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희숙 국민의힘 의원이 18일, 대선 1호 공약이라며 노동개혁을 발표했다. '굴뚝시대 투쟁만 고집하는 귀족노조가 죽어 청년이 산다'는 취지의 주장이다. 노조가 파업하면, 현재 금지돼 있는 '대체근로'를 허용하는 방식으로 '귀족노조'의 장기 파업을 견제하겠다고 했다. 대기업 정규직 노조인 현대자동차 등에서 파업을 할 경우, 대체인력 파견을 통해 이들의 파업을 무력화하겠다는 취지다.
'귀족노조(강성 귀족노조)'는 지난 2017년 대선 때 홍준표 후보가 노동 정책 공약을 내며 전면에 내세웠던 프레임이기도 하다. 낡은 프레임이 또 다시 대선을 앞두고 부활했다.
논란이 되자 윤 의원은 19일 자신의 SNS에 글을 올려 '귀족노조'의 기득권을 해체해야 한다고 다시 한 번 강조했다.
헌법에 보장된 노동법, 정작 적용은?
노조의 파업권(단체행동권)은 노동3권(단결권, 단체교섭권, 단체행동권) 중, 사실상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권한이다. 임금 인상, 복지 개선 등을 요구조건으로 내걸고 교섭을 해봐야, 사용자 측에서 거부하면 노조 입장에서는 할 수 있는 게 없다. 헌법에 보장돼 있는 파업권이지만, 사실 이 법이 현실에 적용되기까지 쉽지 않은 시절을 통과해야 했다.
우리나라의 노동법 역사는 유럽에 비해 매우 짧다. 산업혁명을 거치지 않은 한국은 해방 이후에는 미국 통치 아래에 있어야 했다. 그렇기에 제대로 된 노동법이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러다 한국전쟁이 한창일 1953년 지금의 노동법에 근간이 되는 노동4법(노동조합법, 노동쟁의조정법, 노동위원회법, 근로기준법)이 처음 만들어졌다. 이 법률은 맥아더 군정에 의해 만들어진 일본 노동법을 그대로 모방한 것이었다. 사실상 노동법에서 주요한 법안들은 이때 다 만들어진 셈이다.
전쟁통에도 부랴부랴 이 법을 만든 이유는 남과 북 전쟁 상황에서 북한에 뒤처지지 않아 보이기 위해서였다는 게 일반적인 견해다. 북한에 있는 노동법이 남한에 없다는 점이 지적됐다. 또 하나는 부산에서 군수물자를 만들던 방직공장 노동자들의 파업도 영향을 미쳤다. 이승만 정권에서는 당시 노동자들의 불만을 어느 정도 달래 줄 필요가 있었다.
법이 만들어졌다고 지켜진 것은 아니다. 이승만 정권 이후 이어진 군부 정권 등과 공룡처럼 거대해진 재벌들은 이들 노동법을 산업 현장에 적용하려는 의지가 박약했다. 산업 인권이 아닌 산업 역군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1970년 전태일이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며 자신의 몸에 불을 댕긴 이유다. 처음 우리가 베낀 일본 노동법은 매우 진보적인 법이었다. 이 법은 한국의 산업화 이전에 만들어졌을 뿐만 아니라 법의 시행과는 무관하게 한국에도 근대적인 노동법이 있다는 사실을 국제사회에 보여 주기 위한 일종의 장식물로 기능했다는 게 중론이다.
유명무실한 이 법은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을 통해 빛을 보게 된다. 이때부터 법으로 정해진 노동3권을 누릴 수 있는 노조가 활동할 수 있게 됐다. 윤 의원이 이야기하는 대기업 정규직 노조인 '귀족노조'의 시작이다. 그러나 노조다운 노조가 활동한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1997년 IMF가 터지면서 대규모 정리해고가 발생했고, 노동자들 상당수가 공장과 회사를 떠나야 했다. 노동문제 전문가인 조돈문 가톨릭대학교 명예교수의 말이다.
귀족노조의 현실이고 역사다. 이후 IMF 구제금융을 졸업하며 한국 사회는 신자유주의를 받아들였고, '사회 안전망 없는 노동 유연화'가 시작됐다. 노무현 정부에서 '비정규직 법'이 처리됐고, 노동의 유연화가 가속화되면서 기존 노동법에서 벗어나는 '노동자'들은 우후죽순 양산됐다. 이른바 '비정규직'으로 불리는 존재들이다. 이들이 기존 노동법으로 보호받지 못한 지는 오래됐다. 파견직부터 도급직, 특수고용직을 비롯해 코로나 시대에는 플랫폼 노동자까지 등장했다. 여전히 노동환경은 후퇴하고 있다.
청년 취업 시장 붕괴, 노동 조건 악화는 정말 '강성 노조' 탓인가?
대권에 도전한다는 윤 의원의 '귀족노조론'은 자유한국당 홍준표 대선후보 노동 인식의 재탕이다. 윤 의원이 파업권을 제한하면서 내건 이유가 '귀족노조는 하청 근로자나 비정규직의 처우 개선, 일자리 확대에는 일절 관심을 두지 않으면서 자신들 임금만 극대화해왔다'는 것이다. 이는 2017년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선후보가 대선일을 일주일 앞둔 5월 2일 방송연설에서 "파업을 해도 꼬박꼬박 월급 받는 연봉 1억원의 강성 귀족노조가 협력업체, 하청업체 근로자들의 삶을 절벽으로 내몰고 있다. 노조 때문에 우리 기업들은 다 외국으로 떠나고 청년들은 일자리 절벽에 고통받고 있다"고 주장한 것과 판박이다.
노조 때리기로 보수 표를 끌어 모으려는 이런 '낡은 프레임'의 요체는 귀족 노조 파업이 청년 실업을 야기했다는 건데, 인과관계도 틀려먹었다. 파업권을 제한해 노동조합을 와해시키면 파업 안하는 '착한 청년 노동자'가 그 자리를 대체할 것이라는 발상인가? 이런 현실은 누구의 탓인가. 윤 의원이 주장하는 '귀족 노조'가 대한민국을 망가뜨려 온 것인가? 아니면 노동법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은 채 노동 유연화를 확대해 온 정부와 기업의 탓인가.
더군다나 노동조합이 노조 이익을 위해 자신의 권한을 사용하는 게 문제라는 인식은 실망스럽다. 노조는 정치파업을 할 수 없다. 자신들의 권리와 임금을 위해서만 파업을 할 수 있다. 이런 구조 속에서 '임금 인상을 위해 파업을 한다'고 비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또 재미있는 지점은 이들 노조가 '비정규직 철회'를 요구하며 파업을 하면 '정치파업'이라며 대대적인 탄압을 하는 게 현실이라는 점이다. 임금 인상을 요구하는 파업도 못해, 비정규직 철폐를 요구하는 파업도 못해, 대체 파업권은 왜 있는 걸까.
현재 대기업 정규직 노조도 나름의 사회적 역할을 하려 노력하고 있다. 금호타이어, 현대차 전주공장 등에서는 정규직 노조가 비정규직을 대상으로 물적, 인적 지원을 쏟아 부어 비정규직 노조를 설립하는데 상당한 역할을 하기도 했다. 현대중공업 정규직 노조는 노조 규약 변경을 통해, 하청 노동자를 정규직 노조에 가입하도록 하기도 했다. 이랜드 정규직 노동자들은 비정규직 대량 해고에 맞서 500일 넘게 파업을 했다. '임금 나누기' 움직임도 있다. 공공운수노조 의료연대본부 서울대병원분회는 예전부터 임금인상률 차등 정책으로 정규직, 비정규직간 임금 격차를 줄여 왔다. 산별노조인 금속노조, 보건의료노조도 마찬가지다.
물론, 이러한 사례는 일부분이다. 노동조합의 내부 개혁도 아직 지지부진한 상황이다. 그렇다고 노동조합 활동에 '귀족' 프레임을 씌우며 헌법에 보장된 노동권을 제약하는 방식이 옳지 않다. 윤 의원이 위한다는 '청년 노동자'들을 위해서라도 노동권은 더 강하게 보장돼야 한다. 지금 우리 사회엔 '귀족노조'와 상관없는 플랫폼 노동자나 서울대청소노동자처럼 갑질에 고통 받는 노동자들이 여전히 존재한다.
'귀족노조가 죽어야 청년이 산다'는 선동보다 멀쩡한 노동법의 사각지대에 놓인 노동 환경을 바꾸고 청년들이 안전하고 당당하게 노동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먼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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