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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양동천 이화정"...탈춤, 고개잡이의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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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양동천 이화정"...탈춤, 고개잡이의 혁명

[탈춤과 나] ⑤ 연천중학교 교사 김순희의 탈춤

봄...

19살, 그 사건이 있기 전까지 내게 봄이란 바람이 몹시도 불던 계절이었다. 무거운 책가방을 들고 넓은 플레어스커트 교복 치마를 입고 노란 개나리 꽃길을 걷다가 예고 없이 불어닥치는 모래바람에 놀라 치마 자락을 감싸쥐면서 주저앉았던 봄은 내 고향 속초를 떠나 봄에도 바람이 불지 않아 낯설던 서울로 대학을 오면서, 그리고 그 어마어마한 사건을 겪으면서 끝이 났다.

봄이 와도, 혹시나 해서 예쁜 속치마를 사달라고 어머니를 조르지 않게 되면서 내 소년기가 끝나고 성인기가 시작되었다. 그 후 봄은 역겨운 최루가스와 함께 왔고, 거리로 나가야 할 것인가, 대동제 공연 준비를 위해서 학교에 머물러 있어야 할 것인가 하는 논쟁의 계절이 되었다. 그 갈등 속에서 어렵게 준비한 공연은 대부분 전경들이 교내로 진입하면서 도서관 농성에서 치러지곤 했다. 그 간극 사이에 1985년 19살의 봄날, 서울대 자연대 식당 뒤, 지금은 테니스장으로 변해버린 공터에서 벌어진 그 사건이 있었다.

강원도에서 올라와 지하철이라는 것을 어떻게 타고 내려야 하는지도 모르고, 지하철의 안내 방송이 귀에 익지 않아 역 이름을 귀로 잡아내지도 못하는 긴장상태에서 나는 그렇게도 꿈꾸어 왔던 넓은 세계로의 첫 대면 앞에 초라하게 주눅이 들어 있었다. 그 시절 걸핏하면 얼굴이 빨개지곤 했던 내가 내 삶에서 가장 용기 있는 결단을 내리고 일을 저질렀으니, 그건 바로 서울대 학생회관 419호실의 문을 두드린 사건이었다. 내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이건 사건의 발단이다.

그 뒤 자연대 식당 뒤 공터에서 탈춤을 배웠다. 첫날 나는 하늘색 긴 게더스커트를 입고 갔다. 당연히 나무 그늘에 앉아 지켜보기만 했다. 그래도 선배들은 야단을 치지 못했다. 귀볼까지 빨개지면서 치마 자락을 감싸고 한 마디 말도 못한 채 수줍게 앉아 있던 나는 선배들한테는 그저 던져진 황당함이요 어마어마한 과제였음이 분명했다. 하지만 교복 치마 자락에 갇혀 봄바람에 주저앉으면서 자라왔던 정숙한 내겐, 아니 보통의 19살 여자애한테는 너무나 당연한 봄날의 태도가 아닌가...

선배들은 탈반-당시 민속가면극연구회-에 적합한 아이가 아니다, 생각했을 것이다. 저러다 사라지겠지... 그러나 다음 연습에 나는 또 귀볼까지 빨개진 채 헐렁한 청바지를 입고 거기에 갔고, 그날 운명적인 사건과 대면하게 되었다.

▲1985년. 탈반 첫 춤 연습 당시 어색하게 나무 그늘에 앉아 손 둘 곳을 모르던 19살. ⓒ김순희
▲사진6. 지리산 천왕봉에서 ‘분단 조국의 통일을 염원하며’... ‘놀이패 한두레’ 단원들과 ⓒ김순희

"고개잡이"

봉산탈춤, 아니 모든 우리 춤의 기본이랄 수 있는 이 몸짓 앞에 우리 신입생 계집아이들은 빨간 얼굴들이 더 빨개져서 어쩔 줄을 몰랐다. 양다리를 어깨 넓이만큼 벌리고 서서 타령장단에 맞춰 허벅지를 벌린 채 기마 자세, 더 내려가면 푸세식 화장실 자세로 앉았다가 일어서는 그 몸짓이 너무나 곤혹스러웠던 것이다. 아예 책상다리를 하고 앉는 건 몰라도 남들 앞에서 그런 자세를 취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우리들은 허벅지를 모은 채 고개잡이를 했다. 선배들은 놀려댔다. 그러나 남자선배나 동료들은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지점이 있었다. 허벅지를 벌리고 털썩 내려갔다가 올라오는 그 몸짓이 교복치마의 이데올로기 속에서 자라온 우리들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충격이었다. 그런 자세를 강요하는 곳에 내가 존재하게 되리라곤 상상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3월, 4월이 흘렀다. 나는 고개잡이와 치열한 한판 싸움을 벌였다. 결코 쉽지 않았다. 낯설고 부끄러운 몸짓을 강요받는 상황이 미웠지만, 한 번 들인 발걸음을 좀처럼 거두지 못하는 단순함 때문에 그 상황과 결별하지 못한 채 타령장단 속에서 허벅지 사이의 거리가 서서히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변하기 시작했다. 다른 몸짓들이 고개잡이 위에 겹쳐졌고, 그 몸짓들을 받아들였다.

고개잡이의 기마 자세에서 바야흐로 호흡을 내 몸에 든실하게 담을 수 있게 되었고, 오금과 돋음새로 호흡을 추이는 것을 알게 되었고, 무게중심을 찾으면서 한 걸음에도 땅의 무게가 무엇인지 느끼게 되었고, 하늘로 도약했다 착지하는 데 필요한 굴신에서 흑백의 경계를 허무는 법을 배웠다. 아름다운 사위들이 그 안정감 위에 꽃을 피우고...

그리고 공간이 왔다. 긴 수평선을 사이에 두고 70대 30의 비율로 나눠져 있는 하늘과 바다 그 사이에 바람의 흐름... 내 공간감이었다. 하지만 내 몸이 뛰고 앉고 걷고 가르면서 공간 안으로 들어가자 그 광활한 공간이 잡히기 시작했다. 그 공간을 둥근 마당 안으로 들이고 그 속에서 태극으로, 혹은 원으로, 직선으로, 달팽이로, 떼로, 또는 홀로 노니면서 공간 속에 존재함을 느꼈다.

▲대학 3학년 가을, 87년 6월 항쟁의 열기가 채 가시지 않은 가을 대동제에서 대학 정문에 장승을 세우며 굿을 올렸다. 나는 어느덧 관악의 무당이 되어 있었다. ⓒ김순희

불림...

“낙양동천 이화정”

가장 먼저 배운 봉산탈춤의 불림이다.

“나비야 청산 가자, 호랑나비 너도 가자.”

너무나 낭만적이어서 가장 좋아하는 양주별산대놀이의 불림이다.

마당에 등장하여 악을 청하는 운문조의 일종의 입장단이다. 소리가 크게 나오지 않으면 절대 장단을 쳐주지 않았다. 다시, 다시...“덩 쿵”하고 울리는 타령 장단 대신 장고 변죽을 신경질적으로 두드리는 “딱 딱딱따...”소리뿐... 에고. 조신한 나는 별 수 없이 또 소리를 지르려고 진땀을 뺐다.

그렇게 몸이 열리고 소리가 열리고, 그리고 세상이 열렸다. 열린 세상 속으로 들어가면서 시대와 만나고 역사와 만났다. 그리고 많은 소중한 만남들이 이어졌다. 대학 탈춤반 출신들이 결성한 놀이패 한두레와의 만남... 88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우리는 노동극을 만들어서 노동현장으로 공연을 다녔다. 깃발 몇 개와 머리띠, 사물, 의상 몇 벌을 봉고차에 싣고 서울, 인천에서 반월, 안양, 마산, 창원, 울산까지...

위장폐업 때문에 일자리를 잃고 공장을 점거하고 농성하는 여공들과 함께 밥을 먹고 공장 옥상에서 규찰을 서면서 나보다 어린 여성노동자들이 세상과 맞서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중학교 교사가 되어 살고 있다. 교복치마 밑에 반바지를 입고 말뚝박기를 하는 아이들을 보면 기쁘기 한량없는...

교사가 되어서도 탈춤전수를 취미 삼아 방학 중이면 가슴 설레서 탈춤을 찾아가곤 했었지만, 이제는 탈춤과 많이 멀어진 채 언젠가는, 언젠가는... 이를 갈면서 살고 있을 뿐이다.

삶이 시들해질 때, 내가 존재하고 있다는 충만함을 느끼고 싶을 때, 내 속으로 들어가 나와 만나고 싶을 때, 그리고 다시 무언가를 받아들이고 싶을 때 나는 춤을 추고 싶다.

나는 아직도 세상과 만나고 있고 내 앞에는 많은 변화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변화의 도전 앞에서 주눅이 들 때, 나는 언제나 고개잡이를 떠올리곤 한다.

교복 치마 속에 갇혀 있었던 자유, 자연스러움, 천진함, 유연함을 되찾게 해준 회귀의 몸짓, 몸을 만만하게 보지 않게 해준 사유의 전도, 몸을 죄악시하는 가부장적 여성관과의 결별의 단초, 무릎 밑에서 위로... 치마 길이의 상징의 억압을 떨쳐버리고 제멋대로 입을 수 있게 해준 몸으로 익힌 혁명...(2002년)

글쓴이 김순희 : 서울대 민속가면극연구회 85학번, 연천중학교 교사, 서울교사극단 징검다리 단원

▲교사가 되어 학생들과 함께, 풍물과 탈춤을 가르치며 놀며...ⓒ김순희

[탈춤과 나] 원고 청탁서

새로운 언론문화를 주도해가는 인터넷 신문 <프레시안>(http://pressian.com)이 <사)민족미학연구소>와 <창작탈춤패 지기금지>와 함께 탈춤에 관한 “이야기마당”(칼럼 연재)을 기획하고 있습니다.

젊은 시절 탈춤이 좋아서, 쏟은 열정이 오롯이 담긴 회고담이거나 증언, 활동일지여도 좋고 아니면 현금 문화현상에 대한 어기찬 비판과 제언 형식의 글이어도 좋습니다.

과거 탈춤반 출신의 세대에게는 아련한 추억을, 신세대들에게는 다소 생소한 전통문화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글 내용이면 충분할 것입니다. 한 때나마 문화패로서 탈꾼으로서 개성넘치는 숨결을 담아내면 참 좋겠지요.

글 말미에는 대학탈춤패 출신임을 밝혀주십시오(대학, 학번, 탈춤반 이름 및 현직)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사진(1-5매)이나 시청각 자료도 곁들여 캡션을 달아 보내주시면, 지난 기억이 되살아나 더욱 생생한 느낌을 전달해줄 것입니다.

알뜰살뜰한 글과 사진제공에 대한 원고사례비는 제공되지 않고, 다만 원고가 묶여져 책으로 발간될 때 책 두 권 발송으로 사례를 대신합니다.

제 목 : [탈춤과 나] (부제로 각자 글 나름의 자의적인 제목을 달아도 좋음)

원고 매수 : 200자 원고지 15-30매(A4 3-5장)

원고 마감 : 2021년 9월 30일

(사진 등 시청각 관련 자료 캡션 달아 첨부하면 더욱 좋음)

보낼 곳 :

(사) 민족미학연구소 (namihak@hanmail.net) 채 희 완 (bullim204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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