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가 보기에도 참 소시민적인 사람이다. 역사의 전면에 설 용기도 없거니와 끊임없이 자신을 합리화시키고 그것이 마땅치 않을때에도 어떻게든 구실을 찾아내어 스스로를 안심시키는 사변적인 유형의 사람이다. 내가 만약 탈춤을 추지 않았더라면 다시 말해서 그 동네(탈패 떨거지들) 분위기에 물들지 않았더라면 나는 꽤 많이 달라져 있었을 것이다. 나는 좋게 말해서 전략적인 사고를 하는 편이고 다르게 말해서 잔머리를 많이 굴리는 편이다.(한때 후배들이 나를 가리켜서 ‘배 나온 여우’라고 부른 적이 있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끔씩은 적당히 타협하고 타락하고 속물이 되고 싶은 충동도 꽤 많이 느꼈지만 그때마다 어김없이 탈바가지가 나타나 내가 옆으로 새는 것을 가로 막았다. 나는 그것을 참 고맙게 생각한다. 나를 이렇게 올곧게 살아 갈 수 있게 해 주는, 어쩌면 평생 나를 쫒아다니며 사잇길로 벗어나지 않게 감시하는 탈바가지에 정말로 감사한다.
우리 교주님(채희완 교수를 우리는 그렇게 부른다)을 생각하면 우선 술을 먼저 떠 올리지 않을 수 없다. 83년 애오개 활동 시절에 춤 연습을 마친 뒤 아현동 근처 술집에서 2박 3일 동안 술을 마신 후에도 흐트러짐이 없이 작품을 마무리하시는 교주님을 보면서 술꾼은 저래야 되는구나 하고 생각했었다. 그렇다! 옛날 떨거지들은 막걸리 한 잔에서 신명을 얻었고, 농사꾼들도 막걸리 한 사발에서 노동에 필요한 에너지를 얻지 않았었는가? 술은 원래 그런 것이었다.
나는 그 때 이후 거의 매일 술을 마신다. 정확히 세어 본 적은 없었지만 1년 중 대략 360일은 술을 마시는 것 같다. 우리 집에 술 친구가 한 명 있는데(이명훈 : 서울여대 78) 연애 할 때 매일 소주집에서 마시다가 같은 집에서 마시게 된 지도 벌써 20년이 다 되어 간다. 술을 마시면 말이 많아지는 것이 보편적인 현상이다. 그러다보니 부부간에 대화가 많아지고 상호 이해의 폭도 넓어지게 되는 것 같다. 가끔씩 갈등의 요인이 생겨도 도무지 그것이 증폭되거나 맺히지를 않는다. 결혼한 지 20년이 다 되어 가는데 아직 부부싸움 한번 안하고 상호 존중하는 민주적 부부 관계를 유지하는 것, 이것 또한 탈춤이 나에게 준 소중한 선물이다.
그러나 아무나 함부로 따라 해서는 안 된다. 20년간의 임상실험을 통해 지속적인 음주는 심각한 부작용이 있음이 입증된 까닭이다. 첫 번째 부작용은 과도한 체중 증가가 수반된다는 점이고, 두 번째 부작용은 간기능을 비롯하여 갖가지 질병을 얻을 확률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청년기 이후 장년이 된 지금까지도 나에게 있어 ‘삶의 두 축’을 이루며 내가 무슨 일을 하든 일관되게 나의 사고 영역과 생활 방식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 바로 탈춤과 술이다. 이미 0.1톤을 넘어 설 정도로 너무 늘어난 체중 때문에 집사람과 나는 매일 오늘 술을 마지막으로 내일부터는 격일제 내지는 주 3회 이내로 음주 횟수 제한을 하자고 백번도 넘게 다짐 했지만 아마 오늘 밤에도 어김없이 술자리가 있을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러나 40대 후반인 내가 병원 신세를 거의 안 지고 지금까지 살아온 것은 내가 제약회사에 몸 담고 있는 것도 한몫 했겠지만 그보다는 채교주님의 음주 습관을 그대로 답습하지 않고 나름대로 창조적 계승을 했기 때문이다. 채교주님은 최소한 3차(과거에는 차수 변경이 국회 청문회처럼 날짜의 변경을 의미하였으나 근래 들어서는 교주님이 체력이 달리시는지 술집 변경 정도로 차수 변경을 완화 하였음)까지 가는 것을 고수하였으나 나는 철저하게 1차로 마무리를 짓는다. 또한 채교주님은 반드시 두 가지 이상의 술로 중간에 판갈이를 하였으나 나는 가급적 한 가지 주종으로 끝내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우리 세대는 인구에 널리 회자되고 있는 그 유명한 386세대가 아니다. 우리들은 40대이며 70년대에 대학을 다녔고 50년대에 태어났으니 굳이 작명법을 그대로 따르자면 475세대인 셈인데 70년대 후반부터 유신헌법, 긴급조치, 12.12 군사쿠테타, 광주민주화운동, 학원민주화운동 등을 현장에서 지켜보면서, 또는 일정 부분 참여하면서 계속된 휴교와 수업 결손 등으로 인하여 이 사회의 쭉정이로 성장한 세대가 아닌가 하는 자괴감도 든다.
하지만 우리 세대가 기여한 바도 적지 않다고 생각한다. 바로 탈춤으로 대표되는 민족극 부흥운동 곧 문화운동이 성난 노도와 같이 각 대학에 열병처럼 퍼져 나간 때가 바로 이 때이며, 전국 대학생 탈춤반 연합(이하 연탈)이 결성되어 이 유통 구조를 통해 서울대 등 운동권의 선진적인 대학들의 논리가 퍼져 나가 운동권의 평준화(?)를 이룩하는 데에 일정 부분 기여하였기 때문이다. 실례로 내가 다니던 한양대는 70년대 중반 이후 학내 시위가 전혀 없었던 소위 유신 대학이었었는데 80년대 중반 들어서 임종석(현 국회의원)등 전대협 의장을 여러 명 배출하는 운동권의 핵심 대학으로 발전하였다. 임종석도 족보를 따져 보니 한양대 탈패에서 시작된 소그룹의 증 손자뻘되는 동아리 출신이다.
탈패에는 어느 대학을 막론하고 78학번들이 많았었다. 나의 착각인지는 모르겠으나 채교주님께서 가장 아끼고 기대가 컸던 학번들도 바로 78학번들이 아니었나 싶다. 학내에서 활동했던 친구들은 물론이고 각 대학 대표로 1~2명씩 참여하였던 연탈 구성원들도 이제는 벌써 절반 정도는 이름조차 생각이 안 나니 쓸쓸한 느낌마저 든다. 아직까지 생각나는 이름들이라도 열거해 보자면 서울대 김성기(한일 장신대 교수), 장영덕(학원장), 김장욱(보험회사 근무), 이화여대 김영연(영화감독 여균동과 결혼), 박찬숙, 연세대 백원담(백기완 선생님 장녀), 고려대 주수홍(속초에서 영어학원 경영), 서강대 이지호(민통련에서 활동하다 외국 유학), 외국어대 심규호(제주 관광대 교수), 서울여대 심순복, 아주대 조충현(이대 77 구재연과 결혼), 한양대 홍한표, 중앙대 이수호, 홍익대 양원모(필명 : 나원식, 미술운동가) 그 외에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 많은 친구 들 그리고 76, 77 선배들, 79, 80 후배들이 있었다. 모두 보고 싶다.
연탈에서 활동했던 77(이대 구재연), 78(위에 이름을 열거한 사람 대부분과 이대 조기숙), 79(서강대 정일수, 서울여대 김은숙), 80(서울대 박정곤 : 한마음치과 원장, 중앙대 남기성, 이종현, 서울여대 김선영, 국민대 김영희)들이 자연스럽게 80년대 초반 아현동 애오개 소극장 시절의 한두레 활동에 참여하게 된다. 이 시절의 대표적인 작품이 84년에 초연되었으며 한두레 대표작 가운데 하나로 일컬어지는 ‘강쟁이 다리쟁이’이다. 이 작품은 당시 대통령이었던 전두환의 조상을 풍자한 작품으로 세간의 주목을 받았지만 작품성 또한 매우 빼어난 마당극이었다. 요즘 많이 활용되고 있는 깃발춤도 이 작품에서 처음 시도 되었으며 두 주역이었던 구재연(이대 77)과 주수홍(고대 78)의 연기는 마당극 연기의 한 전형을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대학로 문예회관 소극장에서 총 8회 공연되었던 이 공연은 거의 매회 만원이었으며 스탭들도 당시 최고의 역량을 갖고 있는 재주꾼들이 모두 동원된 공연이었다. 당시 공연 스탭들은 총연출에 채희완 교주님, 안무 김매자 이화여대 교수, 미술 및 탈 제작에 오윤 화백, 기획에 유인택(현 영화기획자협회 회장), 무대감독에 정희섭(현 국립극장 공연과장), 반주에 김덕수패 사물놀이 등이었으며 배우는 김명곤(현 국립극장장)을 비롯하여 약 30여명이 출연하였었다. 특히 마지막 공연은 관객이 너무 많이 들어 무대가 협소해지는 바람에 깃발춤을 추면서 내가 동료인 심규호(외국어대 78)의 깃대에 무려 3번이나 맞는 불상사가 일어나기도 하였다.
마치 엊그제 일어났던 일들처럼 생각되어지는 일들이 벌써 20년 전 이야기라니 새삼 세월의 무상함이 느껴진다. 이제는 그 때의 치열함도 사라지고, 내 몸 안에 넘쳐 흘렀던 끼들도 어디론가 없어지고, 춤사위나 장단 가락도 가물가물 잊혀져 간다. 문화운동을 이야기하고 두레적인 삶을 열망했던 나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지금은 매일 아침 프레시안이나 오마이뉴스를 뒤져 보며 작은 것에 분노하는 소시민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지금의 내가 그리 나쁘게 생각되어지지는 않는다. 그 옛날 마당극 판에서도 늘 조연을 했듯이 지금도 나는 조연이 좋다. 갑자기 어떤 말이 생각이 난다. 81년에 연탈 활동이 침체되면서 각자의 진로를 고민한 끝에 각자의 활동의 외연을 넓혀서 일단 흩어지기로 결정하였었다. 그 때 정치 활동을 택했던 이지호(서강대 78)가 한 말이다.
“우리는 오늘 이후 각자의 선택에 의해서 헤어지지만 언젠가는 다시 만날 것이다.”
그 때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그렇게 될 것이라고 동의를 표시하며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정말 그렇게 될까? (2001년)
박상대
- 1957년 경기도 양주 출생
- 1977년 용산고 졸업
- 1978년 한양대 화학과 입학
- 1978년 한양대 민속문화연구회 가입
- 1979년 전국 대학 탈춤반 연합에서 활동
- 1983년 한두레 가입
- 탈춤반 활동시 봉산탈춤, 양주별산대, 고성오광대등 전수
- 한두레 활동시 소리굿아구, 강쟁이다리쟁이 등 출연
- 현재 대웅경영개발원 부원장/이사
[탈춤과 나] 원고 청탁서
새로운 언론문화를 주도해가는 인터넷 신문 <프레시안>(http://pressian.com)이 <사)민족미학연구소>와 <창작탈춤패 지기금지>와 함께 탈춤에 관한 “이야기마당”(칼럼 연재)을 기획하고 있습니다.
젊은 시절 탈춤이 좋아서, 쏟은 열정이 오롯이 담긴 회고담이거나 증언, 활동일지여도 좋고 아니면 현금 문화현상에 대한 어기찬 비판과 제언 형식의 글이어도 좋습니다.
과거 탈춤반 출신의 세대에게는 아련한 추억을, 신세대들에게는 다소 생소한 전통문화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글 내용이면 충분할 것입니다. 한 때나마 문화패로서 탈꾼으로서 개성넘치는 숨결을 담아내면 참 좋겠지요.
글 말미에는 대학탈춤패 출신임을 밝혀주십시오(대학, 학번, 탈춤반 이름 및 현직)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사진(1-5매)이나 시청각 자료도 곁들여 캡션을 달아 보내주시면, 지난 기억이 되살아나 더욱 생생한 느낌을 전달해줄 것입니다.
알뜰살뜰한 글과 사진제공에 대한 원고사례비는 제공되지 않고, 다만 원고가 묶여져 책으로 발간될 때 책 두 권 발송으로 사례를 대신합니다.
제 목 : [탈춤과 나] (부제로 각자 글 나름의 자의적인 제목을 달아도 좋음)
원고 매수 : 200자 원고지 15-30매(A4 3-5장)
원고 마감 : 2021년 9월 30일
(사진 등 시청각 관련 자료 캡션 달아 첨부하면 더욱 좋음)
보낼 곳 :
(사) 민족미학연구소 (namihak@hanmail.net) 채 희 완 (bullim204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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