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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탈춤, 그 시작은 불손하였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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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탈춤, 그 시작은 불손하였으나...

[탈춤과 나] ④ 국가무형문화재 이주원의 탈춤

안동은 어디서든 탈을 쉽게 볼 수 있었다. 시내 자주 가는 레코드가게 간판에 하회탈이 그려져 있었고, 맞은편 가게에서는 탈과 안동소주 등의 안동시 관광상품을 파는 가게가 있었다. 하회마을로 소풍을 간 적도 몇 번 있었지만 하회별신굿탈놀이를 직접 본 적은 없었다. 누나가 언젠가 하회별신굿탈놀이를 보고 뚱뚱한 사람이 턱이 없는 탈을 쓰고 바보처럼 행동하는 모습이 재미있었다고 말해주었던 기억이 있다. 훗날 그 탈을 쓰면서 춤을 추게 될지 그땐 미처 알지 못했지~

고등학교 전까지 탈춤을 접해 본 적이 없었다. 공부를 잘하지 못한 내가 들어간 학교에 민속반이(탈춤, 풍물) 있었고, 동아리 모집 시기에 민속반은 교내 그 어떤 동아리들보다 모집에 열을 올렸다. 쉬는 시간 장터 같은 1학년 교실에 들어와 한순간에 분위기를 제압해 동아리 소개와 가입을 권하는 선배의 모습도 멋졌지만, 민속반 활동을 하면 여학교 동아리들과 교류가 많다는 것이 남중을 나와 남고를 진학한 나에게는 민속반을 선택하게 된 결정적 이유였다.(안동은 남녀공학 학교가 거의 없었고, 민속반 선배들은 약속을 지켰다)

그렇게 들어간 민속반은 학교폭력의 온상이었고, 탈선의 현장이었다. 친구도 같이 술담배 시작한 친구가 죽마고우가 되듯이, 폭력과 탈선은 전우애를 형성하여 졸업한 선배들은 대학생과 직장인 혹은 군인이 되어 종종 술이며 안주를 사들고 학교를 찾아와 후배들을 격려했고, 대학생이 되어 자신이 알게 된 대학문화, 노래와 게임 등을 전파하기도 했다. 그렇게 한 학기를 선배들에 대한 공포와 존경, 동기들과의 전우애, 취기와 신명이 함께 어울러져 손에서 피가 흘러도 북채를 놓치지 않는 깡으로 버티며 보냈다.

여름방학이면 하회마을에서 일주일간 하회별신굿탈놀이 전수가 시작된다. 전수는 당시 전수조교였고 현재는 예능보유자인 임형규 선생님과, 당시 이수자였고 후에 보존회를 떠나 지금은 돌아가신 지병근 선생님이 담당하셨다. 두 분 선생님을 사부라 불렀고 지병근 사부님(이하 지사부)은 전수기간 동안 상주를 하시며 탈춤 전수와 함께 전수생들의 생활까지 돌보시는 분이라 선배들도 지사부님과의 관계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1996년 고1학교 예술제 공연에서 하회별신굿탈놀이중 강신마당을 연행하고 있다. 왼쪽부터 다섯번째 파계승 복색을 한 사람이 필자다. ⓒ이주원

탈춤전수가 좋은 이유는 운이 좋으면 여자학교와 탈춤전수를 함께 할 수 있기도 했고, 대학생들과 함께 어울릴 수 있던 것이 특히 좋았다. 당시 3,4개 정도의 대학교 탈반에서 전수를 들어와 함께 땀을 흘렸던 기억이 난다.

제법 큰 한옥 대청마루에서 춤을 배웠고, 원형마당에서 연습을 했다. 전수관 옆에는 통곡의 숲이 있어, 거기서 연습을 하기도 하고 집합을 하기도 했다.

그 한여름 뙤약볕에서 함께 춤을 추며 밥을 먹고 잠을 잤다. 평소 노래든 춤이든, 시키든 안 시키든, 빼지 않고 나서는 나는 대학생 형 누나들의 예쁨을 많이 받았다. 선배들도 빼지 않고 분위기를 띄우는 내가 예뻐보였는지 대학생 형 누나들과 함께 하는 은밀한 술자리에 나를 부르기도 했다.

대학생 형 누나들과의 대화를 통해 90년대 중후반 대학의 분위기를 조금 느낄 수 있었고, 탈춤이 70, 80년대 저항적 민중문화운동의 상징이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들이 학교로 돌아가 하회별신굿탈놀이를 각색해 만든 극은 보지 못했지만 당시 대학생에게 배웠던 직녀에게, 청계천8가, 돈타령, 해 뜨는 나라 등의 노래들을 통해 그 사상에 젖어들기도 했다.

그렇게 함께 울고 웃으며 춤을 추고 마지막 날 발표 공연을 할 때는 탈을 쓰고 있는 것이 답답하기도 하고, 채 여물지도 않은 춤과 대사가 소화가 되지 않아 공연 중에 빨리 탈을 벗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공연을 마치고는 소화 되지 않은 것들이 눈물로 토해져 나왔다. 그렇게 나와 탈춤과의 인연이 시작 되었다.

고등학교 3년 동안 공부를 등한시하고 민속반 생활을 성실히 수행한 덕에 나를 포함하여 동기 5명이 졸업과 동시에 하회별신굿탈놀이보존회에 입회하여 탈춤보존회 생활을 시작하였다. 하회별신굿탈놀이는 전승지인 하회마을에서 상설공연도 진행하고 있었고, 1999년 영국 엘리자베스여왕이 방문하면서 하회마을과, 하회별신굿탈놀이에 관한 세계적 관심이 생기면서 크고 작은 공연을 참 많이 했다. 덕분에 용돈에서 독립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고, 공연하고, 술 사 먹고, 공연하고, 술 사 먹고, 베짱이 기질을 뽐내며 즐기고 있을 때, 국방부에서 어떻게 알았는지 정신 차리라며 입영통지가 왔다.

군대를 전역하고 평일에는 회사를 다니고, 주말에는 탈춤을 추며 생활을 이어가던 중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연희과에서 하회별신굿탈놀이 전수를 들어왔다. 비슷한 또래의 친구들이 전통예술을 학습하는 모습이 부러워 보였다. 알아보니 수능을 안 보는 학교였고, 시험을 안 볼 이유가 없었다. 입시에 필요한 공부를 하고 시험을 보니 운 좋게 합격이 되었다. 그렇게 25살에 서울로 유학을 오게 되었고 탈춤과의 인연은 더 깊고 넓어지게 되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연희과를 다니면서 내가 하고 있는 탈춤에 대한 불만 혹은 한계들이 스믈스믈 올라왔다. 연희과에 탈춤 전공이 적다보니 관련 수업이라던가, 공연활동이 제한적이었다. 그리고 전통의 원형과 전승이 중요하던 보존회를 떠나 연희극이라고 이름 붙여진 창작극의 실험이 한창이던 당시 연희과 분위기에 따라 지금 탈춤의 모습을 상상하게 되며, 정체된 탈춤의 이야기가 흘러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함께 연희과를 다니던 봉산탈춤 손병만, 고성오광대 허창열 등과 탈춤으로 지금 이야기를 해보자며 의기투합하여 2006년 천하제일탈공작소를 만들게 되었다. 연극원을 다니던 친구들의 도움으로 얼기설기 어설프게 만들어진 공연은 뜻밖에 동료들의 응원과 선생님들의 도움으로 심심치 않게 무대가 만들어지게 되었고 그 덕분으로 천하제일탈공작소는 꾸준히 이어져 16년이 지난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

▲2013년 천하제일탈공작소가 볼리비아 코차밤바에서 레지던시 중 공연을 마치고 관객들과. 맨 오른쪽이 필자 ⓒ이주원

천하제일탈공작소를 만들고 많은 일들이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안동 하회별신굿탈놀이에 등장하는, 장애를 가지고 어리숙한 이매라는 인물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계기가 되었다. 하회별신굿탈놀이의 이매는 걸음걸이가 춤 화되어 춤 작품으로서 한계가 있어서, 이매로서 춤을 추어 독무화 시키는 과정을 긴 시간을 들여 실험하고 발전시키고 있다. 그리고 천하제일탈공작소라는 단체명과 동일한 첫 창작작품부터, ‘추셔요’와 ‘짜라투스트라의 하산 첫날’ 이라는 작품을 제작하였다. 그중 ‘추셔요’는 2010년 창작연희 작품공모에서 대상을 수상하였다.

그 후 단체로서 가장 큰 일은 창단부터 대표를 맡아온 봉산탈춤 손병만 형님의 부재이다. 연희과 입학동기이면서, 나에게는 봉산탈춤 선생님이기도 하며, 대책 없이 서울로 온 촌놈에게 선뜻 월세방 보증금을 빌려주기도 한 큰 형이었다. 형이 보증금을 내준 옥탑방에서 함께 탈춤의 미래를 이야기 하며, 화도 내고 웃기도 하다 잠에 든 날이 숱하게 있었다. 단체를 운영하며 크고 작은 부침이 있었지만 탈춤이란 울타리 안에서 함께 춤을 추며, 부침들을 넘겨냈다. 하지만... 2013년 10월 형님 홀로 세상을 떠나보내게 했던 것이 죄송하고 죄송한 마음이다.

형님하면 떠오르는 모습들이 몇 가지가 있다. 당연히 봉산탈춤을 추는 모습과 함께, 평소 “으이그 으이그” 하는 푸념과, 바닷가 모래사장을 갔을 때도, 볼리비아 우유니 사막을 함께 갔을 때도 형님이 쪼그리고 앉아 그렸던 “천탈 forever”... 단체의 대표로 맏형으로 선배 탈꾼으로 동생들을 이끌던 형님이 떠나가고 천하제일탈공작소는 두 명의 탈꾼만이 남게 되었다.

형님이 돌아가신 후 천하제일탈공작소는 우울한 침체기를 보내던 중 하늘에서 형님이 “으이그 으이그” 하는 푸념과 함께 ‘저 녀석들 안되겠다’ 라는 마음이 들어 우리를 굽어 살피셨는지 짧은 침체기를 보내고 크고 작은 사업에 선정이 되고, 함께하는 동료들을 만나게 되어 창작작품으로 ‘오셀로와 이아고’ ‘삼대의판’ ‘열하일기’을 제작 발표하였고, 전통 레파토리로 ‘탈&춤’ ‘탈바꿈’ ‘가장무도’를 제작하여 현재에 이르게 되었다.

아직 천하제일탈공작소는 실험 중이다. 꾸준히 창작작품을 올려 지금 탈춤을 더듬더듬 더듬고 있고, 두 명의 탈꾼을 넘어서 우리와 같은 고민을 가지고 있는 함께 할 수 있는 탈꾼들과 연합하여 정체되어 있는 탈춤이 흘러 흘러 관객의 마음에까지 흘러 함께 덩실덩실 할 수 있는 흐름을 더듬고 있다.

여학생들과의 만남을 기대로 시작한 고딩과 탈춤의 인연이 흐르고 흘러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 그러고 보면 짧은 인생이지만 세상사 알 수 없음을 실감한다. 앞 세대들이 탈춤을 추고 만들었던 각오에 비하면 작고 부끄러운 탈춤의 길이지만 지금 나로서 우리로서 가고 있는 최선의 길을 선택하며 가고 있다. 그런 와중에 혹시 놓치는 게 있을까, 채희완 선생님으로 대표되는 앞세대 선생님들과의 인연을 만들어 말씀을 청해 듣고 있다.

최근 올린 천하제일탈공작소의 신작 ‘열하일기’에서 연암 박지원이 알려준 탈춤의 길은 “경계에 선 탈춤“ 이다. 경계에 서서 전통과 지금의 사이의 길을 가보고자 한다. 그 길에 계속 물음을 던지다보면 세상사 알 수 없듯이 어딘가에 가 있지 않을까 싶다.

나와 탈춤과 이매와 천하제일탈공작소, 손병만 형님처럼 그려본다. “천탈 forever 탈춤 forever”

글쓴이 이주원 : 1996 안동중앙고등학교 민속반 덧배기, 국가무형문화재 제69호 하회별신굿탈놀이 이수자, 천하제일탈공작소 공동대표

▲2021년 5월 여의도 한강공원에서 천하제일탈공작소 동인들과 함께. 2열 왼쪽부터 박용휘 피디, 장수현 사진작가, 강릉관노가면근 김문겸, 송파산대놀이 이효녕, 동래야류 김이대, 하회별신굿탚놀이 이주원, 양주별산대 김지훈,고성오광대 하창열, 수영야류 강모세, 강령탈춤 노병유, 통영오광대 나신영, 가산오광대 김태호. 1열 왼쪽부터 박귀섭 사진작가, 봉산탈춤 윤원중, 은율탈춤 최민우, 강령탈춤 박인선, 북청사자놀음 김재민, 민현기, 김은정 피디 ⓒ이주원

[탈춤과 나] 원고 청탁서

새로운 언론문화를 주도해가는 인터넷 신문 <프레시안>(http://pressian.com)이 <사)민족미학연구소>와 <창작탈춤패 지기금지>와 함께 탈춤에 관한 “이야기마당”(칼럼 연재)을 기획하고 있습니다.

젊은 시절 탈춤이 좋아서, 쏟은 열정이 오롯이 담긴 회고담이거나 증언, 활동일지여도 좋고 아니면 현금 문화현상에 대한 어기찬 비판과 제언 형식의 글이어도 좋습니다.

과거 탈춤반 출신의 세대에게는 아련한 추억을, 신세대들에게는 다소 생소한 전통문화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글 내용이면 충분할 것입니다. 한 때나마 문화패로서 탈꾼으로서 개성넘치는 숨결을 담아내면 참 좋겠지요.

글 말미에는 대학탈춤패 출신임을 밝혀주십시오(대학, 학번, 탈춤반 이름 및 현직)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사진(1-5매)이나 시청각 자료도 곁들여 캡션을 달아 보내주시면, 지난 기억이 되살아나 더욱 생생한 느낌을 전달해줄 것입니다.

알뜰살뜰한 글과 사진제공에 대한 원고사례비는 제공되지 않고, 다만 원고가 묶여져 책으로 발간될 때 책 두 권 발송으로 사례를 대신합니다.

제 목 : [탈춤과 나] (부제로 각자 글 나름의 자의적인 제목을 달아도 좋음)

원고 매수 : 200자 원고지 15-30매(A4 3-5장)

원고 마감 : 2021년 9월 30일

(사진 등 시청각 관련 자료 캡션 달아 첨부하면 더욱 좋음)

보낼 곳 :

(사) 민족미학연구소 (namihak@hanmail.net) 채 희 완 (bullim204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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