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경제를 표방하는 플랫폼은 사실 몇몇 소수가 이를 소유하고 있다. '공유'라는 말과 맞지 않다. 플랫폼을 실제로 공유한다고 하면, 공동의 이익을 위해 다수에게 플랫폼이 공유되어야 한다. 하지만 몇몇 소수를 제외하면 플랫폼이 만든 질서 안에서 이용자 개인은 어떤 선택권을 가질 수 없다. 오로지 플랫폼을 이용하는 권한만이 주어져 있다. 개인이 플랫폼에서 얻은 이익의 일부는 '공유'라는 명목으로 플랫폼 소유자가 가져간다. 플랫폼 안에서 이익은 사람이 만들어낸다. 자영업자, 요리사는 조리 노동을 하고, 이렇게 만들어진 상품은 배달 노동을 통해 플랫폼 안에서 판매자와 구매자가 만난다. '4차 산업 혁명' 등 거창한 말로 표현되지만, 사실 플랫폼은 공공이 깔아둔 인터넷 망을 이용해 사업자·노동자와 소비자를 연결해주는 중개업자다.
문제는 플랫폼이 탄생부터 '독점'을 목표로 하며, '독점'을 통해 성장하는 속성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플랫폼 기업의 '구밀복검' 전략...그들은 태어날 때부터 '독점'을 꿈꾼다) 이용자를 끌어모아야 '규모의 경제'를 통해 성장할 수 있다. 플랫폼 기업은 적자 경쟁을 통해 이용자를 끌어모으는데 성공하면, '가두리' 방식으로 점차 독점적 질서를 만들어간다. 공룡 배달앱 기업들이 갑자기 수수료를 올리거나, 이용자의 노동 행위를 제한하거나 플랫폼의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노동을 개조한다.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각종 '리스크'는 노동자와 소비자들에게 떠넘긴다. 이를테면 음식값엔 이전엔 재료 비용, 업장 임대 비용, 노동 서비스 비용 등으로 이뤄졌지만, 이제는 '플랫폼 이용 비용'이 추가된다. 플랫폼이 독점을 추구하게 되면, 플랫폼 이용 비용이 다른 비용을 잠식한다. 플랫폼이 내거는 각종 '할인'서비스는 사실 돌고돌아 플랫폼 노동자와 자영업자들의 부담으로 작용한다.
'공유 경제'는 없다. 플랫폼은 플랫폼을 이용하는 이들에게 이익을 빼앗아오는 구조로 변하고 있다. 이런 구조는 수많은 '긱 노동자'들과 '영세 자영업자'들을 생산한다. 93회 아카데미 감독상을 거머쥔 클로이 자오 감독이 연출한 미국 영화 <노매드랜드> 는 경제가 붕괴한 도시의 '긱 노동자' 삶을 다뤘다. 거대 플랫폼 기업의 '긱 노동자'로 전락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앞으로 벌어질 시민 노동자들의 삶을 우울하게 예고한다. <프레시안>에서는 플랫폼 기업이 '상수'가 된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논픽션, 분석 기사 등의 방식으로 다룰 예정이다. 첫 회로 배달앱 노동자로 흘러들어온 한국의 '긱 노동자' 라이더의 삶을 살펴본다.
이성희 씨(52, 가명)는 경북에 있는 신학대학을 졸업했다. 부모님은 경북 영덕에서 담배와 고추 농사를 지었다. 형제가 다섯이라 집에서는 대학 입학금만 농협 대출로 이 씨에게 내줬다. 대학을 다니는 내내 학비는 물론, 자취비까지 스스로 해결했다. 주유소 아르바이트부터 막노동까지 해보지 않은 일이 없었다.
그중에서 정기적으로 한 일은 닭 배 따는 일이다. 단가가 제일 비싸서였는데, 그만큼 일은 고됐다. 컨베이어 벨트 속도에 맞춰 일하다 보니 화장실 갈 틈도 없었다. 그렇게 붙박이처럼 한 달을 일하다 보면 팔뚝의 근육 부분이 새까매졌다. 성희 씨는 7년 만에 대학을 졸업할 수 있었다.
졸업 후에는 대구 달성군에 있는 <조선일보> 지사의 영업직으로 취직했다. '1등 신문'이라서 맘에 들었다. 일은 힘들지 않았다. 다만, 월급이 적었다. 부식비, 교통비, 그리고 월세 등을 계산해 보니 지출이 수입보다 많았다. 두 달 만에 일을 관두고 막노동을 시작했다. 그러다 우연찮게 <벼룩시장>에서 중국집 배달 광고를 보게 됐다.
그에겐 이 문구가 눈에 박혔다. 당시는 IMF 때라 새벽 네 시에 인력소에 나가도 일이 없었다. 고민할 것도 없었다. 대구 달성군에 있는 중국집이었는데 홀에 테이블은 네 개밖에 없었다. 사장이 주방장이었고, 사모님이 카운터를 보는 작은 가게였다. 직원은 이 씨 혼자였다. 주방 옆 단칸방에서 배달일을 시작했다.
돌고 돌아 다시 중국집 배달원
처음에는 시키는 대로 모든 일을 다 했다. 사장은 성희 씨에게 매일 아침 8시, 홀에 나와 야채를 손질하도록 했다. 성희 씨는 원래 그래야 하는 줄로만 알고 군말 없이 일했다. 먹여 주고 재워 주는 게 어딘가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한 달을 지내다 보니 친해진 주변 중국집 배달원들로부터 대체 야채 손질을 왜 하는 거냐는 핀잔이 들려왔다. 석 달이 지나서야 겨우 야채 손질은 못하겠다는 말을 꺼냈다.
물론, 배달일은 열심히 했다. 틈틈이 전단지도 곳곳에 뿌렸다. 만나는 사람마다 가게에 오라고 영업을 했다. 자기가 있는 가게가 잘돼야 자신도 잘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해서 하루 매출 10만 원 정도였던 가게가 반년 만에 30만 원을 넘겼다. 배달원도 둘이나 더 늘었다.
3년 정도 일했을까. 뼈아픈 실수를 저질렀다. 배달 중 사람을 쳤는데, 상대편이 많이 다쳤다. 3000만 원에 합의를 했는데, 그간 저축한 돈이 다 날아갔다. 더는 배달을 하고 싶지 않았다.
부산에 있는 큰형이 집으로 오라고 했다.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큰형 소개로 공장에서 일을 시작했다. 하루 열두 시간 근무로 한 달 80만 원을 받았다. 배달로 월 180만 원을 벌던 이 씨에게는 적은 돈이었다. 게다가 라인에 맞춰 옴짝달싹 못 하고 제품을 조립하다 보니 다시 닭 배 따는 공장에 돌아온 기분이었다. 1년 가까이 버텼지만 결국 그만뒀다.
이성희 씨는 자기 사업을 시작했다. 건물에 자판기 음료수를 대는 일을 시작으로 하나둘씩 사업을 늘려 나갔다. PC방, 인테리어, 납골당 분양 사업도 했다. 그러다 친구와 동업했던 인테리어 사업에서 문제가 생겼다. 동업자가 공사 대금 등 1억8000만 원을 들고 도망갔다. 영문도 모르고 사무실에 출근한 성희 씨는 연장을 챙겨 쳐들어온 목수들에게 멱살잡이를 당했다.
물어 줄 돈이 없던 이 씨는 도망치는 수밖에 없었다. 남들 모르게 서울행 버스를 탔다. 중국집에서 배달원을 뽑는다는 광고를 보고 무작정 상경한 것이다. 서울 방배동에 위치한 중국집에는 함께 일하는 배달원이 두 명 더 있었다. 숙식이 가능한 곳이었다. 중국집 인근 지하 원룸에서 셋이서 생활했다. 그렇게 서울살이가 시작됐다.
직업소개소 배달원으로 취업
월급은 180만 원이었으나 서울 지도를 외우지 못하는 이성희 씨에게는 20만 원을 뺀 160만 원을 줬다. 아침 9시부터 밤 9시까지 일하면서 한 달 두 번 쉴 수 있었다. 중국집에 출근하면 홀 청소를 한 뒤, 전날 배달한 그릇을 회수하러 다녔다. 전단지도 돌려야 했다. 한창 배달이 몰리는 시간대에는 죽어라 오토바이를 탔다.
개인 생활은 불가능했다. 한 번은 여수에 있는 친구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문상을 다녀오는데, 이틀 휴가를 쓰고 한 달 반 동안 하루도 쉬지 못하고 일했다. 입에서 단내가 날 지경이었다. 그러다 택시와 부딪히는 사고가 났다. 다행히 골절은 없었으나 온몸이 다 쑤시고 아팠다. 그런데 사고가 난 날이 하필 금요일 저녁이었다. 가게가 바쁘다 보니 토요일, 일요일도 병원에 가지 못하고 오토바이를 탔다.
그때는 산재 신청은커녕, 교통사고가 나면 차주에게 치료비와 합의금을 받아야 하는지도 몰랐다. 나중에야 중국집 사장과 배달원들이 이를 알면서도 말해 주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됐다. 한솥밥 먹는 이들이라고 생각했는데 정나미가 떨어졌다. 일한 지 2년 만에 가방을 쌌다.
이후 남대문 직업소개소에서 일을 시작했다. 배달 손이 부족한 중국집에 임시로 배달원을 보내는 일로 특화된 곳이었다. 소장은 중국집 사장을 하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배달원이 갑자기 사라지거나 다칠 경우 중국집이 난감해진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밀려드는 배달을 처리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잘나갈 때는 이 직업소개소에 속한 배달원만 2000명 정도였다. 하루 평균 일하러 오는 배달원이 200~300명 정도 됐다.
2000년대 중반 당시 일당은 9만 원. 여기서 소개비로 5000원을 뗐다. 일은 직업소개소에 온 순서대로 배정되지 않았다. 소장이 적재적소에 배달원을 배치하는 식이었다. 지금은 배달앱에서 AI가 하는 역할을 소장이 했던 것이다. 중국집 사업주 입장에서는 배달원이 일하다 다쳐도 책임질 필요가 없고, 일정 기간만 이용하다 다른 배달원으로 대체하면 퇴직금을 주지 않아도 된다는 장점이 있었다. 짧으면 하루, 길면 3개월까지 직업소개소에서 배달원을 공급받았다.
이 씨 입장에서도 중국집에서 일할 때보다 편했다. 쉬고 싶으면 쉴 수 있었고, 돈이 필요하면 소개소에 나가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좀처럼 목돈이 모이지 않았다. 3년 만에 그는 지인과 함께 방배동에서 돈가스 가게를 시작했다. 지인은 주방을, 자신은 배달을 맡았다. 장사는 잘됐다. 강남 곳곳을 쉼 없이 오토바이로 누볐다. 돈도 어느 정도 모았다. 본업으로 돌아와 중국집을 차렸다. 하지만 본전도 못 건지고 맨몸으로 나왔다.
폭염 속 목숨 내놓고 달리는 배달앱 라이더
마흔 중반의 나이에 그는 다시 배달을 시작했다. 달라진 게 있다면, 앱을 쓴다는 점이다. 늦은 나이에 쉽진 않았다. 플랫폼에서 일하면 자유로울 줄 알았다. 출퇴근 시간이나 사장의 지시가 온전히 드러나는 중국집 일과 달리 배달앱은 이런 지시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무언의 지시는 존재했다. 성희 씨가 자유롭지만은 않다고 느끼는 이유다.
게다가 플랫폼에서는 고용의 한계가 없었다. 누구나 일할 수 있는 구조다. 특별한 기술도 필요 없다. 불특정 다수에게 일거리를 뿌리면 알아서 일하는 식이 된다. 최근에는 배민커넥트 등 자전거, 도보로 배달하는 이들도 크게 증가했다. 한국노동연구원이 2019년 12월 발간한 ‘배달앱 확산이 고용에 미치는 영향’ 보고서를 보면, 국내 배달원 종사자는 13만 명에 달하고, 이중 배달대행업체에 종사하는 배달원 수는 약 8만3000명(64%)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됐다. 특히 배달의민족이나 요기요 같은 배달앱이 도입된 이후에는 약 3만3000명의 배달원이 추가로 고용된 것으로 추정했다. 자연히 이 씨 같은 전업 오토바이 배달원들에게 들어오는 수입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최근 배달앱에서는 단거리 배달을 도보나 자전거로 넘긴다. 오토바이 배달원들에게는 장거리 콜을, 그것도 단 건만 배달하도록 하고 있다. 이 씨 같은 배달원의 경우, 콜 배정에 불이익을 받고 수익도 상당히 감소하는 상황이다. 오토바이 배달에서 도보, 자전거 배달로 넘어가는 기사들도 상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씨는 이제 나이가 있는 만큼 안정적으로 일하고 싶다. 여러 차례 배달앱에 직고용을 신청했으나 번번이 거절당했다. 적게 벌더라도 안정적으로, 다치지 않고 일하고 싶은 그다. 그러나 그나마 있는 직고용 배달원도 줄인다는 이야기가 나돌았다. 오십이 넘은 이 씨는 오늘도 폭염 속에 목숨을 내걸고 하루 10시간씩 배달 일을 하고 있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