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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연, '걸리버'와 '장 발장' 사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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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김동연, '걸리버'와 '장 발장' 사이에서

[김종구의 새벽에 문득]

지금부터 약 3년 전인 2018년 8월에 김동연 당시 경제부총리를 만난 적이 있다. 그와 장하성 청와대 정책실장 간의 이른바 '김 앤 장 갈등'이 정점으로 치달을 무렵이었다. 김 부총리에게는 약간 묘한 구석이 있었다. 보통의 경제관료 같으면 경제 문제에 관한 자신의 소신, 업적 등을 열심히 설명하는 법인데 그는 별로 그렇지 않았다. 문재인 정부의 전반적인 정책 기조에 대해 "노무현 정부 시절 내가 주도해 만든 국가 장기발전전략 '비전 2030'에 이미 모든 것이 들어있다"는 식의 이야기로 그쳤다.

그는 경제 문제보다는 소설 등 다른 이야기를 많이 했다. <레 미제라블>에서 주인공 장 발장이 위장 신분으로 시장을 하고 있을 때 다른 사람이 장 발장으로 오인돼 체포된 상황에서 겪는 내면의 풍경을 열띠게 설명했다. "법정에 자진 출두해 자신의 신분을 밝힐 것인지 아니면 그냥 모른 척할 것인지 고뇌와 번민을 하는 장면이 원본에는 무척 길게 나옵니다." 그날 선물로 준비한 책도 특이했다. 자신이 쓴 <있는 자리 흩트리기>와 함께 조너선 스위프트의 소설 <걸리버 여행기> 완역판을 선물로 건넸다. "부총리께서는 지금 본인이 소인국의 난쟁이들한테 둘러싸인 처지라고 여기시는 건가요?" 이런 물음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그렇게도 해석할 수 있다니 언론인들은 참 상상력이 대단합니다."

그날 만남에서 받은 인상은 다소 복합적이었다. 가슴에 품은 야망이 간단치 않은 사람으로 보였다. 자신의 인문학적 교양을 과시하며 '나는 보통의 공무원들과 다르다'는 인상을 주려 한다는 느낌도 들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첫 만남의 인상이 과히 나쁘지는 않았다. <걸리버 여행기>와 <레 미제라블>이 상징하는 이상주의 내지는 진보적 휴머니즘이 어른거린 것도 한 이유일 것이다. <걸리버 여행기>는 풍자를 통해 불합리하고 불안한 현실을 공격하며 건전한 이성과 상식이 작동하는 정치 세계를 꿈꾼다. <레 미제라블>은 인간을 비참하게 만드는 세상의 폐해와 위선을 고발하며 '비참한 사람들'에게 밝은 빛을 주려는 이상을 담고 있다. 두 소설 모두 현실의 괴로움과 번민, 사회적 부조리와 모순을 개혁하려는 실천의식과 비판적 사유, 세상의 개조에 관한 책이다. 그래서 이날 김 부총리와 만난 뒤 내린 결론은 이랬다. '앞으로 이 사람은 정치를 하겠구나.' 그 뒤 차기 대선 전망을 놓고 지인들과 간혹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으면 잠재적 대선 후보 중 한 명으로 김 전 부총리를 꼽기도 했다. 예상대로 그는 대선 채비를 하고 있다.

현 정부에서 고위 관료를 지내고 대선 준비를 하고 있다는 점에서 김동연 전 부총리 역시 윤석열 전 검찰총장, 최재형 전 감사원장과 넓게는 같은 범주 안에 들어 있다. 그러나 여러 면에서 그들과는 크게 다르다. 무엇보다 현직에서 옷을 벗고 곧바로 대선에 뛰어드는 철면피한 모습은 아니다. 무작정 현 정권을 비판함으로써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다지려는 비겁함도 없다. 그는 윤 전 총장과 최 전 감사원장에 대해 "현 정부와 대립각을 세웠다는 이유만으로 대권 후보가 되는 것에 대해 국민이 어떻게 평가할지 모르겠다. 현 정권에 각을 세운다고 국가경영을 잘하겠는가"라고 일침을 놓은 바 있다. 맞는 말이다. 그가 애독한 <레 미제라블>을 빌어 인물평을 하자면, 윤석열 전 총장은 법만을 최고인 것처럼 여기는 냉혹한 '자베르 형사' 같은 인물이다. 최 전 원장은 어린 코제트를 착취해 단물을 빼먹고 이득만 챙기는 비열한 인간 '테나르디에'와 비슷하다고나 할까. 테나르디에는 워털루 전투에서 숨진 병사들한테서 물건을 훔치는 인물이기도 한데, "전쟁이라 부르는 저 황혼이 빚어내는 박쥐"라는 묘사야말로 최 전 원장에게 매우 합당해 보인다.

김 전 부총리가 최근 펴낸 <대한민국 금기깨기>를 읽어보았다. 국가를 개조하고 새로운 미래를 열어보고자 하는 열정과 진정성 등이 충분히 느껴졌다. 그가 내세우는 국가경영의 핵심 개념인 '기회복지국가'도 눈여겨 볼만한 대목이 많았다. 그는 기득권 혁파와 사회적 합의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합리적 토론과 논의가 아니라 '정쟁'이 난무하는 현실을 바꿔야 한다고 누누이 강조한다. 공감이 가는 말이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그의 대선 출마와 관련해 가장 의구심이 드는 게 바로 그 대목이기도 하다. 그는 과연 '정쟁 탈피'를 위해 어떤 능력을 발휘할 수 있을까. 그는 평생 관료로 살아오면서 정치적 조정 능력을 발휘할 경험을 해보지 못했고, 고도의 정치 행위를 수행할 수 있는 수업도 별로 받은 적이 없다. 냉정히 말하자면 김 전 부총리가 쓴 책에 나오는 비전과 구상 정도는 웬만한 정치권 대선 주자들은 모두 비슷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당위'보다는 '실천 능력'인데 그 대목에서 그는 전혀 검증되지 않았다.

그를 만나면 묻고 싶은 게 또 하나 있다. 정통 관료 출신으로서 관료주의 문제에 대한 생각이다. 그의 책 밑바탕에는 '관료들은 잘하는데 정치가 문제다'는 인식이 흐르고 있다. 과연 그럴까. 그는 공무원 퇴임 뒤 민심 탐방에서 얻은 깨달음에 대해 많이 이야기했다. 하지만 정작 대다수 공무원들은 예나 지금이나 '삶의 현장'에서 유리된 채 책상머리 행정, 관료이기주의적 행정에 몰두하고 있다. 관료들의 횡포와 오만함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울분을 토로하고 있는가. 어느 학자의 지적처럼, 우리나라 관료들은 군사독재체제 아래 군림형 관료주의로 시작해 문민화 이후 보신형 관료주의, 그리고 이제는 자신들이 모든 것을 다 안다는 전문가적 오만함까지 겹쳐 있다. 이런 관료주의 폐해에 대한 성찰과 반성, 혁파 의지 없이 나라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가는 것은 가능한 일일까.

김동연 전 부총리를 둘러싼 세간의 관심은 실제로는 이런 콘텐츠가 아니라 앞으로 택할 정치적 행로에 집중돼 있다. 그를 두고는 "여야로부터 동시에 러브콜을 받고 있다"는 말도 무성하다. 그런데 여당은 이미 대선 후보 선출을 위한 경선을 진행하고 있다. 야당에는 최재형 전 감사원장에 이어 윤석열 전 검찰총장도 입당해 기존의 당내 주자들과 본격적인 레이스를 시작했다.

김 전 부총리의 정치적 성향은 기본적으로 여당도 야당도 아닌 지점인 듯하다. "국민의힘은 퇴행적이며 산업화의 기득권 세력이고, 민주당은 혁신이 필요한 민주화의 기득권 세력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와 잘 소통하고 있다는 한 민주당 의원이 전한 그의 생각이다. 김 전 부총리가 '반국비민'인지 아니면 '반민비국'인지는 알 수 없으나 양당에 모두 부정적인 태도를 갖고 있음은 분명해 보인다. 흥미롭게도 그가 애독한 <걸리버 여행기>도 당시 영국 정치가 토리당과 휘그당으로 양분된 상황에서 당파적 대립에만 몰두하는 정치적 현실을 통렬히 비판한 책이다. 1권의 '릴리퍼트'(소인국)에 나오는 높은 굽의 신을 신는 귀족(트라메크산)은 토리당을, 낮은 굽은 신는 귀족(슬라메크산)은 휘그당을 상징한다는 것이 정설이다. 김 전 부총리가 <걸리버 여행기>의 열렬한 애독자라면 높은 굽 정당이든 낮은 굽 정당이든 가지 않는 게 맞다. 그는 실제로 여야 어느 쪽과도 손을 잡을 생각이 없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만약 그가 국민의힘에 합류한다면 얼마나 블랙코미디가 될 것인가. 그는 <대한민국 금기깨기>에서 '첫 번째 좌절'인 '비전 2030'의 실패가 "세금폭탄"이라는 정치권의 주장에서 비롯됐다고 썼는데, 그런 비판으로 정쟁에 불을 붙인 것은 다름 아닌 지금의 국민의힘 전신인 한나라당이었다.

김 전 부총리는 <레 미제라블>에서 주인공 장 발장이 법정에 자진 출두해 자신의 진짜 신분을 밝힐지 말지를 번민하는 장면을 열띠게 설명했다. 그에게는 혁명의 물결이 넘실대는 생 드니 거리의 바리케이드 광경도, 장 발장이 평생 자신을 괴롭힌 자베르 형사를 용서하고 목숨을 살려주는 장면도 아닌, 주인공이 선택의 갈림길에서 망설이고 번민하는 장면이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 같다. 그것은 김 전 부총리 역시 망설이고 번민하는 인간형임을 자신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표현한 것은 아닐까. 그는 대선 출마 결심을 굳히고서도 아직도 여러 가지를 망설이고 있는 듯 보인다. '제3의 길'이라는 것이 말은 쉽지만 그리 녹록하지 않은 것이 현실이기도 하다. <레 미제라블>은 주인공이 끊임없이 두 개의 갈림길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 속에서 자신에 깃든 두 개의 다른 존재를 응시하는 모습, 그러면서도 결국 올바른 길을 선택하는 위대한 인간의 여정을 그린 대서사시다. 정치적 갈림길에 서 있는 김 부총리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할까. 그리고 그 선택은 진정 정의롭고 올바른 길이 될 것인가.

▲김동연 전 경제부총리(왼쪽)가 7월 29일 오후 경남 거제시 장승포동 거제수협 위판장에서 삼치를 들어 잡아보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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