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나이 60 중반에 이르러 얼추 생각해 보니 내 인생사는 스무살 남짓 인 77년 겨울 전남대 2학년 겨울방학 때 탈춤을 배우고부터 결정된 것 같다. 대학시절 2번의 수배와 감옥, 제적이 이와 연관이 있고 지금까지의 직업과 미학적 관점이 또한 이와 깊은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당시 나는 감옥에서 석방된 민청학련 선배들의 지도로 사회과학 언더 학습모임에 참석하고 있었고 자연스럽게 참여문학과 해직교수들의 강연을 통해 문화예술을 통한 대중 의식화와 행동적 앙가주망을 모색하고 있었다.
나를 사로잡은 첫 단초는 78년 가을 농민운동의 기운이 가장 크게 일던 해남에서 벌어진 추수감사굿이었다. 당시 해남 보성 등지에는 학생운동 출신인 김남주(작고, 시인), 박형선(민청, 건설사)과 현지의 정광훈(작고, 전국연합 의장), 윤기현(아동문학), 조계선 등이 의기투합해 농민운동에 열심이었다.
때마침 소설가 황석영이 해남으로 내려와 “장길산”을 집필하고 있었고 죽이 맞은 황석영과 김남주는 해남읍 서림 당산마당에서 신명난 굿판을 벌인 것이다. 서울에서 ‘한두레’팀이 내려오고 광주에서도 오랜만의 굿판을 보기 위해 민청 선배들과 학내 운동권 학생들이 떼거리로 몰려갔다.
읍내 한복판인 서림 숲에는 깃발과 현수막이 나부끼고 막걸리 동이도 짝 깔리고 김남주 시인의 자작시 낭송, 판소리 열사가, 한두레의 ‘진오귀굿’등이 펼쳐졌다. 새마을운동으로 사라진 풍물도 등장하고 오랜만에 현실을 풍자하는 걸판진 굿을 본 참석자들은 본행사가 끝나자마자 깃발과 현수막을 들고 풍물과 탈바가지를 앞세워 해남 군청까지 신명나게 길놀이 행진을 하였다. 기습적인 예술적 시위에 행정력도 어쩔 수 없이 용인하는 꼴이 됐다.
여러 장르의 연희 양식과 선전방법이 동원되어 당대의 진정한 민중문화가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역동적으로 제시한 한판 굿이었다. 이 때 한두레 모가비로 왔던 채희완 선생은 뒷풀이 때 시식한 해남 세발낙지맛이 평생 잊을 수가 없다면서 몇 차례 입맛을 다셨으니 그 또한 그날 행사가 옹골졌던 모양이다.
나는 이 때의 대동굿이 만들어내는 열기와 신명, 현실 풍자에 푹 빠져 바로 탈춤부터 배우기 시작했다. 바야흐로 극회 ‘광대’의 5.18 문화선전대 활동으로 이어지는 광주의 본격적인 민중문화운동이 태동된 것이다.
우리는 77년 겨울 광주YMCA 탈춤강습회에서 봉산탈춤 전수조교로부터 기초를 맛본 수료생들을 중심으로 ‘Y가면극회’를 조직한 후 ‘한두레’팀의 지도로 이론과 실기를 쌓는 두 달간의 강행군을 했다.
당시 한두레에서 순차적으로 내려와 지도한 사람은 채희완(전 부산대 교수)의 지휘하에 김봉준(화가), 류인택(예술의전당 사장), 강정례(이대 민속극연구회 출신), 임명구(전 민예총) 등이다.
지금도 44년 전 그때를 생각하면 웃음과 치기, 열정과 남용, 남루와 비겁 등 온갖 감정과 추억이 종종 아련하게 떠오르곤 한다.
기초에 이어 봉산 탈 전체를 제작했다.
알통이 밴 다리로 숨을 헐똑거리며 도약하고 나면 숨소리조차 내지 말라고 나긋이 타이르는 채희완 훈장의 주문은 뒷풀이 자리에서 가무와 민중미학 설교로 이어지면서 우리는 이미 채교주의 교도가 돼 가고 있었다.
당시 학생신분인 우리로서는 주머니가 비어 막걸리 값을 대느라 세이코 시계를 전당포에 맡기기 일쑤였고 심지어는 탈 제작을 위해 양동시장에서 재료를 사면서 봉준이 형의 차비까지 털었던 기억이 난다.
78년 새학기 되면서 ‘Y가면극회’는 학교에 뿌리를 내리기 위해 어렵게 2명의 지도교수를 모셔 전남에서 최초의 대학탈반인 ‘전남대 민속문화연구회’를 등록시켰다.
당시 본인이 회장(사회학 3)을, 부회장은 김윤기(법학 3)가 맡았는데 본격적인 공연을 한 번도 하지 못하고 똑똑한 후배들만 잔뜩 모아놓고 6월 ‘민주교육지표선언’으로 회장, 부회장이 주동으로 연루돼 도피하게돼 탈반은 창립 3개월만에 해체 상태가 됐다. 다행이 똘똘한 후배들이 많은데다 윤만식(전 민극협 이사장)과 전용호(“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공동저자)가 용의주도하게 헌신하여 재건되었다.
나와 김윤기는 서울로 도피를 와 수배가 느슨해지자 조경만(전 목포대 교수) 등과 한국민속촌 농악을 배우기도 했으며, 나는 아예 민속촌으로 위장 취업해 그곳에 먼저 와 있던 황선진(전 애오개 소극장) 선배와 함께 2달간 농악을 배우다 애석하게 ‘농자천하지대본’깃발을 잡고 있던 수준에서 체포되기도 했다. 당시 정인삼 단장은 연습에 열심히던 나를 보고“한국에 장구잽이 한 명 나오겠네”라고 칭찬하기도 했으니더 머물렀으면 지금쯤 풍물 명인으로 행세하지 않을까.
78년 7월부터 79년 9월까지의 서울 도피생활 중에도 나의 관심사는 오직 문화운동이었다. 방학기간에 양주별산대 전수차 온 전남대 탈반 후배들을 만나러 수배 중임에도 김윤기와 막걸리 통을 메고 전수관을 찾아가기도 했다.
주로 채희완 선생을 만나 김민기 등 한두레 선배들과 술자리도 하고 서교동, 보문동 연습실에도 갔으며, 단편영화 ‘삼포가는 길’ 촬영현장도 동행해 조명 반사판을 들었던 기억이 있다.
도피생활 중 고향에서 반가운 소식도 들려왔다. 78년 11월 계림동 천주교회에서 ‘전국쌀생산자대회’가 열려 전국에서 모인 5백여 농민들이 전라도 마당굿의 효시로 꼽히는 ‘함평고구마’공연에 열광했다는 것이다.
전남대 연극반과 탈반이 모여 ‘함평고구마투쟁’의 승리를 극화한 이 작품은 풍부한 민중의 해학과 풍자의 극치를 보여주면서 이후 마당긋 운동의 기폭제가 됐다는 평가가 있다.
마당굿을 비롯한 민중문화운동에 대한 열기와 관심이 고조되면서 광주의 운동권도 윤환봉 선배의 현대문화연구소와 김상윤 선배의 녹두서점을 중심으로 성원과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10.26 이후 구속에서 풀려난 나와 김윤기도 다시 문화운동에 복귀하고 그동안 역량이 성숙된 광주의 연희패는 농민운동 등 현장의 중심의 복격적인 사회문화운동 전문집단 조직화에 나섰다.
바로 80년 1월 전남대 민속문화연구회와 연극반 출신이 중심이 되고 조선대 탈반, 전남대 국악반 출신 일부 회원이 하나로 결집돼 지역 마당굿 운동의 본류를 여는 극회 ‘광대’가 탄생된 것이다.
광대는 광주YWCA에 적을 두고 곧바로 공연작품을 준비해 창작마당굿 ‘돼지풀이’를 광주YMCA 무진관에서 공연했다. 이 작품은 회원들의 공동창작, 공동연출 작품으로 주기적인 농산물 파동을 극복하는 농민들의 한과 의지를 형상화한 작품이다. 마당극 공연에 앞서 극회 광대 창립식에서 양희은, 임진택, 서울대 노래패 ‘메아리’, 김영동 등 찬조자들의 공연이 진행됐으며 서울 문화운동 인사들도 대거 광주로 내려와 이날 공연에 동참했다. 당시 장만철(영화감독)은 ‘창작과 비평’기고를 통해 이날의 열기와 반응을 프로복싱 타이틀 매치 경기장 같았다고 평한 것으로 기억된다.
광주 운동권의 전폭적인 뒷바라지와 유신 말기의 저항의식이 맞물려 2천여 관중이 한꺼번에 관람한 이날 공연은 전남지역 민중문화운동의 한 획을 그으며 이후 무안, 강진 등지에서 수차례 농촌현장 공연을 계속하며 민중연대의 힘을 축적해 갔다.
그러나 극회 ‘광대’는 황석영의 재정 출연으로 광주시내에 마련한 전용 소극장 개관기념 작품인 ‘한씨연대기’ 연습 도중 회원 대다수가 5.18 문화선전팀으로 참여해 역사적인 절대절명의 대동판굿을 벌이게 된다.
나는 극회 광대 활동과 학내 후배들 지도를 겸해 이른바 80년 민주화의 봄을 부지런히 뛰어다녔다. 학원 자율화가 진행될 시기 예비 복적생 모임에 속한 나는 그동안 금기시됐던 탈춤반 공연의 해금을 맞아 봉산탈춤 일부 과장과 “소리굿 아구” 공연을 대학 내에서 정식으로 공연하면서 대학과 사회의 민주화 염원을 결집해 나갔다.
대학 풍물도 다시 살려냈다. 당시 전남대는 전남대 농악반이 유일한 풍물패였으나 해체된 상태였다. 용인 민속촌에서 농악 기초를 배우고 그 역동성을 알기에 농대 학회를 찾아가 풍물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재 창립의 계기를 만들었다. 전남대 농악반은 10일간 합숙으로 급조된 팀웤으로 5.18의 서막을 열었던 ‘전남 민족 민주화 대성회’의 선두에 서서 시위대를 이끌었으며 지금도 매년 5.18 전야제의 5월풍물대로 맹렬히 활동하고 있다.
‘선전과 선동은 혁명의 시작이고 끝이다.’
문화운동 단체인 극회 광대와 노동야학팀인 들불야학 사람들은 5.18에서 이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광대는 도청앞 ‘궐기대회’를, 들불은 ‘투사회보’를 전담했다. 연설과 토론을 중심으로 공연형식을 취한 궐기대회와 인쇄매체인 투사회보는 항쟁과정에서 대중선전과 선동의 두 축을 이루었다. 들불 야학팀에도 전남대 탈반 출신이 다수 강학으로 참여하고 있어 광주5월 항쟁과 전남대 탈반의 역할은 뗄수 없는 역사적 사실인 것이다.
궐기대회는 연희, 미술, 노래, 대자보, 연설문, 인쇄, 방송, 성금 모으기, 전기시설 등 여러 분야의 유기적이고 조직적인 협력 속에서 이뤄졌다. 23일부터 26일까지 5차례 실시된 궐기대회는 매일 같은 형식을 되풀이할 수 없는 데다 공수부대 재진입이 예고된 상황에서 시민들의 의지를 결집하고 감동을 극대화해야만 했다. 의례, 상황보고, 시국연설, 호소문 낭독, 노래, 화형식 등 그때 그때 상황에 맞게 현장에서 즉석 연출과 연기, 문안작성이 이뤄졌다.
이런 극적 요소의 필요에 광대회원들은 자신들의 기량을 온 몸으로 발휘했고 시민들은 거대한 강물이 되어 어깨동무로 하나의 대열을 만들어 흘러갔다.
한 예를 들면, 모두가 아는 ‘아리랑’노래도 광장을 울음바다로 만들었다.
“나는 우리의 대표적 민요 아리랑이 갖는 그토록 피끓는 전율을 광주에서 처음 느꼈다. 도청 앞 광장으로 손에 손에 태극기를 흔들며 모여드는 군중들이 부르는 아리랑 가락을 깜깜한 도청 옥상에서 혼자 들으며 바라보는 순간, 나는 내 핏속에 무엇인가 격렬히 움직이는 전율을 느끼며 얼마나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당시 도청에서 취재하던 동아일보 김충근 증언. 한국기자협회 외, 1997:215~6)
이렇게 궐기대회는 유신치하에서 힘겹게 쌓아올려 축적된 당대의 문화운동 역량이 총동원됐으며 백척간두의 극한 상황에서 새로운 문화행위 양식과 전술이 보태지면서 혁명적 게릴라 문화양식을 탄생시켰다.
그리고 많은 지식인과 양심적 시민들의 가슴에 씻어지지 않는 부채의식을 남기면서 한국의 지성계와 문화예술계는 충격과 함께 새로운 모색에 들어갔던 계기가 80년 5.18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형성된 5월의 문화는 80, 90년대 거대한 민족민중문화운동으로 승화됐다. ‘임들을 위한 행진’으로서.
덧붙이면 ‘임을 위한 행진곡’도 전남대 탈춤반과 극회 ‘광대’활동의 연장선에서 제작 배포되었다.
80년 10월 구속에서 풀려난 나는 강제징집을 당했고 82년 휴가를 나와 황석영 선생 댁에 인사차 들렸다가 광대 회원들이 다수인 노래 제작팀을 만나 노래와 꽹가리 반주를 하게 됐다. 83년 제대를 앞두고 전방에서 녹화사업을 받았던 나로서는 이 때도 군인신분으로서 겁없이 광주의 민중문화운동에 참여했던 것이다. 훗날 민중 애국가로 불려질 지는 까마득히 모르면서.
70년대 후반과 80년대 전반의 시대적 질곡을 관통했던 나로서는 탈춤을 중심으로 시작한 민중문화운동의 저력과 민족 미학의 시각이 그 때를 살아오게 한 힘이었으며, 지금도 그 연장선에서 살고 있음을 확인하는 요즘이다.
이 글은 본인의 저서 <5월의 문화예술>(2001. 도서출판 샘물)에서 발췌, 보완, 재구성한 것 입니다.
김선출 이력
-전남대 사회학과 76학번. 85년 졸업. 목포대 대학원 고고인류학 수료
-전남대 민속문화연구회, 영화패 아리랑, 극회 광대 창립
-광주 민중문화운동협의회, 소극장 일과 놀이, 광주민예총, 광주전남문화연대 활동
-무등일보, 광주매일에서 신문기자
-광주정보문화산업진흥원 본부장,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상임감사 역임
-전남문화재단 대표이사 21년 8월 취임
[탈춤과 나] 원고 청탁서
새로운 언론문화를 주도해가는 인터넷 신문 <프레시안>(http://pressian.com)이 <사)민족미학연구소>와 <창작탈춤패 지기금지>와 함께 탈춤에 관한 “이야기마당”(칼럼 연재)을 기획하고 있습니다.
젊은 시절 탈춤이 좋아서, 쏟은 열정이 오롯이 담긴 회고담이거나 증언, 활동일지여도 좋고 아니면 현금 문화현상에 대한 어기찬 비판과 제언 형식의 글이어도 좋습니다.
과거 탈춤반 출신의 세대에게는 아련한 추억을, 신세대들에게는 다소 생소한 전통문화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글 내용이면 충분할 것입니다. 한 때나마 문화패로서 탈꾼으로서 개성넘치는 숨결을 담아내면 참 좋겠지요.
글 말미에는 대학탈춤패 출신임을 밝혀주십시오(대학, 학번, 탈춤반 이름 및 현직)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사진(1-5매)이나 시청각 자료도 곁들여 캡션을 달아 보내주시면, 지난 기억이 되살아나 더욱 생생한 느낌을 전달해줄 것입니다.
알뜰살뜰한 글과 사진제공에 대한 원고사례비는 제공되지 않고, 다만 원고가 묶여져 책으로 발간될 때 책 두 권 발송으로 사례를 대신합니다.
제 목 : [탈춤과 나] (부제로 각자 글 나름의 자의적인 제목을 달아도 좋음)
원고 매수 : 200자 원고지 15-30매(A4 3-5장)
원고 마감 : 2021년 9월 30일
(사진 등 시청각 관련 자료 캡션 달아 첨부하면 더욱 좋음)
보낼 곳 :
(사) 민족미학연구소 (namihak@hanmail.net) 채 희 완 (bullim204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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