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화폐에서 기본소득으로
2008년 미국 발 세계 금융위기는 김종철이 '성장시대의 종언'을 확신한 결정적 계기였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가 순환경제로의 전환을 모색하기 시작한 것은 이보다 훨씬 이전이었다. 1996년 지역화폐의 발견이다. 지역화폐는 정부화폐와 같은 공공화폐다. 즉 은행화폐와는 달리 이자가 붙지 않는, 순전히 교환수단으로서의 돈인 것이다.
김종철은 2013년 곽노완, 강남훈과의 기본소득 좌담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2009년 기본소득운동을 알게 된 그가 2012년 녹색당을 통한 정치 참여에 나서기까지에는 중요한 현실적 계기가 있었다. 2010년 6월 지방선거에서의 무상급식 돌풍이었다. 지방선거 직후 향린교회에서 가진 '돈과 자유 - 배당경제학에 대하여' 강연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2010년 지방선거와 기본소득
실제로 2010년 지방선거 이후 한국 사회의 분위기는 기본소득의 실현이 가능할 것처럼 흘러갔다. 2011년 가을 오세훈 서울시장이 무상급식을 거부하다 결국 시장직을 물러나는 사건이 벌어졌고, 2012년 봄에는 반값 대학등록금 요구가 거셌으며, 그해 대선에서는 문재인, 박근혜 후보 모두 '경제민주화'를 주요 공약으로 내세웠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김종철은 기본소득의 정치적 실현이 가능하다고 판단했을 법하다.
기본소득 요구는 한국만의 고립적 현상이 아니었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독일의 해적당, 그리스 시리자, 이탈리아 오성운동, 영국 노동당 등이 기본소득을 정치적 과제로 내세우고 있었다. 유럽에서는 이미 1986년 기본소득유럽네트워크(BIEN)가 결성돼 기본소득과 관련한 연구와 담론 개발이 진행되고 있었고, 2004년 바르셀로나 10차 대회를 계기로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BIEN)로 확대됐다.
사실 미국에서도 민권운동의 절정기였던 1960년대 후반에는 기본소득이 실제 정책으로 채택되기 일보 직전까지 갔었다. 강남훈에 따르면 민권운동가 마틴 루터 킹 목사가 1968년에 계획했던 '빈자들의 행진(Poor People's Campaign)'이 바로 기본소득 운동이었다. '모든 미국 국민에게 기본소득을 보장하라'는 것이 이 운동의 핵심 요구였다.
킹 목사는 암살당하기 직전 마지막 연설문에서 "오늘날 사람을 달에 보내는 세계 최고의 부자 나라에 하나님의 자녀들을 지구상에 두 발로 서게 만들 만큼(기본소득을 보장할 만큼) 충분한 돈이 있다"며 기본소득을 요구했다고 한다. 킹 목사의 주장 이후 폴 사무엘슨, 존 케네스 갈브레이스, 제임스 토빈 등 경제학자 1200명이 존슨 대통령에게 기본소득을 촉구하는 공개서한을 보내기도 했다.
당시 미국에서 논의됐던 기본소득은 일정 소득 미만의 가구에 정부가 현금을 지급하는 마이너스 소득세 형태였다. 1969년 8월 닉슨 대통령이 가구당 연간 1600달러를 보장하는 기본소득 정책안을 제출했다. 이 법안은 의회에서 두 번 논의 끝에 하원을 통과했으나 상원에서 부결됐다(1972년). 1972년 대선에서 민주당 맥거번 후보도 1인당 1000달러 기본소득 공약을 했다. 즉 1970년대 초까지는 민주, 공화 양당 모두 기본소득을 지지했던 셈이다. 그러나 이후 워터게이트 사건의 정치적 혼란을 거쳐 1980년대 신자유주의 시대가 시작되면서 기본소득은 잊혀졌다. 강남훈은 "만약 (그때 기본소득 법안이) 통과됐다면 오늘날 미국은 전혀 다른 나라가 됐을 것"이라고 말한다.(<녹색평론> 131호 25쪽)
2010년 6월 향린교회 강연 이후, 특히 2012년부터 김종철은 '녹색당 전임강사'를 자처하며 화폐제도 개혁과 기본소득의 중요성을 설파하는 강연을 수없이 많이 했다. 그의 논지는 이제 성장시대는 끝났으며 따라서 성장에 의한 고용 확대도 불가능하다는 것, 그러므로 고용과 소득을 분리해 모든 국민에서 기초 생활을 위한 기본소득을 보장해야 하며 이는 국민의 당연한 권리라는 것, 그리고 화폐금융제도는 자본주의체제의 가장 중요한 공유자산이며 이 제도는 일부 금권세력의 이윤 축적이 아니라 모든 국민의 인간적 생활을 보장하는 방향으로 개혁되어야 한다는 것 등이었다.
또한 <녹색평론>을 통해 기본소득 논의를 계속 이어갔다. '기본소득, 쟁점과 제언'(135호 2014년 3/4월호)을 비롯해 147호(2016년 3/4월호)에서 153호(2017년 3/4월호)까지 일곱 회에 걸쳐 토마스 페인, 헨리 조지, 클리포드 더글라스, 에리히 프롬 등 기본소득 사상가들을, 161호(2018년 7/8월호)에서는 '핀란드, 캐나다, 미국의 기본소득 실험'을 소개했으며, 169호(2019년 11/12월호)에서는 '농민기본소득이 나라를 살린다' 주제의 좌담을 갖기도 했다.
물론 후쿠시마 원전 사고(2011년 3월)와 세월호 사고(2014년 4월), 그리고 2016년 초 '기후변화, 옳게 대응하고 있는가' 특집(146호) 등 당대의 핵심 현안에 대한 대응에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특히 2015년 3/4월호(141호)에서 '민주주의와 시민의회' 특집으로 민주정치에 눈을 돌린 김종철은 2016년 가을 촛불시위 이후 2017년에는 민주주의 문제에 전념하게 된다. '촛불과 시민권력'(152호 2017년 1/2월호), '시민주권시대를 향하여'(153호), '시민의회를 생각한다'(154호), '공론조사, 왜 중요한가'(156호) 등이 그것이다. 대의민주주의가 아닌 시민의회, 숙의민주주의 등 시민의 뜻이 제대로 반영되는 진정한 민주주의가 확립된다면 기본소득의 실현이 가능할 것이라는 믿음도 있었을 것이다.
촛불시위와 민주주의
대부분의 한국 시민들이 그랬던 것처럼 김종철에게도 2016년 10월 말 촛불시위에서 2017년 봄 박근혜 탄핵과 문재인 정부 탄생, 그리고 2018년 남북 정상회담과 북미 정상회담에 이르는 기간은 근래 들어 가장 희망찬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진정한 민주주의 실현과 함께 한반도의 비핵화, 그리고 모든 시민들의 인간다운 삶의 실현이 손에 잡힐 듯한 시기였다.
그러나 이러한 기대와 희망은 2019년이 되면서 사라지기 시작했고, 김종철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녹색평론> 165호(2019년 3/4월호) 머리글 '침로를 잃은 민주정부, 어디로 갈 것인가'에서 문재인 정부에 대한 실망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문재인 정부의 가장 큰 문제점은, 지금은 경제성장시대가 끝났거나 끝나가고 있다는 객관적인 세계정세에 대한 명확한 인식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다.
갈수록 경제 규모와 소비 생활이 축소되어 갈 것이 분명한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불평등의 해소와 고르게 나누는 지혜와 용기,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혼란 없이 시민적 합의 하에 진행해 나갈 수 있는 민주정치의 공고화"라는 것이 김종철의 정세 판단이자 대응 방향이었다. 하지만 이는 한국의 현실 정치인들에게 '쇠귀에 경 읽기'였다. 경제성장과 일자리 창출에 대한 정치인들의 믿음은 신앙과도 같다. 이는 이번 대선에서도 여지없이 드러나고 있다. 거의 모든 후보들이 기본소득에 대해 '재원 마련 등 현실성이 없다'는 이유로 그 실현 가능성을 깎아내리고 있는 데서 잘 드러난다.
이것은 전적으로 사후적, 개인적인 추정이지만, 대략 이 시점에서 김종철은 공적 지식인으로서 자신의 역할이 다했음을 어렴풋이나마 느꼈던 것은 아닐까. 그해 4월과 6월에 자신의 마지막 저서들인 <대지의 상상력>과 <근대문명에서 생태문명으로>를 펴낸 것도 어쩌면 자신의 공생애를 정리한다는 뜻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신념의 인간, 외로운 예언자
김종철은 민중적 입장의 지구적 시야를 가진 신념의 지식인이었다. 그의 세계 인식과 문제의식이 아직은 널리 공유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외로운 예언자라고 할 수 있다. <근대문명에서 생태문명으로>에 실린 '협동적 자치의 공동체를 향하여'(74-82쪽)에는 김종철이 지향하는 이상세계의 모습이 실려 있다.
그는 우선 "지금 우리가 직면한 생태적 위기는 단순히 자원과 에너지를 낭비적으로 소비한 결과라고 할 수는 없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세계관의 문제, 세계인식의 문제이다. 무엇이 정말 좋은 삶이고, 인간다운 삶인가, 혹은 어떤 사회가 진실로 선진사회인가 하는 것에 대한 기준이 오로지 서구 근대적 발전사관에 의거해 있을 때, 위기 상황을 근본적으로 극복할 수 있는 길은 사실상 없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한다.
"지금 필요한 것은 이 상호부조의 경제를 시급히 복구하려는 노력이지, 상황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놓은 글로벌 자본주의시스템에 대한 계속적인 굴종은 아닐 것"이다.
그는 이어 1차 대전 직후 짧은 순간 존립했던 바이에른 소비에트공화국 혁명정부의 문화담당 각료로 활동하던 중 반동세력에게 살해당한 문예비평가이자 사상가 구스타브 란다우어(1870~1919)의 말을 빌려 사회주의란 '새로운 인간관계'라고 규정한다. 사회주의의 기초는 생산력의 발전이 아니라 인간의 사회적 관계라는 것이다. 국가란 "하나의 조건, 어떤 종류의 인간관계이자 행동양태"이며 우리는 지금과는 "다른 종류의 인간관계를 형성함으로써, 즉 우리가 서로서로에 대하여 종래의 방식과 다르게 행동함으로써" 지금 당장 국가의 지배를 벗어나거나 심지어 국가를 폐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협동적 자치의 공동체이다.
1980년대 중반 이후 김종철은 서구가 지배하는 근대 산업문명이 조만간 파탄에 직면할 것이라는 확신을 품고 살아 왔다. 이러한 위기의식은 기후위기, 금융위기, 팬데믹 등으로 점차 현실화되고 있다. '소멸 위기의 지구 문명'이란 확신을 가진 지식인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무엇이었을까. 2015년 7월 17일 지역재단 강연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김종철은 <녹색평론>을 딱 30년, 그러니까 180호까지 만들고 호랑이 등에서 내려오려 했다고 한다. 그는 173호에서 내려왔다. 그것도 지구의 비상사태인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에서. 어쩌면 그의 사상과 지혜가 가장 필요한 시점에서 그는 떠났다. 하지만 그가 뿌린 사상의 씨앗은 새로운 문명으로의 전환을 위한 소중한 밀알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김종철의 뿌린 사상의 씨앗을 싹 틔우고 꽃 피우는 일은 우리들의 몫이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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