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기숙사 청소노동자가 숨진 채 발견된 사건의 진상조사 방법이 쟁점으로 떠오르고 있다.
서울대는 지난 8일 서울대 인권센터에 사건 조사를 의뢰했다. 이어 지난 13일 오세정 서울대학교 총장이 입장문을 발표하고 '서울대 인권센터를 통한 공정한 조사를 수행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서울대 인권센터는 학내에서 일어난 인권침해 사건을 조사하고 각 기관에 필요한 조치를 권고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기관이다.
그런데 고인이 생전에 가입했던 민주일반연맹 전국민주일반노동조합은 이에 대해 '셀프 조사'라고 반발하며 노사공동조사단 구성을 요구하고 있다. 학내에 설치된 인권센터로는 고인의 죽음에 대한 공정한 조사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이유다.
이같은 논란 속에 서울대 인권센터가 최근 5년 사회적인 관심이 인 사건에 대해 내린 권고를 들여다봤다. 주로 교수의 성추행, 갑질 사건이다.
사학법상 교원 징계의 종류는 견책, 1~3개월 감봉, 1~3개월 정직, 해임, 파면으로 제한되어 있다. 학내에서 교수의 성추행, 갑질 사건이 빈발하자 서울대는 2019년 10월 교원징계규정을 따로 만들어 정직 최대 기간을 12개월로 늘렸다.
서울대 인권센터는 접수된 사건의 피해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성추행, 갑질 교수 사건과 관련해 징계 결정 권한을 가진 교원 징계위원회에 주로 사학법 혹은 교원징계규정 상 최대 기간의 정직을 권고해왔다. 피해자를 비롯한 학내 구성원이 이를 '솜방망이 처벌'이라고 비판하며 인권센터 결정 이후 오히려 사건이 확산하는 일이 잦았다.
갑질, 성추행 H교수, 인권센터 징계 권고는 정직 3개월
2017년 3월 서울대 인권센터에 사회학과 H교수가 평소 학생과 동료 교수에게 갑질과 성추행을 했다는 내용의 사건이 접수됐다.
인권센터는 사건 조사 과정에서 'H교수가 여학생의 몸을 만지고 공개적인 자리에서 학생의 성적 사생활을 애깃거리로 삼는 등 성희롱과 성추행을 했다'는 증언을 확보했다. H 교수가 학생들에게 자택 청소, 세탁물 처리, 자동차 점검, 핸드폰 개통 등 사적인 일을 강요했다는 진술도 있었다. "쓰레기다", "정신이 썩었다", "못 배워먹어서 그렇다", "너는 좀 맞아야 해"와 같은 폭언을 당했다는 피해자도 있었다.
3개월 간의 조사를 마치고 2017년 6월 인권센터가 내린 결정은 '정직 3개월 권고'였다.
피해자를 비롯한 학생들은 즉각 'H교수 사건 대응을 위한 학생모임'을 만들고 H교수의 파면을 위한 싸움을 시작했다. 2018년 3월부터는 대학본부에서 121일간 천막농성을 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교원 징계위원회는 인권센터의 권고대로 H교수에게 정직 3개월 징계를 내렸다. 학생모임은 교원징계규정 신설, 인권센터 학생 참여 보장 등 제도적 개선책을 논의하기로 하고 당시 싸움을 마무리했다.
성추행 A교수 정직 3개월 권고에 피해자가 실명 걸고 비판도
2018년 11월 서울대 인권센터는 서어서문학과 A교수로부터 성추행을 당했다는 피해자 김실비아 씨의 신고를 접수했다. 조사 수행 과정에서 인권센터는 피해 사실을 인정했다. 그리고 2019년 2월 교원 징계위원회에 징계를 권고했다. 이번에도 '정직 3개월'이었다.
김 씨는 인권센터의 결정이 나온 직후 실명 대자보를 통해 인권센터의 결정을 비판했다. 대자보에서 김 씨는 피해사실을 구체적으로 적었다. A교수가 호텔 바에서 스커트를 올리고 다리를 만진 일, 버스에서 자고 있을 때 뒷좌석에서 머리카락에 손을 넣어 만진 일, 수시로 자신의 어깨와 팔을 허락 없이 주무른 일, "팔짱을 끼라"고 했을 때 거절하자 억지로 팔을 잡아 팔을 잡아 두른 일 등이었다.
김 씨는 이어 "모든 증거와 17명이 넘는 사람들이 작성한 진술서에도 불구하고 인권센터는 겨우 3개월의 정직 권고라는 터무니없는 결정을 내렸다"며 "신고하는 것이 제게는 정말 쉽지 않았지만 그래도 저는 인권센터가 저를 도와줄 거라는 희망을 갖고 있었다"고 밝혔다.
또 한 번 A교수의 파면을 요구하는 학생모임이 결성됐다. 'A교수 사건 대응을 위한 특별위원회'다. 이들은 A 교수의 파면을 요구하며 기자회견 등 여러 활동을 벌였다.
결국 대학 징계위원회는 2019년 8월 A교수에 대해 인권센터 권고와 달리 해임 결정을 내렸다.
지난 3월 서울대 인권센터는 이 사건과 관련해 또 한 번 사람들의 입길에 올랐다. 김 씨가 서어서문학과 ㄱ 강사로부터 '네가 예민한 것', '회식 중 여성이 겪을 수 있는 일'이라는 말을 들었다며 ㄱ 강사를 2차 가해자로 인권센터에 신고한 데 대해 기각 결정을 내리면서였다.
인권센터는 당시 "ㄱ씨가 해당 사건을 언급했을 가능성은 있어 보인다"면서도 "신고내용과 같이 구체적 발언을 했다고 인정하기 어렵다. ㄱ씨가 A교수 사건에 대해 추측하는 언급을 했더라도, 이는 피해자를 비난하거나 가해자를 옹호하려하기보다 학과 구성원으로서 학과 상황을 우려해 잘 해결되길 바라는 마음을 표현한 것으로 보는 것이 상당하다"고 해 2차 가해 혐의자를 두둔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성추행 B교수, 정직 12개월 이상 징계 권고했지만 파면, 해임 언급은 없어
2019년 11월 또 한 건의 성추행 피해 사건이 인권센터에 접수됐다. B교수가 해외출장 당시 동행한 제자의 숙소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는 내용이었다. 피해자는 B교수가 건강 앱을 설치하게 해 결과를 캡쳐하거나 식사한 내용을 사진을 찍어 보낼 것을 강요하는 등 사생활에도 간섭했다고 했다.
조사를 수행한 인권센터는 B교수에 대해 2020년 6월 교원 징계위원회에 정직 12개월 이상의 중징계를 요청했다. 2019년 10월 신설된 서울대 교원징계규정에 따른 최대 기간의 정직을 거론한 것이지만 이번에도 해임이나 파면을 직접 권고하지는 않았다.
B교수 사건은 현재 진행형이다. 인권센터 결정으로부터 1년 1개월이 지났지만 교원 징계위원회의 징계 결정이 나오지 않았다.
지난 5월에는 학내에 직위해제 중인 B교수가 복귀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아 '권력형 성폭력 인권침해 문제 해결을 위한 서울대인 공동행동'이 B교수의 복귀를 반대하고 파면을 요구한다는 내용의 기자회견을 열기도 했다.
당시 공동행동은 B교수가 '자신의 인생에는 스크래치 정도겠지만 피해 학생은 인생을 걸어야 할 것'이라는 발언을 한 적이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 사건과 관련해 피해자가 언론에 인권센터가 대면조사 과정에서 접촉한 신체부위와 횟수 등을 세세하게 물어 경찰서 조사 과정보다 힘들었다고 밝힌 일도 있었다. 인권센터는 당시 B교수에 대해서는 서면조사만 진행한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 기소 건에 대해서는 파면 권고도
거슬러 올라가면 서울대 인권센터가 성추행 교수에게 파면 결정을 내린 일이 없지는 않다. 2015년 1월 인권센터는 K교수의 성추행 신고를 접수하고 조사를 수행해 교원 징계위원회에 파면을 권고했다. 단, 이 사건의 경우 K교수가 이미 검찰에 기소돼있었다는 특수성이 있다.
2014년 5월에도 고액 과외 의혹에 휩싸인 전력이 있는 음대 P교수에게 성추행을 당했다는 피해자의 신고에 대해 인권센터가 파면을 권고한 일이 있었다. P교수는 여학생의 뺨에 입을 맞추고 사적 만남을 요구하기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건 진상 규명 위해 노사공동조사단 구성 필요"
인권센터에 위와 같은 전력이 있는 탓에 노조는 물론 서울대 청소노동자 사망사건의 진상규명을 요구하고 있는 교수와 학생 사이에서도 노사공동조사단 구성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이재현 '비정규직 없는 서울대 만들기 공동행동' 대표는 "서울대 인권센터는 그간 갑질, 성추행 사건에 대해 솜방망이 처벌을 내리고 가해자를 비호하는 언동을 보여 많은 비판을 받은 곳"이라며 "이 사건에 대해서도 인권센터가 조사를 하는 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서울대학교 민주사회를 위한 교수협의회도 지난 8일 발표한 성명에서 서울대 청소노동자 사망사건에 대해 학교 측에 노사공동조사단 구성을 요구했다.
김선기 민주일반노조 교육선전국장은 "유족 등 피해자를 대변할 이들의 참여 없이 학내 기관이 조사하면 조사 결과에 대해 논란이 있을 것"이라며 "서울대가 정말 당당하다면 노사공동조사단 구성 요구를 받아들이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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