊”이 액자로 걸려있고, 나는 無邊을 내 아호로 삼고 있다. 내가 진주에 취직이 되어 인사를 드리러 갔더니, “진주에 가면 ‘성계옥’이라고 있다. 내 얘기하고 인사드리게” 하셨는데, 나는 성계옥을 김수악으로 잘못 기억하고 찾아갔었다. 그 당시 강사셨던 정현기 선생님(국문학과)은 문학 비평가의 날카로운 시선으로 시대상을 분석하고 그에 대한 비판적 의식을 일깨워 주신 분이다. 선생님도 우리 수양회에서 두주불사하시며 우리와 토론하셨다. 선생님 댁에 갈 때마다 맛보던 막걸리의 맛을 잊지 못한다. 박정세 선배는 선배이자 선생님 같은 존재였다. 우리 탈춤운동의 방향타 역할을 해 주셨다. 박선배님이 아니었다면 나는 내 이웃에 그런 빈민촌이 있는 줄도 모르고, “민중의식”이란 말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살았을 것이다. 선생님들의 인격에서 배운 것이 탈춤 운동 자체에서 배운 것 만큼이나 내가 살아가는 데 커다란 힘이 되었음을 늙어 가면서 더 깨닫는다.
7. 나는 1983년 봄 진주 경상대학교의 전임으로 내려와 지금까지 38년을 대학 선생으로 일했고, 작년에 은퇴하였으니 진주에서 39년을 살았다. 진주에 오면서 이제 탈춤은 접고, 공부에 집중해야지 하고 생각했었고, 내가 탈춤을 했다는 사실을 누가 알랴 싶었다. 그런데 1년 쯤 지나자, 어떻게 알았는지 학생들이 찾아 왔다. 이 대학의 탈춤반 격인 “전통예술연구회”의 지도교수를 맡아 달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와 여러분이 만나면 지금은 서로 불리하다. 그러니 나중에 맡을께”하고 뿌리치고, 그 대신 다른 교수를 소개해 주었다. 하지만 그 후 캐나다 유학을 다녀와서 다시 부탁하는 것은 거절할 수 없어서 1990년부터 그 써클이 해체될 때까지 십여년간 지도교수를 맡았다. 한번은 그 학생들이 공연을 하는데, 통영오광대 보유자 선생님들이 악사로 오셨다. 공연장에 가서 “제가 할미양반 했던 아무개입니다.”하고 인사를 드렸더니 “자네가 이 대학의 고수(‘교수’의 경상도식 발음)가? 허 잘됐네. 내 제자가 고수가 됐네” 하신다. 생각해 보니 내 인생에 도움을 주신 분들 중 내게 탈춤을 가르쳐 주셨던 인간문화재 선생님들을 빼놓을 수 없다. 나에게는 그분들이 살아가는 모습이 곧 탈춤이었다.
그러다가 1995년 어느 날 내가 존경했던 고 김수업 교수님(경상대 국어교육과)이 나를 찾아오셨다. 그분이 교수회장이실 때 내가 간사로서 모셨었지만, 내가 대학 때 탈춤을 했다는 것은 말씀드리지 않았었다. “정교수요, 난 정말 몰랐어요. 정 선생이 탈춤했다는 거는 와 말을 안했어요?” 당시 선생님은 삼광문화연구재단이라는 지역 민간재단의 이사장을 맡으시면서 탈춤 축전을 준비하고 계셨다. 학계에 두루 도움을 청하는데 누군가 내 얘기를 한 모양이었다. 아마도 채희완 선배가 아니었을까? 그래서 “진주탈춤한마당”이라는 지역축전이 출범하는 일에 간여하게 되었고, 탈춤과 다시 만났다. 그러더니 다음 해에는 선생님이 “‘진주오광대’를 복원해야 하는데, 어쩔꼬?” 하신다. 그래서 내가 “선생님, 그것은 돈 들여서 전문 예능인들에게 부탁하실 일이 아닙니다. 시민들이 모여서 탈춤 추고 놀다 보면 만들어집니다” 했다. 그리고는 진주오광대 복원 작업이 내게 맡겨졌다. 다행히 강동옥씨(경상대 81, 진주오광대 기능보유자, 경남문화예술회관장)를 비롯하여 우리 대학 전통예술반 출신으로 춤 잘추는 인재들이 있어서 그들을 중심으로 1998년 진주오광대를 복원하였다.
복원이 끝난 후 물러나려고 하였더니 복원의 주역들이 “그런 법이 어디 있나요? 이자부터 저희가 형님이라고 할테니 우리와 함께 하입시더” 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예 같이 공연까지 다니게 되었고, 나중에는 김수업 선생님에 이어 진주오광대보존회 회장까지 맡게 되었다. 그러던 중에 <진주탈춤한마당>의 기획을 맡았던 예술단체가 그 일에서 손을 떼면서 재단에서 행사를 직영하게 되었는데, 재단 이사였던 내가 그 일을 떠맡았다. 당장 채희완 선배를 찾아갔다. 나는 채 선배가 그렇게 반가워하실 줄 몰랐다. 이것이 1998년의 일이니 그로부터 23년 동안 채희완 교주를 예술감독으로 모시고 탈춤행사를 주관하고 있다.
8. 젊었을 때는 대학에서 학생과장(1992년), 기획실 부실장(1995-1998년) 등을 맡은 적이 있었다. 탈춤반 시절의 생각을 하면서 사회비판적인 학생들의 얘기를 잘 들어 주니 일하는 데 어려움이 없었고, 탈춤행사, 대학 축전행사를 진행한 기획력이 발휘되었는지 꽤 재밌게 일했다. 이러다가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르겠다 싶어 보직에서 물러나 학회 일을 맡으며, 잠시 학문에 전념하였다. 그런데 50대 중반에 다시 보직을 하게 된 것이다. 이번에는 교무처장을 맡아 교육프로그램을 구성하는 일을 하게 되었다. 이왕 맡게 되었는데, 정말 학생들을 위한 좋은 교육프로그램을 마련하자고 생각했다. 내가 특별히 강조한 부분이 바로 학생들의 문화역량을 키워주는 일이었다. 나는 민속극, 연극, 영화, 드라마, 춤 등에 대한 교양과목을 대폭 늘리고 학생들이 우리 문화에 접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려고 노력하였다. 그것은 내 스스로 탈춤 활동을 통해 키워 온 문화역량이 내가 살아가는 데 큰 힘이 되었다는 것을 늘 확인하며 살아왔기 때문이다.
몇 년간의 보직 생활을 끝내고 내려왔는데, 김수업 선생님이 또 찾아오셨다. “정교수요, 학교 일, 잘 마쳤으니, 이제 지역일 좀 보이소. 정 선생도 이자는 진주사람인데, 지역문화를 돌보아야 하제” 하신다. 그래서 진주시 유네스코 창의도시 추진위원회 일을 맡게 되었다. 3년간의 준비를 거쳐, 2019년 드디어 진주시는 공예-민속예술 분야의 유네스코 창의도시로 지정되었다. 행정 경험과 인적 네트워크, 문화에 대한 이해, 기획능력 등이 이 일을 가능하게 하는 토대가 되었고, 이것들은 역시 기본적으로 탈춤 활동에서 획득된 것이다. 또한 38년 동안 진주에서 잘 살았고, 지역문화를 가꾸는 일에 참여하였으니 당연한 봉사라고 생각했다.
9. 초년 교수 시절에 채희완 선배가 이끄시는 한두레 극단이 우리 대학에서 공연한 일이 있다. 오랜만에 연락을 받고 달려 나갔더니 채 선배는 이미 술이 거나해 계셨는데, “탈춤한 것이, 사는 데 도움이 되지 않아?”하고 물으셔서 “네. 정말 그래요”하고 대답했던 일이 기억 난다. 그렇다. 탈춤은 나에게 그러하다. 탈춤은 내가 살아가는 데 가장 큰 힘이었다. 내가 늘 비판의식을 가지고 역사와 사회를 바라볼 수 있었던 것, 문화철학에 관심을 가지고 학문의 길에 들어설 수 있었던 것, 대학 행정 일을 무사히 수행할 수 있었던 것, 진주에서 지역문화를 가꾸며 잘 살아온 것도 다 탈춤 덕분이다.
정병훈(연세대 탈춤반 74학번, 경상대학교 철학과 명예교수, 총장직무대리 역임)
[탈춤과 나] 원고 청탁서
새로운 언론문화를 주도해가는 인터넷 신문 <프레시안>(http://pressian.com)이 <사)민족미학연구소>와 <창작탈춤패 지기금지>와 함께 탈춤에 관한 “이야기마당”(칼럼 연재)을 기획하고 있습니다.
젊은 시절 탈춤이 좋아서, 쏟은 열정이 오롯이 담긴 회고담이거나 증언, 활동일지여도 좋고 아니면 현금 문화현상에 대한 어기찬 비판과 제언 형식의 글이어도 좋습니다.
과거 탈춤반 출신의 세대에게는 아련한 추억을, 신세대들에게는 다소 생소한 전통문화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글 내용이면 충분할 것입니다. 한 때나마 문화패로서 탈꾼으로서 개성넘치는 숨결을 담아내면 참 좋겠지요.
글 말미에는 대학탈춤패 출신임을 밝혀주십시오(대학, 학번, 탈춤반 이름 및 현직)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사진(1-5매)이나 시청각 자료도 곁들여 캡션을 달아 보내주시면, 지난 기억이 되살아나 더욱 생생한 느낌을 전달해줄 것입니다.
알뜰살뜰한 글과 사진제공에 대한 원고사례비는 제공되지 않고, 다만 원고가 묶여져 책으로 발간될 때 책 두 권 발송으로 사례를 대신합니다.
제 목 : [탈춤과 나] (부제로 각자 글 나름의 자의적인 제목을 달아도 좋음)
원고 매수 : 200자 원고지 15-30매(A4 3-5장)
원고 마감 : 2021년 9월 30일
(사진 등 시청각 관련 자료 캡션 달아 첨부하면 더욱 좋음)
보낼 곳 :
(사) 민족미학연구소 (namihak@hanmail.net) 채 희 완 (bullim204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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