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탈꾼들의 탈춤에 대한 경험과 생각을 공유하는 '탈춤과 나'를 주 2회 연재한다. 대학가에서 탈춤이 추어진 건 1969년 부산대 민속연구회가 처음이었으나 본격화된 계기는 1971년 9월 서울대 민속가면극연구회가 봉산탈춤을 추면서부터였다. 이후 1973년 연세대, 서강대, 이화여대, 고려대 등에 탈춤반이 생겨났다. 1960년대 중반까지 케케묵고 낡은 것, 근대화를 위해 버려야 할 것으로 여겨졌던 탈춤이 우리 민족의 주체적 삶을 위한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재발견되고 젊은이들에 의해 추어지면서, 이후 탈춤은 민주화와 민중문화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첫 번째 글은 서울대 민속가면극연구회 창설을 주도했던 채희완 부산대 명예교수의 글로 대학생 최초의 봉산탈춤 공연 상황과 당시 민속가면극연구회 지도교수였던 국문과 정병욱 선생(1922-82년)에 대한 추모가 담겨 있다. 잘 알려진 것처럼 정병욱 선생은 시인 윤동주의 벗으로 그의 시 원고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원고를 고이 간직해 햇빛을 보게 했던 장본인이다. 한국 고문학을 전공했던 그는 판소리에도 정통했을 뿐만 아니라 박정희 군사정권의 엄혹했던 당시 기꺼이 지도교수를 맡아 민속가면극연구회의 탄생을 가능하게 했다. 또 이 글에는 최근 작고한 고 이애주 선생과 채희완 교수의 첫 만남도 담겨 있다.
이 글은 원래 1999년 발간된 정병욱 선생 추모문집 <백영(白影) 정병욱의 인간과 학문>(신구출판사)에 ‘선비의 풍류’라는 제목으로 실렸던것이다.(편집자)
서울대 탈춤반과 정병욱 선생님
지금은 신세대가 가로를 누비는 젊은 문화풍물거리가 되었지만, 옛 서울대 문리대 교정이 있던 서울 동숭동 대학로를 지날 때면 거기서 보낸 대학시절의 한때가 눈앞에 아물거린다. 그러나 그러한 정경도 잠시, 바삐 오가는 인파의 발길에 채여 저만치서 이내 사라진다. 휘황한 불빛을 피해 골목길로 접어들면, 최루탄 연막처럼 밤안개가 자욱이 깔리는 매캐한 추억 속에 꿈속에도 못 잊을 탈춤 동아리시절이 생각난다. 거기서 몸 비비고 춤추며 같이 놀던 학우들의 얼굴이 제 생긴 대로 탈바가지가 되어 넌출거리며 다가온다. 그리고 거기에 정병욱 선생님의 탈이 후광처럼 겹쳐진다. 선생님은 초창기 서울대 민속가면극연구회의 지도교수이셨다.
1971년 9월 15일 하오 6시 30분, 문리대 과학관 앞마당, 창립공연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뛴다.
그해따라 때 이르게 물든 노란 은행잎을 모아 보료처럼 깔아놓고 여나문 군데 횃불을 둘러쳐서 원형무대를 만들고선 봉산탈춤을 올렸다. 대학 교정을 마당판으로 삼아 대학 탈꾼만으로 탈춤공연을 올린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공연 팜플렛에 실린 정병욱 선생님의 말씀대로 일체의 인공적인 요소를 배제하고 전래의 원형 그대로를 살리는 데 주력하였다. 이는 열성적으로 연희를 가르쳐주신 김기수 선생님 등 예능보유자 분들의 요망사항이기도 했지만, 순수한 학구적인 발표공연임을 누누이 강조해 오신 지도교수 정병욱 선생님이 중점적으로 지도․편달하신 핵심 내용이기도 하였다. 흔적 없이 사라지고 있는 ‘길놀이’와 ‘고사굿’을 되살려 판열음을 하고, 너나없이 판 안에 뛰어드는 ‘뒤풀이’로 끝맺음을 하도록 앞뒤판을 짰다. 옛 탈판의 정경을 재현하는 데는 무엇보다 관중의 적극적인 참여가 열쇠였다. 판을 열고 보니 관중의 호응은 예상을 넘어섰다.
여섯 달 남짓 익힌 몸짓에 판을 이끄는 솜씨가 무어 그리 대단했으랴마는 초가을 밤 일렁거리는 횃불 속 귀신 형용의 괴기스런 봉산탈에, 횃불보다 더 뜨겁게 몸을 달구는 낭자한 풍악소리가 분위기를 돋구어낸 덕분이리라. 피리명인 박동신, 오명옥 선생님을 비롯하여 최경명, 김용익, 김선봉, 양소운, 윤옥 선생님 등 예능보유자와 전수자분들의 3현6각 반주 음악도 그려하려니와 “얼쑤, 잘한다, 그렇지”하고 흥을 부추겨 마지않는 이분들의 추임새에 덩달아 멋도 모르고 맞장구친 것은 이에 익숙한 탈꾼보다 이런 판이 첫 경험인 관중이 더 먼저였을 터이다. 거리낌 없는 저항의식도 좋고, 웃고 넘어 제끼는 희극정신도 좋지만, 몸속 어디엔가 숨어있다 터져나오는 피부름같은 것이었을까. 춤사위도 재담도 하릴없이 탈꾼도 구경꾼도 어른거리는 횃불에 저마다 검붉은 얼굴을 하고 어떤 아지 못할 기운에 휩싸였던 것이다. 마치 신흥종교의 첫 집회인 양 하고, 이를 두고 집단적 신명체험이라고 한다면 그 말이 꼭 들어맞는 말일 것이다. 예상한 대로 판이 끝나고도 몸을 섞는 뒤풀이는 한참동안 이어졌다.
뒤풀이가 잘 돼야 공연이 잘 된 것이고, 공연은 뒤풀이 잘하자고 하는 것이라 하던가.
우리는 임시 연습실로 빌려 쓰던(사실은 무단 점거였지만) 교내 레스토랑이던 '학전' 옆 여학생휴게실로 돌아와 조촐한 술자리로 뒤풀이 중의 뒤풀이를 하였다. 이를 흔히 ‘쫑파티’라고 하였는데, 우리의 탈판식 뒤풀이는 지도교수님과 함께 평소부터 자주 연습해오던 터였다. 방금 끝낸 공연보다 훨씬 더 익숙한 또 다른 한판이었다. 모두들 중대한 정변이라도 일으킨 듯 그 옛날 거사를 도모한 끝에 드디어 고지를 점거하고 돌아온 장두들인 양 몸을 휘감는 동지감에 겨워하였다. 장두의 장두, 정병욱 선생님이 악수의 손을 청하시기도 전에 우리가 먼저 달려들어 선생님의 몸을 껴안았다. 선생님은 이를 허락하셨다. 탈춤 동아리 지도교수, 정병욱 선생님과의 몸섞음은 이에서 한 단락이 지어졌다.
교내에서 사람들이 모이는 것에 남몰래 비상한 관심을 기울이던 모처에서도 큰 탈 없이 끝난 대중집회가 밉지는 않았던 듯 뒷탈을 잡지 않았다. 탈춤의 역사민속학적 접근의 성과를 결집하신 이두현 선생님도 대학탈춤, 나아가 대학문화의 밝은 전망에 흐뭇해 하셨다. 예능보유자 선생님들도 이참에 전수자로 등록하여 같이 놀자고 유인하셨다. 학생회 쪽에서도 서양풍에 젖은 대학축전의 새로운 방향에 대해 더불어 논의하기 시작하였고, 시위문화의 새로운 방향전환도 아울러 모색하게 되었다.
당시 학생운동의 총본산이라 할 만한 ‘후진국사회연구회’에 관여하고 있던 회원도 적지 않았다. 그렇찮아도 데모하는 것은 당시 문리대생으로선 일상사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지도교수로서 선생님도 그걸 잘 알고 계셨고, 그럴수록 학구적인 발표공연여야 함을 강조하셨던 것이다. 일이 잘 풀려 창립공연의 파급효과가 예상치 않게 여러 갈래로 번져나갔다. 여기저기서 초청 공연의 주문이 들어오기도 했다. 분위기는 떴다고 해도 당시 탈춤반은 15년 남짓의 전통을 이어온 대학 연극반에 비해 학생회 배정 예산액이 10분의 1도 안되었다. 갓 상경해 신접살림을 차린 촌뜨기 동아리일 따름이었다.
떠난 지 오래되어 머나먼 고향이 되었지만, 그래도 언젠가 몸과 마음을 마지막 눕힐 민족문화의 근원지, 민중삶의 젖줄을 지켜내자는 집념 하나만으로 버티었다. “우리는 우리의 몸짓부터 익히자” “우리는 우리식대로 더불어 같이 놀자” “실기를 통한 이론의 추구” 등을 내세웠다. 이러한 초창기 대학탈춤을 알게 모르게 보살펴준 배후세력이 바로 정병욱 선생님이셨다. 선생님은 어려운 살림살이인 줄 남 먼저 아시고 아무도 모르게 창립공연의 팜플렛까지 신구출판사를 통해 손수 만들어 주셨다.
대학탈춤 동아리의 지도교수로서 대학 탈꾼들과 몸을 섞고
서울대학교 민속가면극연구회가 정식으로 출범한 것은 1971년 3월 25일이었다. 그 전 해에도 탈춤활동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등록단체가 아니었다. 당시 학교 내 동아리는 일정한 수속절차를 밟아 학교에 등록하도록 규정하고 있었는데, 회원의 확보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지도교수의 선임이었다. 문제성이 있을 가능성이 농후한 동아리에 선뜻 지도교수로 나서는 것은 그리 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탈춤연구의 권위이신 이두현 선생님을 지도교수로 모시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으나 사범대학에 재직하고 계셔서 등록요건에 맞지 않았다. 우리는 궁리 끝에 미학과와 국사학과, 국문학과 순으로 한국학 분야를 연구하시는 교수님들을 직접 면담하여 요청하기로 정했다. 며칠을 두고 순번에 따라 교수연구실 문을 두드렸으나 일은 수월치 않았다. 마침내 도서관이 있던 2층 복도의 맨 끝 방에 이르게 되었다.
그곳이 정병욱 선생님의 연구실이었다.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단단히 마음을 먹었으나 선생님은 계시지 않았다. 마침 그 방에서 따로 책상을 놓고 공부하고 계신 분이 있어 찾아온 용건을 자세히 말씀드렸다. 한눈에 깨끗한 선비 같은 인상을 받았는데, 낯선 만남인데도 정성스레 맞이하는 품에 우리의 조급한 심사는 한껏 풀어져 느긋함으로 바뀌고 용건 이외에 아니할 말까지 나누었다. 성사가 되리라는 밝은 전망을 가지고 나왔다.
알고 보니 그분은 1970년대 시단에 샛별처럼 등단한 정희성 시인이었다. 선생님의 엄명으로 연구실을 지키며 학문에 정진하는 중이었다. 나중에 선생님을 뵈옵고 느낀 바이지만 정갈하고 단아한 인품이 그 선생님에 그 제자였다.
우리는 그 다음날로 또 문을 두드렸다. 선생님은 안 계시고 정희성 시인은 늘 그래 온 듯싶게 자리에서 일어나 반가이 우리를 맞아주셨다. 그리고 다른 한 쪽의 책상머리에 있던 이애주 씨를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 그분은 (사범대 체육교육과) 대학원까지 마치고 학사편입으로 국문학과에 재학 중이었는데 선생님의 배려로 그 연구실을 지키는 또 한 사람이었다. 그 자리에서 회원에 가입하면서 격려의 말까지 건네주는 것이었다. 객지에서 친척누님을 만난 듯하였다.
우리는 그 다음날 이윽고 선생님을 뵈올 수 있었다. 선생님은 큰 말씀이 없으신 채 동아리 등록신청서에 서명을 하셨다. 우리는 울렁거리는 가슴을 쓰다듬고 떨리는 목소리로 회원들을 소개드렸다. 강철구(서양사학), 진홍순(동양사학), 서영수(동양사학), 윤대인(고고인류학), 박성주(중문학), 이상현(종교학), 민경환(심리학), 이기연(의예)…… 나중에 안 일이었지만 학생은 말할 것도 없고 국문학과 교수들조차 정병욱 교수 연구실 출입을 여간 어려워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선생님을 든든한 배경으로 삼아 시도때도 없이 들락거렸다.
학생시위로 휴강이 잦은 때라 우리는 탈춤연습에 시간의 제약을 크게 받지 않았다. 학업에 열중하기보다는 탈춤에 빠져있었기에 각자 전공보다는 마치 탈춤학과에 다니는 듯하였다. 선생님과 처음 언약한 대로 탈춤공부와 탈춤운동에서 아카데미즘을 지키려고 애썼다. 선생님은 이를 부추겨 이두현 저, <한국 가면극> 책을 건네 주셨고 우리는 이를 보물상자인 양 고이 받아 돌아가며 읽고 토론을 벌였다. 예능보유자 선생님들도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헌신적으로 가르쳐 주셨다. 가히 연중무휴 연습이었다. 그것의 중간점검이 창립공연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탈춤적으로 사고하고 탈춤적으로 살기를 다짐하였다. 결국 탈춤적이란 민중삶의 세계관이었고, 그것은 민중공동체의식의 사회화과정이었다.
우리의 공부는 이에서 머무르지 않았다. 선생님과 같이 하는 술자리는 전통적인 주도(酒道), 실습시간이었다. 음식을 시켜 놓고도 술잔을 마저 비우기 전까지는 안주에 손을 대지 못하였다. 내온 지 두서너 시간이 지나 두 젓가락을 갈라쥐고 비비려 해도 찰떡같이 붙어 떨어지지 않아 부풀어 터진 짜장면을 드시는 선생님의 마지막 안간힘을 흔하게 볼 수 있었다. 술자리 끝에는 차수 변경이 뒤따랐고 마지막 차수는 선생님 댁인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아침 해장국을 선생님과 댁에서 같이 하고나서 선생님은 출근하시고 우리는 등교하였다.
선생님은 때로는 취기가 그윽하셔서 기타를 잡으시고 흘러간 옛노래를 연주하시기도 하셨다. 판소리의 고법에 대해 꿰뚫고 계신 선생님으로부터 직접 실기지도까지 받은 우리들로서는 의아해하면서도 동서고금 풍류에 정통하신 점에 그저 놀라워하였다. 그러나 선생님의 애창곡은 뭐니뭐니 해도 <아침에 우는 새>였다.
나직한 목소리로 설렁제로 부르시다가 ‘두리둥실 놀고요’ 대목에 이르러 익숙한 발림에 어깨춤이라도 곁들여지기라도 하면 우리는 모두 일어나 마구잡이춤으로 술판을 난장판으로 몰고 가기 일쑤였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 노래는 “너녕(랑) 나녕(랑)”이란 제주도 잡요, 타령이었다.
가곡, 가사에도 일가견이 있으신 걸로 보아 판소리, 민요, 대중가요에 이르기까지 우리음악을 두루 섭렵하고 계신 선생님은 그럴 수 있기에 이화여대 판소리연구회의 창립을 크게 반기시며, 실기에 이해가 없는 이론이란 탁상공론에 지나지 않으니 많은 학생들이 판소리의 실기를 익히도록 권유하실 수가 있었던 것이다.
옛날 선비가 풍류를 즐김은 매양 당연한 소양이었으나 오늘날 어떤 학자가 있어 옛 풍류를 받아 오늘의 것으로 살려낼 것인가.
선생님은 대학 탈꾼과 대학 소리꾼들과 함께 몸을 섞어 선비적 풍류, 풍류적 선비상을 몸소 보여주셨던 것이다. (1999년)
글쓴이 채희완 : 서울대 민속가면극연구회 초대 회장, 70학번, 부산대 명예교수, 민족미학연구소 소장
[탈춤과 나] 연재를 위한 글모둠에 앞서
“새로운 언론문화를 주도해가는 인터넷 신문 <프레시안>(http://pressian.com)이 <사)민족미학연구소>와 <창작탈춤패 지기금지>와 함께 탈춤에 관한 “이야기마당”(칼럼 연재)을 기획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우리 민족문화의 한가운데서 진보적 문화운동에 앞장서 온 탈춤운동이 이제까지 걸어온 자취를 되돌아보고 그 성과를 거두어 여럿이서 더불어 고루 나누는 이야기 모둠판을 열기로 한 것이지요.
그러기에 이 이야기판에는 학창시절 탈춤반 활동을 하였거나, 학문분야나 사회문화운동분야에서 탈춤과 크고 작은 인연을 맺은 분들이 모두 어울려 한자리씩 말문을 열게 됩니다.
돌이켜보면 1970년대 이후 탈춤은 대학사회에서 기층문화를 바탕으로 새로운 문화풍토를 이루는데 그 주춧돌이 된 바 있고, 나아가 새로운 민중문화운동, 정치문화운동, 민족문예운동 등에서 그 길잡이 노릇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이를테면 민속극부흥운동, 대학문화운동, 두레패연희운동, 5.22 김상진열사추모집회, 중간집단운동, 농민문화운동, 노조문화패활동, 기독교문화운동, 도시빈민운동, 마당굿․민족극운동, 민족문예운동 등 격변기 민족의 현실에 부응하여 새로운 문예활동의 물꼬를 터놓는 일에 탈춤이 맡은 몫은 결코 적지 않다고 보는 것이지요.
그런데 새천년을 기약하는 요근래에 들어 탈춤운동의 본산지이자 본향이라 할 수 있는 대학 탈춤이 그 명맥마저 이어가기 어려울 정도로 지리멸렬해 가고 있는 모습을 엿보이고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몇몇 대학에서는 회원이 없어 탈춤반이 존폐의 위기에까지 놓여있다고 하니, 이를 두고 속절없이 마냥 지켜보고 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입니다.
이러한 위기의식 속에서는 자구책이 마련되지 않을 수 없는 법이어서, 지난 10월에는 연세대 탈춤반에서 초창기 선배로부터 현역에 이르기까지 한데 모여 탈반 창립 30주년 기념 잔치를 벌인 바가 있답니다. 다른 대학 탈춤반 출신 선배들도 자리를 함께 하여 끈끈한 탈춤공동체 의식을 새삼 확인하였던 것이지요.
대학 탈춤반 출신 여러분, 그리고 민족문예운동활동가 여러분, 탈춤연구자 여러분, 젊은 시절 탈꾼으로써 맡았던 몫을 지금에도 도맡아 할 수 있는 작은 일꺼리가 앞에 놓여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들이 젊어 탈춤에 쏟았던 붉은 열정을 오롯이 담은 글들을 모으는 일입니다. 이들이 작은 불씨가 되어 혼미해진 현금 대학 탈춤에 생기를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된다면 얼마나 흔쾌한 일이 될까요?
탈반 시절의 아련한 추억들, 탈춤문화운동과 함께 만난 사람들, 사건들, 뜻하지 않은 모진 인연의 끈들, 일상 삶 속에서 소롯이 피어나는 문화단상들, 인생론들, 현금 문화상황에 대한 따끔한 질책과 신세대를 위한 참신한 제언들, 탈춤연구의 새로운 접근시각과 싱싱한 담론들, 민족극 운동의 향방과 민족극 양식의 개발 등 ‘탈춤과 나’ 사이에 얽혀 섥혀 있는 삶과 문화의 궤적을 한자리에 모아보는 것은 당사자 스스로의 삶을 되돌아보는데도 소중할 뿐 아니라, 나아가 대학탈춤과 현대 민족문화운동의 작은 역사를 정리하는데도 적지 않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탈춤의 민중적 미의식과 한과 신명의 바다 속으로 몸을 담근 사람들의 생생한 체험담은 문화의 세기, 상상력과 감성의 세기, 몸과 자기연출과 축전의 세기인 21세기에 이제는 잃어버린 듯한 민중적 몸짓을 통해 민족적 상상력이 샘솟는 수원지 노릇을 하고 말 것입니다.“
위의 글은 지금부터 19년 전 2002년 11월에 전국의 대학 탈춤반 출신 탈꾼들께 보내는 독려의 글이었습니다. 당시 몇 편의 글이 모아졌으나 천년의 새 세기를 맞는 어수선한 분위기에 그만 유실되어버리고 후속 작업이 이어지지 못하였습니다.
이제 그후 19년이 지났습니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코로나 19라는 역병을 물리쳐야 할 때에 이르러 ‘공동체 삶’을 지향하는 탈춤 탈꾼의 흐름을 간직한 우리로서는 새삼 삶의 유대의식을 불러일으켜야 할 반전의 호기를 맞딱들인 것입니다.
전국의 대학탈꾼 출신 여러분, 조그마한 탈판이야기로 옛 힘과 정분을 그러 모아봄이 어떠할지요?.
2021년 7월 채 희 완 모심
[탈춤과 나] 원고 청탁서
새로운 언론문화를 주도해가는 인터넷 신문 <프레시안>(http://pressian.com)이 <사)민족미학연구소>와 <창작탈춤패 지기금지>와 함께 탈춤에 관한 “이야기마당”(칼럼 연재)을 기획하고 있습니다.
젊은 시절 탈춤이 좋아서, 쏟은 열정이 오롯이 담긴 회고담이거나 증언, 활동일지여도 좋고 아니면 현금 문화현상에 대한 어기찬 비판과 제언 형식의 글이어도 좋습니다.
과거 탈춤반 출신의 세대에게는 아련한 추억을, 신세대들에게는 다소 생소한 전통문화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글 내용이면 충분할 것입니다. 한 때나마 문화패로서 탈꾼으로서 개성넘치는 숨결을 담아내면 참 좋겠지요.
글 말미에는 대학탈춤패 출신임을 밝혀주십시오(대학, 학번, 탈춤반 이름 및 현직)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사진(1-5매)이나 시청각 자료도 곁들여 캡션을 달아 보내주시면, 지난 기억이 되살아나 더욱 생생한 느낌을 전달해줄 것입니다.
알뜰살뜰한 글과 사진제공에 대한 원고사례비는 제공되지 않고, 다만 원고가 묶여져 책으로 발간될 때 책 두 권 발송으로 사례를 대신합니다.
제 목 : [탈춤과 나] (부제로 각자 글 나름의 자의적인 제목을 달아도 좋음)
원고 매수 : 200자 원고지 15-30매(A4 3-5장)
원고 마감 : 2021년 9월 30일
(사진 등 시청각 관련 자료 캡션 달아 첨부하면 더욱 좋음)
보낼 곳 :
(사) 민족미학연구소 (namihak@hanmail.net) 채 희 완 (bullim204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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