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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의 검사들에게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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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의 검사들에게 묻는다

[김종구의 새벽에 문득]

"그의 선택이 우리 회사에 어떤 오명을 덧입혔는지는 삼척동자도 알 일이다. 자신은 영예를 누릴지 모르나, 우리는 그가 남긴 오명을 피할 도리가 없다."

"정치부 기자가 정당 공천을 받아 총선에 출마하기 위해 회사를 그만둔 것은 공정성을 생명으로 하는 회사의 이미지를 심각하게 훼손한 중대한 사태다."

어느 방송과 신문의 현직 기자가 갑자기 정치권으로 직행하는 사태가 벌어졌을 때 해당 언론사 기자들이 발표한 규탄 성명의 한 구절이다. 기자들이 느끼는 당혹감과 분노가 성명에서 고스란히 전해진다. 현직 언론인이 곧바로 정치권으로 옮겨가는 것은 어떤 명분으로도 합리화될 수 없다는 게 언론계 안에서는 상식이다. "일부 언론인의 시대착오적 행보는 언론 전반에 심대한 폐해를 가져온다. 언론의 신뢰, 기자 집단의 자기 정체성과 직업윤리 등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며, 남아있는 언론인들의 긍지를 무너뜨리고 조롱과 비난의 대상으로 만든다." (김세은 강원대 교수, '언론인의 정치직행에 대한 비판과 대안')

현직 검찰총장이 옷을 벗자마자 곧바로 대선에 뛰어드는 것은 어떤가? 뉴스 제작의 최고 사령탑인 편집(보도)국장이 갑자기 어떤 정당의 대변인으로 변신하는 것에 비유하면 쉽게 설명이 될까. 그런 사태가 벌어지면 해당 언론사의 그동안 보도는 곧바로 불공정 시비에 휩싸이게 된다. 정치권 진입을 준비해온 편집·보도국장이 지휘해 만든 언론 보도의 공정성과 객관성을 누가 믿어줄 것인가. 사실 이것도 적당한 비유가 되지 못한다. 검찰총장의 대선 출마는 비슷한 예를 찾기 힘들 정도로 비상식의 극치다.

그런데도 이 땅의 검사들은 쥐죽은듯이 조용하다. 그동안 곧잘 검찰의 중립성이 침해됐다며 평검사 회의 소집 등 집단행동을 불사하던 용감한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검경 수사권 조정 등 검찰 조직이 위협받는 상황에 분연히 일어나 검찰 내부통신망에 열심히 글을 써대던 검사님들도 자취를 감추었다. 위에 인용한 현직 언론인의 정치권 직행 비판 글에서 언론을 검찰로, 기자를 검사로 바꾸면 윤석열 전 검찰총장의 대선 출마 폐해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의 시대착오적 행보는 검찰 전반에 심대한 폐해를 가져온다. 검찰의 신뢰, 검사 집단의 자기 정체성과 직업윤리에 부정적 영향을 끼치며, 남아있는 검사들의 긍지를 무너뜨리고 조롱과 비난의 대상으로 만든다." 하지만 지금 검찰은 물속처럼 고요하다. 검사들이 그처럼 자랑하던 자존심과 긍지는 어디로 갔는가. 검사 집단의 직업윤리는 애초부터 존재라도 했던 것인가?

'권력의 사유화'. 윤 전 총장이 현 정권을 비판하며 대선 출마 명분의 하나로 내세우는 말이다. 하지만 정작 자신의 야망 실현을 위해 검찰 조직과 권한을 사유화한 사람은 윤 전 총장 본인이었다. 선택적 수사, 선택적 기소라는 막강한 권력을 휘둘러 몸값을 올리고 급기야 수구보수 진영의 대선주자로 출사표를 던진 것을 두고 권력의 사유화라는 말 외에 달리 뭐라 표현할 것인가?

"지지율이 모든 것을 말해준다. 검찰 중립성 침해가 아님은 윤 전 총장에 대한 국민의 높은 지지로 확인된다." 윤 전 총장의 정치 행보가 검찰 중립성 훼손이 아니라는 근거로 내세우는 논리다. 얼토당토않은 궤변이다. 윤 전 총장은 '장모 구속'이라는 악재를 만나 벌써 지지율이 출렁일 조짐을 보인다. 만약 지지율이 계속 하락해 바닥으로 내려가면 그때는 검찰의 중립성 훼손이라고 판정할 것인가? 지지도 숫자를 끌어다가 검찰 중립성 문제를 설명하는 게 논리적으로 얼마나 하자투성이인지는 머리 좋은 검사들이 더 잘 알 것이다. 윤 전 총장에 대한 지지는 검찰의 중립성이나 수사의 공정성 등에는 관심이 없이 현 정권에 대한 증오와 반감으로 가득 찬 사람들의 무조건적 박수갈채에 불과하다.

지금 대다수 검사들은 윤 전 총장의 정치 행보에 부끄러움과 자괴감을 느끼기는커녕 오히려 응원의 박수를 보내고 있는 듯하다. 그동안에도 "대한민국은 검찰공화국"이라는 말이 무성했으나 이제는 '명실상부한 검찰공화국'이 목전에 도래했다는 기대감도 느껴진다. 윤 전 총장이 대선 출마 선언 직전 가까운 후배 검사들에게 전화를 걸어 "흔들리지 말라"고 격려한 것은 해당 검사들만이 아니라 전체 검사들을 향한 메시지로 읽힌다. ”이제 명실상부한 우리 검찰 세상이 온다. 흔들리지 말고 일치단결해 나를 밀어다오!" 윤 전 총장이 대통령이 되는 것은 지금까지 유구하게 이어진 '검란' 역사의 대미를 장식하는 일이며, 검찰이 완벽하게 대한민국을 장악하는 신천지의 도래를 의미하는 것이니 어찌 검사들로서는 가슴 뛰는 일이 아니겠는가.

검사들 중에는 윤 전 총장의 정치 행보가 잘못됐다고 느끼는 사람도 없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모두 침묵의 카르텔에 동조한다. '신성가족'의 찬란한 미래에 조금이라도 누를 끼쳐 조직의 배신자로 왕따 당하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상식과 이성을 배반하고, 검찰의 정치적 중립에 대한 국민의 열망을 배반할지언정 검찰 조직을 배반할 수 없다는 눈물겨운 충정이다.

"그의 선택이 우리 조직에 어떤 오명을 덧입혔는지는 삼척동자도 알 일이다. 자신은 영예를 누릴지 모르나, 우리는 그가 남긴 오명을 피할 도리가 없다. 그의 행보는 정치적 중립성과 수사의 공정성을 생명으로 하는 검찰 조직의 이미지를 심각하게 훼손한 중대한 사태다." 정신이 올바로 박힌 검사라면 당연히 이렇게 외쳐야 한다. 언론계도 이 사회에서 적지 않게 손가락질을 받는 조직이지만, 현직 기자의 정치권 직행에 곧바로 규탄 성명을 발표하는 최소한의 양식과 상식이 작동한다. 검사들은 평소 기자들을 은근히 눈 아래에 두는 경향이 있는데, 이번에 보니 직업윤리, 자기 정체성, 긍지, 자존심 등이 언론계 사람들에도 훨씬 못 미친다.

검사들은 착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윤 전 총장의 대선 출마는 명실상부한 검찰공화국의 도래가 아니라 검찰 조직의 완벽한 몰락의 서막으로 다가온다. 오염된 공기에서 오랫동안 호흡하고 살다 보면 뇌의 정상적인 판단 기능이 마비된다. 지금 검찰의 모습이 그렇다. 비상식의 극치라 할 검찰총장의 정치권 직행, 이런 비상식적 행동을 용인하고 응원하는 검사들의 비이성적 행태가 이를 웅변한다. 잘못된 조직문화의 오염된 공기가 자신들의 이성과 상식을 얼마나 마비시켰는지를 검사들만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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