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 나는 서울역 뒤편 일명 서부역에서 문산행 기차를 타고 짧은 여행을 하고 있었다. 대학에 들어온 지 겨우 2,3주 정도 되던 어느 날이었다. 퀴퀴하고 덜컹대는 기차가 제법 너른 평야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어느 역사(驛舍)에 도착한 기차가 다시 출발하기 위해 기적을 크게 내지르고 있을 때 우연히 쳐다본 단청색 곱게 칠한 역사가 왠지 차갑게 느껴졌다. 그리고 기차가 출발했다. 나는 읽던 책을 다시 펴들었다. 목근통신(1951년 수필가 김소운이 쓴 서간수필. ‘일본에 보내는 편지’라는 부제가 달렸으며 한국을 비하하는 일본인의 허위의식을 비판하며 한국에 대한 깊은 애정과 연민을 담겼음)이었다. 그리고 문득 아까 본 역사가 목조 건물이 아니라 시멘트에 단청색깔을 뒤집집어씌운 가짜라는 것을 깨달았다.
가짜가 진짜처럼 서 있었다. 부끄러움은커녕 명실상부한 진짜로 행세하고 있었다. 아무도 가짜가 진짜인지 진짜가 가짜인지, 어느 것이 진짜이고 어느 것이 가짜인지 말해주지 않았을 때였다. 목근통신은 다만 슬픈 자화상만을 이야기하고 있을 뿐이었다. 읽던 책을 덮고 나는 다시 아직 봄이 돌아오지 않은 들판을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이제 겨우 시작의 턱을 넘은 상태였다. 세상은 도무지 알 수 없는 대상인데, 나는 도전과 응전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아마도 토인비에게 베껴온 말투인 듯한데, 그가 즐겨 쓴 표제어를 따와 내 신조로 삼았던 것은 내가 까막고시(검정고시) 출신인 것과 무관치 않았을 것이다. 그래 한 번 해보자! 네가 건드리면 나는 싸운다. 그러나 문제는 무엇이 내 싸움의 대상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 세상은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 게다가 어느 것이 가짜인지, 어느 것이 진짜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분명 한참을 싸워 온몸이 멍든 것은 사실인데, 도대체 어디에서 누구에게 맞았는지 전혀 알 수 없는 형국이었다. 그럴 즈음 나는 문산행 기차를 타고 있었고, 목근통신을 읽고 있었다.
그리고 며칠 후, 습기로 눅눅하고 묘한 지하실 냄새가 짙게 배어 있는 사회과학관 지하 1층 가면극연구회에 들어갔다. 어쩌면 그곳에 내가 찾는 진짜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필연을 위장한 우연일 뿐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내 인생을 결정짓는 큰 요인 가운데 하나가 된 것은 우연이 아닌 필연이었다.
써클 룸(동아리 방)에 들어갔을 때 보기에도 인상적인 사람들(연극적으로 말하자면 성격배우에 해당하는 이들)은 그저 흘깃 쳐다만 볼 뿐 제각기 할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뭐가 그리 바쁘다고. 그 중 한 명이 물었다.
“뭐 하러 왔습니까?”
이런 황당한 경우가 있나! 쭈뼛거리며 들어오는 꼬락서니를 보면 모르나!
“저, 가면극연구회에 들어가려고 하는 데요”
“탈춤을? 왜 추려고 해?”
금세 반말이다. 게다가 탈춤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탈춤을 왜 추려고 하냐고 물으면 어떻게 하란 말인가? 모르니까 배우러 들어온 것이지. 그러나 생각해 보면 당연한 질문이 아닐 수 없다. 어떤 이유가 있으니 들어온 것은 분명한데, 콕 집어 이야기하자니 말문이 막힐 수밖에. 결국 주저하면서 꺼내 놓은 것이 또 목근통신이었다. 그 때는 가짜와 진짜 이야기가 아니라, 일제와 우리 문화 이야기였던 것 같다. 아마도 실제 내용은 없으되 말은 장황했을 것이다. 그리고 성격배우들은 듣는 둥 마는 둥하면서도 다 들어주었다. 그날 저녁 나는 처음으로 코가 비뚤어지도록 흠뻑 취했다. 쓴 소주와 라면, 신 김치.
다음 날부터 본격적인 춤 연습에 들어갔다. 방과 후는 물론이고 공강 시간에 써클 룸에 가면 언제나 선배들이 있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당시 2학년 선배들은 한 명씩 돌아가며 방을 지켰다고 한다. 그 결과 기말 성적에 ‘따불류(W: 출석 미달)’를 몇 개씩 차야만 했지만 후배들은 언제라도 와서 춤을 배울 수 있고,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춤은 봉산탈춤 기본이었다. 나를 포함한 1학년 5명은 하루 연습 시간 내내 한 가지 동작만 추고 또 추었다. 예를 들어 만사위를 배운다면 적어도 2시간 내내 만사위만 춘 셈이다. 주로 탈반 회장인 2학년 이태호 형이 직접 가르쳤는데, 특히 고개잡이가 일품이었다. 그러나 한번 생각해 보라. 1,2시간 내내 고개잡이를 연습하면 어찌 될까? 그것도 고개를 뚝 떨어뜨린 후 그 반동으로 되잡는 것과 동시에 어깨를 슬쩍 비틀고, 아울러 오금질에 몸의 출렁임을 스스로 감지해야 한다고 말한다면 또 어찌 될 것인가? 목은 목대로 어깨는 어깨대로 다리는 다리대로 제각기 놀다 지쳐 욱신거리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아무리해도 제 모습이 나오지 않는다고 구박만 받고 있으니 짜증이 날 밖에. 슬슬 땡땡이를 칠 만큼 여유가 생기는가 싶더니 바야흐로 봉산탈춤 공연을 위한 본격적인 연습이 시작되었다.
봉산탈춤의 김선봉 선생님을 만나 뵌 것도 그 때였다. 배역은 이미 정해진 상태였고, 나는 1학년인데다 춤도 제대로 못 추었기 때문에 나중에야 겨우 남강노인을 맡게 되었다. 그것도 감지덕지였으나 운이 좋았는지 개인춤 없는 7목까지 배당받아 봉산탈춤 제 2과장 합동춤에 참가할 수 있는 영광(?)을 얻었다. 아시다시피 남강노인의 대사가 얼마나 되는가? 그러나 김선봉 선생님 앞에서 연습을 할 때면 매번 싫은 소리를 들어야만 했다. 선생님은 결코 부드러운 분이 아니었다. 작은 키에 매부리코, 한 손에 채편 들고 한 손에 커피나 담배를 들고 계시던 선생님은 결코 어영부영하거나 얼기설기 때우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셨다. 별안간 때릴 듯 솟구치는 몸짓, 주눅 든 몸뚱이로 꽂히는 독설. 그러나 이런 과정을 통해 우리의 봉산탈춤은 제대로 된 틀을 만들어갔다. 신장수 신재형 형은 어찌나 신을 열심히 팔았든지 목이 다 쉬었고, 기독교인이었던 무당은 허구한 날 울상이더니 어느새 작두를 탈 경지에 올랐다. 취발이 성하청 형은 그렇지 않아도 큰 키에 휘청휘청 잘도 휘었고, 노장 김보강 형은 점점 느끼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나 역시 소도구인 담뱃대가 손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공연은 단오(端午)날이었다. 물론 예전 봉산탈춤이 단오날 공연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정해진 것이었다. 아침 일찍 학교에 나와 마당을 쓸었다. 연수원 앞마당이었다. 싸리비로 깨끗하게 공연할 마당을 쓸고 곱게 물을 뿌렸다. 행여 작은 먼지라도 날리지 않도록 쓸고 또 쓸었다. 꼼꼼한 마당 손질이 끝난 후 우리는 우르르 점심을 먹으러 갔다. 간만에 먹어보는 백반(白飯)이었다. 그 때부터 나는 공연 당일 점심은 꼭 백반을 먹어야 한다고 믿었다.
이제 마당 주위에 가마니를 깔기만 하면 마당 정리는 끝나는 셈이다. 그런데 이게 어인 일인가? 하늘에 검은 구름이 엉기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빗줄기가 두둑거리며 떨어지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소도구를 챙기던 이들은 긴급하게 회의를 열고 이 상황을 어떻게 타개할 것인가 논의하기 시작했다. 비가 많이 오지 않을 경우 마당 공연을 강행하자는 패와 강당으로 옮기자는 패로 나뉘어 갑론을박하였다. 그러나 논의는 쉽게 끝나고 말았다. 가랑비가 순식간에 장대비로 바뀌었기 때문이었다. 탈반 분위기가 영 말이 아니었다. 근 석 달 동안 준비한 공연인데, 어둠이 깃든 마당에서 횃불을 밝히고 해야만 했는데, 억울했다. 비에 물씬 젖고 있는 교내는 오가는 이들도 거의 없었다. 공연 시간은 다가오고 사람은 보이지 않고 텅 빈 강당에서 우리끼리 무엇을 할 것인가?
물의 장막이 펼쳐진 잿빛 하늘을 향해 장구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 소리는 강당이 있는 강의실의 창문을 통해 빈 운동장으로 퍼지고 있었다. 손님을 맞이하기 위한 길놀이인 셈이다. 강당 의자를 모두 치워 또 다른 마당을 만든 후 우리는 개복청으로 돌아왔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서 나는 담뱃대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이윽고 시간이 되었다. 고사를 지낼 때까지 관중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우리는 성실하고 진지하게 천지신명과 터줏대감님에게 놀이 시작을 고하는 축문을 읽었다. 상-향(尙饗). 두루마리 한복에 갓까지 쓴 박창희 지도교수님의 모습이 보였다. 고사상이 치워지고 사상좌 춤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첫목이 다리에 방울을 달고 튀어나갔다. 하남근 형이었다. 언제 연습하셨지? 이번 공연 연습을 총괄하느라 정신이 없었을 터인데...전체 공연에 앞서 앞패들은 자기가 나설 시간 이외에는 마당에 얼굴을 보이지 말라는 이야기를 듣기는 했지만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다. 강당 한쪽 대형 커튼 뒤로 가서 살며시 우리들의 마당을 보았다. 아, 만장(滿場)하신 여러분! 언제 저리들 많이 왔나!
그리고 나는 합동춤을 추러 나갔다. 개인춤이 끝나고 일렬로 서서 고개잡이부터 제자리걸음을 거쳐 만사위를 한 다음 외사위로 앞으로 튀어나가며 원을 만드는데, 어디선가 ‘부욱’하는 소리가 들린다. 한삼이 서로 엉켜 찢어지는 소리. 내가 탈춤을 추는지, 탈이 나를 잡고 춤을 추는지! 문득 가벼워진 몸이 땅을 치고 올라 하늘을 날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공연이 끝났다. 입 안 가득 쉰 냄새, 땀범벅인 얼굴, 알 수 없는 희열에 들 뜬 가슴을 안고 우리는 처음이자 마지막 사진을 찍었다. 그 날 공연이 끝나고, 우리는 다음 날 프랑스 문화원에서 다시 한 번 공연을 했다. 그리고 마석으로 뒤풀이를 떠났다. 마당을 밝히려고 마련해두었던 횃불을 밝히고 어둠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목적지를 향해 걸었다.
내가 처음 만난 탈춤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때부터 나는 계속 탈춤을 추었다. 여전히 탈춤을 출 때면 몸에 걸친 시계나 반지 나부랭이를 모두 풀고, 마당을 쓸 때처럼 경건하고 진지해진다. 가능하면 그날 점심은 백반을 먹고, 사진은 가능하면 찍지 않는다(사실 이후 많이 찍히기는 했지만). 꽃다발을 받는 일은 거의 없었고, 어설프게 준비하면 아예 하지 않고자 했다. 후배가 들어오고, 내가 선배가 되었다. 그리고 내가 후배였을 때 내 선배들이 물어본 것처럼 “왜, 탈춤반에 들어왔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나에게도 정확한 답변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사실 당돌한 후배가 왜 탈춤을 추는데 시계를 풀어야 하느냐고 물으면 내 유일한 답변은 “말하자면 길다”는 것뿐이었다.
그 ‘긴말’ 중에는 외대 탈반이 지닌 진지함에 관한 이야기가 적지 않을 것이다. 분명 내가 본 선배들은 탈춤에 진지하고 열정적이었다. 탈반에 있는 이두현 선생의 <한국의 가면극>을 펼치면 ‘箕山潁水別坤乾’ 옆에 ‘기산영수별건곤’이라 한글이 적혀 있고, 때로 뜻풀이도 적혀 있었다. 아마도 안상헌 형과 하남근 형의 수고였을 것이다. 도서관에 빌려온 책이긴 했으나. 이런 진지함이 한 걸음 더 나아가니 어려운 한자 대신 한글로 봉산탈춤 목중 대사를 만드는 일로 번졌다. 한국사 전공인 박창희 선생님의 발의와 적극적인 참여로 이루어졌다. 이렇듯 우리는 탈춤에 매료되어 심취했고, 몸동작, 대사 하나에도 허투루 대하지 않았다. 그만큼 진지했으며, 성실하고자 애썼다.
과연 내가 처음 탈춤을 만났을 때 가지고 있었던 ‘진짜 찾기’의 목적이 달성되었나? 잘 모르겠다. 다만 나는 탈춤을 통해 조국과 민족을, 탈 속에 가려진 나를, 삶의 진지함과 성실함을, 삶의 눈물과 기쁨을 찾거나 배웠으며, 박창희, 김선봉, 심우성 등 여러 어른들을 만나 스승의 모습을 보았으며, 언제나 만나면 신나는 술꾼들을 선후배나 친구로 사귈 수 있었다. 그리고 일본 오사카, 마츠모토,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 러시아 사할린 마카로프, 베트남 하노이 등지에서 동포들과 어울리는 기회를 얻기도 했고, 제주도, 독도와 가파도를 비롯한 우리 강산 이곳저곳에 산재한 신명을 만날 수 있었다. 어쩌면 그 속에 진짜가 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 속에 내가 대무(對舞)할 상대가 있는지 모른다. 그러면 더욱 열심히 추어야지.
글쓴이 심규호 : 한국외국어대학교 중국어과 졸업(78학번), 동대학원 문학박사, 외대 가면극연구회 회원. 제주산업정보대학 총장, 제주국제대학교 교수 역임, (사)제주문화포럼 이사장, (사) 제주 한문화 네트워크 이사장, 제주 탈패 두루나눔 고문.
[탈춤과 나] 원고 청탁서
새로운 언론문화를 주도해가는 인터넷 신문 <프레시안>(http://pressian.com)이 <사)민족미학연구소>와 <창작탈춤패 지기금지>와 함께 탈춤에 관한 “이야기마당”(칼럼 연재)을 기획하고 있습니다.
젊은 시절 탈춤이 좋아서, 쏟은 열정이 오롯이 담긴 회고담이거나 증언, 활동일지여도 좋고 아니면 현금 문화현상에 대한 어기찬 비판과 제언 형식의 글이어도 좋습니다.
과거 탈춤반 출신의 세대에게는 아련한 추억을, 신세대들에게는 다소 생소한 전통문화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글 내용이면 충분할 것입니다. 한 때나마 문화패로서 탈꾼으로서 개성넘치는 숨결을 담아내면 참 좋겠지요.
글 말미에는 대학탈춤패 출신임을 밝혀주십시오(대학, 학번, 탈춤반 이름 및 현직)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사진(1-5매)이나 시청각 자료도 곁들여 캡션을 달아 보내주시면, 지난 기억이 되살아나 더욱 생생한 느낌을 전달해줄 것입니다.
알뜰살뜰한 글과 사진제공에 대한 원고사례비는 제공되지 않고, 다만 원고가 묶여져 책으로 발간될 때 책 두 권 발송으로 사례를 대신합니다.
제 목 : [탈춤과 나] (부제로 각자 글 나름의 자의적인 제목을 달아도 좋음)
원고 매수 : 200자 원고지 15-30매(A4 3-5장)
원고 마감 : 2021년 9월 30일
(사진 등 시청각 관련 자료 캡션 달아 첨부하면 더욱 좋음)
보낼 곳 :
(사) 민족미학연구소 (namihak@hanmail.net) 채 희 완 (bullim204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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