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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평론 창간, 녹색사상의 거점을 마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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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평론 창간, 녹색사상의 거점을 마련하다

[녹색평론 김종철 약전] ⑥ 1991년 11월 <녹색평론> 창간

격월간 <녹색평론> 창간호는 1991년 11월 말 대구에서 발간됐다(1991년 11/12월호). 그런데 김종철은 <녹색평론> 창간을 결행하기까지 적어도 1년 이상 숙고를 거듭했던 것으로 보인다. <녹색평론> 1호부터 9호(1993년 3/4월호)까지 편집장을 맡았던 장길섭의 회고를 들어본다.

장길섭은 대학생 때인 1985년 김종철의 글 '역사, 일상생활, 욕망'을 읽고 크게 감명을 받은 이후 김종철의 글을 거의 모두 찾아 읽었다. 그는 김종철의 글이 "제가 경험은 했지만 잘 이해하지 못했던 것을 알게 해주었다고 해야 할지, 제 경험의 의미를 일깨워주었"다면서 다음과 같은 글을 그 예로 들었다.

"우리는 보다 많이가 아니라, 보다 다르게 욕망하도록 교육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들의 왜곡된 욕망의 구조야말로 이 시대의 고통과 비극의 가장 심원하고 핵심적인 원인의 하나를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단순한 정치적 변화가 새로운 삶을 기약하지는 못한다. 상호 협력, 함께 자유로움, 관용, 정의로움, 명상과 같은 초월적 가치들에 대한 욕망이 고조된 결과로서, 또 그러한 레디컬한 욕망이 깊이 정착되기 위한 조건으로서, 우리들의 전체적인 생활의 방식에 있어서의 근본적인 변혁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역사, 일상생활, 욕망', <역사, 현실, 그리고 문학-80년대 대표평론선1>(김병걸·채광석 외 엮음, 지양사 펴냄) 58~59쪽)

장길섭은 대학 졸업 후 공장노동자로 일하다가 건강이 나빠져서 그만두고 출판사에 취직했다. 그리고 1990년 편집자로서 한 시인의 신작 시집에 붙일 발문을 부탁하기 위해 김종철에게 장문의 편지를 보냈다. '선생님 글을 읽으며 영향을 크게 받았다, 선생님을 마음속으로 스승으로 생각하며 살고 있다' 등의 내용이었다.

"그런데 한참 후에 선생님께서 시집의 발문을 쓸 수가 없고 미안하게 되었다면서 서울 올라가면 만나자고 연락을 주셨어요. 그리고 그해 초가을에 제가 일하던 출판사 근처 찻집에서 선생님을 처음 뵙고 꽤 긴 시간 동안 말씀을 들었지요. 동구권의 몰락 등 세계 정세에 대한 것과 환경·생태 문제가 곧 본격적으로 대두될 거라는 것과 <사상계>처럼 지식인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잡지를 만들고 싶다는 말씀이었어요. 그때 제가 선생님이 구상하시는 잡지가 빨리 나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출판사에 취직한 지 갓 2년 된 초보 편집자이고 세상 물정도 잘 모르면서 용감하게 저도 돕겠다고 말씀드렸어요. 그런데 해가 바뀌어도 잡지가 안 나오고 궁금해서 1991년 이른 봄에 대구로 내려갔어요. 그때 나온 얘기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고, 왜 잡지 안 만드시냐, 빨리 만드시라, 제 도움이 필요하면 말씀하시라고 또 한번 말씀드렸던 건 기억이 나요. 제가 소심하고 내성적인 사람인데 어떻게 그랬는지 몰라요."('김종철 선생님과 함께했던 시간', <녹색평론> 174호 2020년 7/8월호, 14~15쪽)

그러니까 김종철은 이미 1990년 가을 무렵부터 잡지 창간을 고려하고 있었던 셈이다. 김종철은 <녹색평론> 100호(2008년 5/6월호) 기념 좌담에서 <녹색평론> 창간의 전후 사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90년대로 접어들면서 답답한 기분에 잡지라도 해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엄두가 나지 않았는데, 여기 계신 장길섭 씨가 추임새를 넣는 바람에 일이 시작되었지요. 그때 장길섭 씨가 서울에서 어느 출판사 편집장을 하고 있다가 그만두고 대구에 내려와서 나하고 같이 일을 하겠다고 제안을 했거든요. 실은 그 전에 전사(前史)가 있어요."('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녹색평론> 100호, 5~6쪽)

그 전사란, 1991년 봄에 대구의 한 작은 출판사가 <녹색평론> 출판을 맡아주겠다고 해서 원고를 넘겨주고 교정까지 다 보았지만 결국은 운영에 자신이 없다며 포기해 버린 일과, 그 후 영남대 총장과 상의 끝에 잡지 출판은 대학출판부 사업으로 하고 편집인은 김종철, 발행인은 총장이 맡기로 했으나 이것이 특혜라는 주변의 군소리에 이마저도 포기했던 것을 말한다.

그런데 그해 초여름에 김종철이 <녹색평론>의 창간에 나설 수밖에 없도록 만든 사건이 발생한다. 우리 농촌 여러 곳에서 수확을 앞둔 보리를 농민들 자신이 밭째로 불태워버리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농민들이 보리밭을 불태워버린 것은 물론 보리 값 폭락 때문일 것이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한국인들에게 '보릿고개'는 곧 '가난'을 상징하는 단어였다(예전 농촌에서는 대략 3~4월이면 쌀이 떨어졌고 보리가 나는 6월까지 부족한 식량으로 버텨야 했다. 이 시기를 춘궁기, 또는 보릿고개라 했다. 그래서 한 시인은 '에베레스트보다 높은 보릿고개여'라는 시를 쓰기도 했다). 그런 의미에서 농민 스스로 자신이 키운 보리를 불태운다는 것은, 그리고 이러한 행위가 경제적으로 합리적인 행위가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은 건전한 인간 이성으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미친 일, 또는 삶과 자연에 대한 불경(不敬)이었다.

당시 김종철은 이런 생각을 불교 잡지 <해인>에 발표했는데, 이 글을 읽은 이남덕 이화여대 교수가 김종철에게 편지와 함께 잡지 창간에 보태라며 상당 액수의 돈을 보냈다고 한다(<역사 앞에서>의 저자이자 서울대 교수였던 김성칠의 부인이며 역사학자 김기협의 모친인 이남덕 교수는 <녹색평론> 2호에 '보살의 손 / 고향과 어머니'라는 글을 기고하기도 했다). 이는 생전에 김종철에게서 직접 들은 얘기인데, 이로써 그는 <녹색평론> 창간이라는 호랑이 등에 타게 된다.

김종철은 1995년 작성된 '왜 녹색평론을 시작하였는가'라는 글에서 창간 당시 <녹색평론>에 대해 국내 언론이 그해 3월 발생한 '낙동강 페놀 방류 사건에 충격을 받아 나온 국내 최초의 환경 잡지'라고 소개한 데 대해 <녹색평론> 창간의 직접적 계기는 보리밭 소각 사건이었다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것은 보리를 태운 농민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오늘의 산업문화 전체의 본질적 문제이다. 인간성의 소멸을 대가로 하는 경제성장이니 '진보'니 하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해 초여름 이후 나는 내내 이러한 물음으로부터 헤어나지 못했다."(<간디의 물레―에콜로지와 문화에 관한 에세이>(김종철 지음, 녹색평론사 펴냄) 291쪽)

김종철은 '왜 녹색평론을 시작하였는가' 서두에서 <녹색평론>은 환경잡지가 아니라 자신으로서는 또 다른 형태의 인문적인 노력이라고 강조하면서, "거의 강박적으로 내가 이 일에 붙들리게 된 것은 근원이 불확실한 충동 때문이었다"고 고백했다. 여기에는 물론 보리밭 소각 사건도 한몫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근원이 불확실한 충동'의 배후에는 그것보다 더 큰 시대적 분위기도 작용하지 않았을까. 1991년은 세계적으로도, 그리고 남한 내부로도 거대한 전환기였던 것이다.

▲ <간디의 물레>(김종철 지음, 녹색평론사 펴냄). ⓒ녹색평론사

1991년은 어떤 해였나

예컨대 1991년 1월 17일 걸프전이 시작됐다. 냉전 종식 후 첫 대규모 전쟁이다. 1990년 8월 2일 쿠웨이트를 무력 점령한 이라크군을 몰아내기 위한 '사막의 폭풍 작전'은 이후 약 5주간 10만 회의 공중폭격 후 2월 24일 미 지상군이 진공해 이라크군을 격퇴하면서 불과 100시간만인 2월 28일 종료됐다. 이라크군 사망자는 20만 명, 미군 150명 포함 다국적군 전사자는 378명에 불과한 압도적 승리였다. 마치 TV쇼처럼 전개된 이 전쟁을 통해 미국은 베트남 전쟁 이후 땅에 떨어진 군사적 위신을 회복했다. 그리고 냉전 종식과 함께 회복된 군사패권을 바탕으로 전 세계로 자본주의를 수출하는 세계화를 본격 추진했다. 이때부터 9.11테러가 발생한 2001년까지는 '팍스 아메리카나', 세계화의 시대였다. 그러나 이라크 후세인 정권을 제거하지 못함으로써 이후 2003년 대중동 전쟁이라는 수렁에 빠지는 계기가 된다.

1991년 3월 14일 두산그룹의 낙동강 페놀 유출 사건이 발생했다. 1990년 10월부터 구미시 두산전자에서 페놀이 다량 함유된 악성폐수 325톤이 식수원인 옥계천에 무단 방류된 사실이 밝혀졌으며 그 결과 박용곤 두산 회장이 퇴진했고 환경처 장관이 경질됐다. 이후 환경, 또는 공해 문제에 대한 대중들의 경각심이 높아졌다.

1991년 4월 26일 노태우 정부의 공안통치에 반대하는 대학생 시위에서 명지대 강경대가 경찰 구타로 사망한 것을 시작으로 박승희·김영균·천세용·김기설·박창수·윤용하·이정순·김철수·정상순, 그리고 5월 25일 성균관대 김귀정까지 한 달간 11명의 대학생, 노동자, 민주화 운동가 등이 경찰에 맞아 죽거나 분신·투신 자살했다. 이는 1990년 1월 22일 여당 민주정의당과 야당인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이 이른바 3당 합당을 통해 평화민주당을 고립시키고, 1988년 4월 총선 이후 4개 정당의, 어쩌면 해방 이후 가장 모범적이었던 대화와 협상과 합의의 정치를 뒤집은 것에 대한 반발이었다.

학생, 노동자들의 자살이 이어지자 시인 김지하는 5월 5일 자 <조선일보>에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며 '젊은 벗들에게 죽음을 이용하지 말라'고 '준엄하게' 꾸짖었고, 이에 대해 민주화 운동권을 격렬하게 반발했다. 5월 24일 박홍 서강대 총장은 <중앙일보>에 "우리 사회에는 죽음을 선동하는 어둠의 세력이 있다"며 색깔론을 펼쳤고, 검찰은 분신 자살한 민주화 운동가 김기설의 유서대필 혐의자로 강기훈을 지목해 1151일간 감옥에 가두었다.

1991년 8월에는 <동아일보> 편집국장 김중배가 사주 김병관에 의해 돌연 해임됐고, 그는 9월 6일 편집국 환송식에서 "1990년대가 열리면서 우리는 권력보다 더 원천적이고 영구적인 자본이라는 세력의 (언론자유에 대한) 도전에 직면하게 됐다"고 선언했다(이른바 '김중배 선언'). 훗날 김중배는 낙동강 페놀 방류 사건을 다루는 과정에서 대기업 비판에 대한 언론사주의 강력한 견제에 직면했다고 밝혔는데, 이후 2000년대가 되면서 '노무현보다 이건희가 훨씬 무섭다'는 게 언론계의 상식이 됐다.

한편 이 무렵부터 우리나라에 마이카 붐이 일었고,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노동자들의 소득배분율이 높아져 경제적 불평등이 완화됐으며, 김영삼 정권이 선진국 클럽이라는 OECD 가입을 위해 환율을 대폭 낮춤으로써(국민소득 1만 달러를 달성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달러당 환율을 800원대로 낮춤) 국민들의 실질 구매력을 대폭 높였다. 해외여행 붐이 시작됐던 것도 이때였고, 이러한 경제적 풍요는 1997년 말 IMF 외환위기 때까지 이어진다. 한마디로 산업화의 단맛을 누리기 시작한 것이다.

김종철이 이런 상황들을 모두 의식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새로운 종류의 사상투쟁이 필요하다"는 생각만큼은 확실했던 것 같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발언이 이를 말해준다.

"민주회복이 무엇보다 핵심적인 과제였던 시대가 우여곡절 끝에 서서히 물러나면서 지금까지의 정치적 투쟁보다도 훨씬 더 근원적인 투쟁 ― 생명과 인간성을 수호하기 위한 투쟁의 필요성이 절박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이미 늦어버린 싸움인지도 모르지만, 이것은 포기할 수 없는 싸움이었다. 우리 자신과 우리의 아이들의 삶터가 걷잡을 수 없이 허물어지고 있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의 모든 에너지와 열정을 야만적인 소득의 경쟁에 쏟아 붓도록 강요하는 산업체제의 논리에 순응한다는 것은 자존심 있는 인간이라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아닌가?"(<간디의 물레> 291쪽)

다시 장길섭의 회고.

"그해 초가을 무렵에 선생님의 대학원생 제자 한 사람이 창간호 원고가 들어 있는 서류봉투를 들고 제가 일하는 사무실로 찾아왔어요. 원고를 받아들고 얼마나 흥분했는지 몰라요. 원고는 전산입력을 하도록 사식집에 보내고 곧바로 잡지와 출판사 등록을 했어요(1991년 9월 17일). 표지 디자인은 제가 일하던 출판사의 거래처인 '정병규 디자인실'에 부탁했는데, 김종철 선생님을 알고 계셔서 염치없이 무료로 해달라는 부탁을 내치지 않고 선선히 두 개를 만들어주셨어요. 선생님은 더 단순하고 소박한 표지를 선택하셨는데, 나중에 보니 표지와 로고가 마음에 안 드셨던가 봐요. 저를 존중해서 1년간 사용하시고 7호부터는 표지를 바꾸셨죠.

낮에는 계속 출판사 일을 하고, 왕복 서너 시간 걸리는 출퇴근길 전철에서 창간호 원고 교정을 보았어요. 그렇게 해서 150페이지짜리 창간호 3000부가 11월 말경에 나왔어요. 제작비는 90만 원 조금 더 들었어요. 그리고 이듬해 1월 말에 2호를 만들고 대구로 내려갔어요. 선생님이 수성구 만촌동에 2층 독채를 전세로 얻어주셔서 제가 겨울에 먼저 내려가고 가족은 봄에 내려와 합류했죠. 선생님은 신문에 칼럼 쓰시고 인터뷰하시고 강연 다니시고, 만들어놓은 잡지를 읽어줄 독자를 찾느라 동분서주하셨고, 저는 선생님 강연회에도 따라다니고, 독자카드도 만들고, 서점에 영업도 하러 다니고, 우체국에 책 부치러 뛰어다녔는데 선생님 곁에서 일하는 것이 좋아서 힘든 줄도 몰랐어요. 제 인생에서 가장 설레고 행복했던 한때였죠."('김종철 선생님과 함께 했던 시간', <녹색평론> 174호 20202년 7/8월호, 15~16쪽)

<녹색평론> 창간호에는 '창간사 / 생명의 문화를 위하여(김종철)'를 비롯해 '함께 사는 길1 / 한살림 공동체운동의 실천과 사상(천규석)', '시애틀 추장 연설 / 우리는 결국 모두 형제들이다', 그리고 김종철의 1991년 7월 강연 '시의 마음과 생명공동체' 등이 실렸는데, 이 중에서 창간사와 아메리카 인디언인 시애틀 추장의 연설이 특히 많은 이들에게 감명을 준 것 같다.

▲ <녹색평론> 창간호와 김종철. ⓒ프레시안

생명의 문화를 위하여 : <녹색평론> 창간사

"우리에게 희망이 있는가? 지금부터 이십 년이나 삼십 년쯤 후에 이 세상에 살아남아 있기를 바라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 것인가?"로 시작되는 <녹색평론> 창간사 '생명의 문화를 위하여'에서 김종철이 말하고자 했던 바는 서구 산업문명이라는 것이 태생적, 본질적으로 폭력적, 파괴적 문명이며 오늘날 인류가 직면한 생태위기의 주범이라는 것, 우리가 인간적으로 좋은 삶을 누리기 위해서는 자연과 인간, 인간과 인간, 개인과 자기 자신과의 건강한 관계를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우선 "지금 상황은 인류사에서 유례가 없는 전면적인 위기"라고 규정하면서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전대미문의 이 생태학적 재난은 (중략) 서구적 산업문명에 내재한 논리의 필연적인 결과로서의 사회적, 인간적, 자연적 위기라는 사실을 명확히 인식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기계론적 우주관과 선형적 진보사관에 의지하여 전개되어온 지난 수세기의 근대과학기술의 성과는 이제 인류의 파멸까지도 배제하지 않는 지구생태계의 대재앙을 초래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해왔고 "생산과 소비의 양적 증가는 도리어 인간생활을 비참하게 만들어버린다는 비극적인 경험"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과학기술이 모든 어려운 문제를 해결해주리라는 어리석은 믿음이 지배하고 있다는 점도 오늘의 비극을 가중시키는 주요한 요인"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특히 서양의 근대문명을 이미 내면화한 대부분의 한국인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지난 백여년간 서양문화로부터의 충격 속에서 (중략) 모든 사람의 에너지를 경제성장과 산업화에 쏟아 부어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고, 그 결과 어느 정도는 물질적 성공과 서구적 생활방식의 모방의 가능성이 주어지는 것으로 기대되는 바로 그 시점에서, 다름 아닌 그러한 성공의 대가로 인간생존의 터전 자체의 붕괴를 경험해야 한다는 것은 한국 사람들로서는 참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고통일 것임이 분명하다. 이 시점에서 대다수가 문제의 본질을 제대로 못 보고, 적당히 짜깁기함으로써 위기를 벗어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오랜 기간 의심할 나위 없이 믿어왔던 삶의 목표와 우선순위에 대한 관점을 근본적으로 변경할 만한 심리적 준비가 되어있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바로 가기 : <녹색평론> 창간사 '생명의 문화를 위하여')

지금 직면한 생태위기가 "단순한 외부적 재난이 아니라 삶에 대한 우리 자신의 기본 가정 자체의 결함" 때문임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즉 물질적 생활 수준의 향상을 삶의 제일 목표로 삼아온 데 대해 근원적 질문을 제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김종철에 따르면, "사람의 초월에 대한 욕망은 인간성에 깊이 내재하고 있는 충동"이고 "삶의 최고 형태는 명상하는 삶"이며 "사람의 명상할 수 있는 능력은 개인이 자기보다 더 큰 전체, 공동체나 자연이나 우주적 전체 속의 작은 일부로서 스스로의 존재를 느끼고 사색할 줄 아는 습관 속에서 길러지는 것"이다.

문제는 현대 산업사회가 "이러한 의미에서의 인생의 의미를 완전히 몰각(沒覺)해 왔다"는 것이다. 사람의 에너지를 온통 소득과 소비의 경쟁 속에 쏟아 붓도록 강요하는 오늘의 지배적인 산업문화는 인류사에서 극히 예외적인 생활 방식이며 동시에 지속가능하지 않은 생활 방식이다.

따라서 지금부터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들 각자가 자기 개인보다 더 큰 존재를 습관적으로 의식할 수 있게 하는 문화를 회복하는 일"이며 이러한 생명의 "문화의 재건은 우리 각자의 인간적인 자기쇄신"이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

결론적으로 "우리와 우리 자식들이 살아남고, 살아남을 뿐 아니라 진실로 사람다운 삶을 누릴 수 있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협동적인 공동체를 만들고, 상부상조의 사회관계를 회복하고, 하늘과 땅의 이치에 따르는 농업 중심의 경제생활을 창조적으로 복구하는 것과 같은 생태학적으로 건강한 생활을 조직"해야 한다.

'생명의 문화를 위하여' '근본적인 자기 쇄신'이 필요하다는 김종철의 호소는 과연 어느 정도의 호응을 받을 수 있었을까?

* '녹색평론 김종철 약전'은 앞으로 3~4회 연재한 후 끝내고, 이후 '녹색평론 김종철 읽기' 연재로 이어갈 계획입니다. <녹색평론>이나 김종철 선생에 얽힌 일화나 추억, <녹색평론>을 통해 배웠거나 느끼고 깨달은 바가 있으신 분은 inkyu@pressian.com으로 글을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녹색평론 김종철 읽기' 연재를 통해 보다 보다 인간적인 사회를 위한 생각과 느낌을 서로 나눠 가지시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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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규

서울대학교를 나와 경향신문에서 워싱턴 특파원, 국제부 차장을 지내다 2001년 프레시안을 창간했다. 편집국장을 거쳐 2003년부터 대표이사로 재직했고, 2013년 프레시안이 협동조합으로 전환하면서 이사장을 맡았다. 남북관계 및 국제정세에 대한 전문 지식을 바탕으로 연재를 계속하고 있다. 현재 프레시안 상임고문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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