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는 세계사와 한국사, 그리고 김종철의 개인사에서도 전환기였다. 우선 1970년대가 끝나면서 2차 대전 후 자본주의경제의 비약적 성장을 이끌었던 케인스주의가 퇴장하고 신자유주의가 본격화됐다. 1981년 취임한 레이건 대통령은 소련과의 냉전을 재개해 핵군비경쟁을 강화했다. 1986년 4월 체르노빌 원전 사고 3년 후 1989년 동유럽 사회주의권은 붕괴했고, 2년 후 소련도 해체됐다. 19세기 후반 이후 자본주의의 대안으로 여겨졌던 현실사회주의가 사실상 소멸된 것이다.
한국에서는 1987년 6월 민주항쟁으로 대통령 직선제 등 절차적 민주화는 쟁취했으나 민주화운동 세력의 집권은 좌절됐다. 하지만 30년 가까운 군사독재가 종식됐고 87년 여름부터 노동자들의 파업투쟁이 요원의 불길처럼 퍼지면서 노동자들의 조직화(민주노총)가 이뤄졌으며, '3저 호황'으로 대표되는 제조업의 약진으로 산업화가 급진전됐고 환경 문제 등이 대두되기 시작했다. 한국의 1980년대는 근대 국가의 양대 목표인 산업화와 민주화가 1차 완성된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김종철에게 1980년대는 유럽에서 태동하고 있던 '에콜로지' 사상에 접하면서 문학에서 생태평화운동으로 관심을 돌리게 된 전환의 시기였다. <녹색평론>의 사상적 준비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그는 1983년 가을 "한국에서 혼자 어설프게 읽고 있던 맑스주의 문학비평에 관해 좀 심화된 학습을 해볼 요량으로" 미국으로 떠났으나 정작 그곳에서 가장 흥미를 느끼고 몰입하게 된 것은 당시 세계 지식사회의 새로운 테마로 대두하고 있던 에콜로지 사상이었다.
김종철은 "버펄로의 (뉴욕주립) 대학 도서관에서 보낸 시간은 내게 새로운 세계로 시야를 열어준 소중한 경험이 되었다"면서 당시 "선구적 에콜로지 사상가들의 메시지는, 우리가 익숙해져 있는 현대문명의 관행이 이대로 계속되기만 하는 것으로도 파국은 필연적이라는 것이었다"(<대지의 상상력> 8쪽)고 밝혔다.
당시 김종철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책으로 동독 출신의 반체제운동가 루돌프 바로의 <적색에서 녹색으로(From Red To Green)>(1984)가 꼽힌다.
루돌프 바로(1935~1997)는 본래 동독 공산당원으로 언론인으로 활동했으나 1977년 동구 공산주의와 서구 자본주의를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 동시에 비판하고 새로운 문화혁명의 필요성을 역설한 책 <동유럽에서의 대안(The Alternative in Eastern Europe)>(1978)이 서독에서 출판된 직후 동독 당국에 체포돼 8년 징역형에 처해졌고, 이후 서독을 비롯한 서유럽의 구명운동으로 1979년 10월 석방돼 같은 해 서독 녹색당의 창당 멤버가 되었다.
그는 2년의 투옥 기간 중 성서 공부를 통해 종교와 영성의 중요성에 눈을 떴으며, 새로운 인간적 사회 건설을 위해서는 자급자족에 의한 소규모 공동체, 개인 내면의 변화와 영성의 재발견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1980년 정통 마르크스주의를 포기했고, 1982년에는 국제분업에 의거한 세계시장과 자본주의적 산업체제를 포기해야 한다고 강조했으며, 당시 서유럽에서 일어난 반핵평화운동에 동참했다.
바로는 녹색당 내부에서도 가장 원칙적인 이념을 견지했고 녹색당이 점차 현실정치 속에서 산업체제와 타협적으로 되어가고 있다고(녹색당은 1983년 서독 연방의회 진출) 비판하던 중, 1985년 녹색당과 결별하고 생태공동체 건설을 위한 운동에 헌신하다가 1997년 베를린에서 혈액암으로 사망했다.
<녹색평론> 9호(1993년 3/4월호)에는 1982년 바로가 한 진보적 문화운동단체와 가진 대담이 '인간은 개미가 아니다'라는 제목으로 실렸는데, 이를 통해 그의 에콜로지 사상을 엿볼 수 있다.(<녹색평론선집 2> 146~154쪽에 수록)
바로는 "현재의 역사적 상황을 어떻게 평가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지금은 산업화로 인하여 세계가 파괴와 죽음으로 가고 있는 과정에 있다. 문명은 자기파멸적으로 되고 있다. 여기에 대한 답은 에콜로지와 평화운동"이라고 대답한다.
현재의 산업문명체제란 선진산업국가의 지구 자원의 독점적 약탈에 의해 유지되고 있으며 이에 따라 제3세계와 미래세대의 삶이 희생되고 있다는 점에서 결코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는 기술발전을 통해 인류의 생활 수준 향상과 행복을 달성할 수 있다는 서구 좌파의 믿음에 대해 "기술 발전의 방향과 별도로 독립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기술적 성과란 없다"면서 "나는 지난 2000년 동안의 어떠한 기술적 성과라도 그것이 그 자체로서 성과라고 평가받을 수 있다고는 믿지 않는다"고 단언한다.
특히 그는 2차 대전 후 서구의 노동자 세력의 투쟁이 자본으로부터 보다 나은 조건을 따먹는 데, 그리하여 (서구의) 산업 메트로폴리스의 중심적 지위를 확고히 하고 식민주의적 지배를 강화하는 데 이바지했을 뿐이라며, "부유한 나라들의 임금노동자들이 갖고 있는 이해관계는 결국 문명의 자기파멸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고 강조한다.
나아가 오로지 물질적 생활 수준 향상을 삶의 목표로 삼는 자본주의 산업문명이 인간의 주체성과 자율성을 억압하고 있다고 진단한다.
그는 자본주의 산업문명에 "대파국, 종말의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면서 이제까지 외부 지향의 노동, 즉 외부적 진화에 몰두해 있던 인간의 노력이 내면적 능력의 계발로 옮겨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인간은 "타고 나기를 개미집에 묶여 있을 수밖에 없는 개미들과는 다르게 자신이 세운 사회구조에 돌이킬 수 없이 매달려 있는 것이 아니"며, 물질적 생산 확대에 몰두했던 이제까지의 움직임으로부터 우리의 에너지를 거둬들여야 한다. 다시 말해 "개인의 에너지가 의사소통-자기 자신 및 다른 사람들과의-영역으로 완전히 옮겨가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에 따르면 새로운 인간적 사회를 위해서는 비집중화, 분권화, 분산화가 이루어져야 하고, 일상생활의 필수품 대부분이 자급자족 되어야 한다. 일인당 물질과 에너지 소비가 열 배, 스무 배나 증가해 있는 오늘의 상황이 극복되려면 우리의 기본 욕구가 우리 자신이 살고 있는 땅에서 생산된 것으로 채워지고 교환도 대부분 근린지역 내에서만 이루어져야 한다는 전제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식량과 주택을 비롯하여 학교와 대학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이 사회화되고 육체적으로 스스로를 재생산하기 위해서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가능한 한 넓은 범위에 걸쳐 자기 자신의 노동으로 생산하는 것이 중요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땅이 있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농업은 정말 근원적인 조건이다.
간디와 노자에도 정통했던 그는 "노자의 경제개념에 의하면 공동체들은 서로 너무 가까이 접근해 있어서는 안 된다. 제일 좋은 것은 이웃나라를 방문하지도 않는 것"이라고 말했다.
'자동차와 핵무기는 그 본질에서 동일하다'
김종철은 바로가 녹색당과의 결별 이유를 밝힌 연설 '구원의 논리'를 <녹색평론> 17호(1994년 7/8월호)에 소개하면서, 근대 산업문명에 대한 바로의 근원적 비판을 '자동차와 핵무기는 그 본질에서 동일하다'는 한마디로 요약했다.
바로는 미국 중거리 핵미사일의 서유럽 배치를 두고 격렬한 반핵운동이 전개되고 있던 1983년 가을, 반핵운동 단체의 초청으로 뉴욕을 방문했다. 당시 서유럽 시민들은 '왜 유럽이 미소 핵군비경쟁의 볼모가 돼야 하느냐'고 거세게 반발했고, 미국의 평화운동 세력도 이에 호응하고 있었다. 때는 김종철이 버펄로에 도착했을 무렵이다.
그런데 바로는 반핵집회에서 지금 뉴욕의 거리를 질주하고 있는 자동차들도 그 본질에 있어서 핵무기와 다를 것이 없다고 말해 좌파 운동가들의 거센 반발을 초래했다. 바로의 발언은 기술발전을 통해 빈곤계층의 생활 수준을 개선하려는 노력을 가로막는 논리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동차와 핵무기는 그 본질에서 동일하다'는 바로의 발언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기술에 대한 미신적 신앙, 자연을 정복의 대상, 또는 이용 가능한 자원으로만 간주하는 인간중심주의적이며 생산력중심주의적 사고, 그리고 기술발전의 무한한 추구는 결국 생태계를 파탄 낼 것이라는 점에서 자동차와 핵무기의 생산은 궁극적으로 동일한 결과를 낳는다는 의미일 것이다. 핵무기는 기술문명의 필연적 산물이며 자기파멸적 세력의 직접적인 표현이라는 것이다.
김종철은 이 글이 실린 <녹색평론> 17호의 머리말 '생산력이 아니라 공생의 윤리를'에서 "우리는 에콜로지 문제를 우선적으로 보면서, 이것을 중심으로 인간의 현실과 역사를 보는 관점이야말로 오늘에 있어서 세계의 가장 진보적이고 과학적이며 의미 있는 정치철학을 구성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서 예컨대 "노동운동이 자동차의 생산 자체를 반대하는 데까지 갈 수 있는가"라고 투박하게 질문해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생활 수준'이라고 하는 본질적으로 부르주아 개인주의적 개념이 늘 필수적인 평가 기준이 되어왔다는 데 20세기 사회변혁운동의 실패와 비극의 핵심적인 원인이 있는지도 모른다"면서 "물질적 재화의 소비 규모의 과다에 의해서 측정될 수밖에 없는 생활 수준이라고 하는 것이 사회발전의 핵심적인 기준이 될 때, 토착문화의 다양한 삶의 방식이 파괴되고, 전통적인 농업이 사라지고, 생태적 재앙이 따르고, 공동체가 해체되며 인간의 도구화가 심화되는 것은 필연적"이며 "생활 수준의 향상을 꾀하는 '개발'이 진행되면 될수록 부의 독점은 심화되고, 빈곤 문제는 갈수록 해결 불가능한 것으로 된다"고 강조했다.(<비판적 상상력을 위하여> 86~88쪽)
김종철은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 당시 "이라크 전쟁에 반대하려면 서울 시내를 질주하는 자동차부터 반대하라"는 권정생 선생의 발언을 최고의 생태평화 메시지로 꼽았는데, 이는 '자동차와 핵무기는 그 본질에서 동일하다'는 그의 에콜로지 신념에서 말미암은 것일 것이다.
미국에서의 1년간의 독서 끝에 김종철은 마르크스주의는 대안이 될 수 없음을, 인류와 지구가 당면한 핵심 문제는 지구생태계의 지속가능성 여부임을 확신했다. "서구식 근대문명이란 처음부터 생명파괴적 원리를 내포한 채 출발한 문명이 아닌가" 하는 자신의 오랜 의문이 틀린 게 아님을 확인했고 "한국의 군사독재는 조만간 종식될 것이며, 정작 중요한 것은 그 이후에 전개될 상황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에게는 민주화 이후 한국의 수십 년에 걸친 경제성장이 빚어낸 산업사회의 모순과 난제를 어떻게 풀어낼 것인가가 최대의 과제로 생각됐다.
군사독재 종식 이후 동구사회주의가 붕괴한 데 대해 한국의 진보파 지식인들이 침로를 잃은 채 극심한 사상적 혼돈 상태를 드러낸 데 대해, 김종철은 "한국 지식사회의 이런 모습은 나로서는 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나는 적지 않은 한국의 지식인들이 그동안 소련식 사회주의 혹은 정통적 맑스주의에 큰 희망과 기대를 걸고 있었다는 사실이 얼른 믿어지지 않았다"면서 "내가 이해하는 한, 소비에트사회주의는 말할 것도 없고, 생산력의 증대와 고도의 산업화를 사회 반전의 불가결한 전제로 상정하는 정통 맑스주의도 서구식 근대문명이 직면한 최대의 난제, 즉 생태적 지속불가능성이라는 문제에 대한 어떤 합리적 해법도 갖지 않은 사상이었다"고 지적했다.
이어 그는 "그런데도 그러한 사상을 지침으로 삼아 좋은 사회를 꿈꾸어 왔다면, 한국의 지식사회에는 무엇인가 근본적인 문제가 있는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고, "나는 누군가가 한국의 지식사회의 사상적 혼미에 대해서 강한 문제 제기를 하고, 우리들의 공동의 미래를 위해서 왜 생태주의적 세계관과 비전이 필요한지, 그 이유를 설명하면서 활발한 토론의 장을 열어주기를 기다렸으나" 군사정권이 끝나고 몇 해가 지나도록 그러한 움직임이 보이지 않아, 결국 자신이 <녹색평론>의 창간을 구상하게 됐다고 밝혔다.(<대지의 상상력> 9~10쪽)
사실 루돌프 바로의 전향과 그의 저서 <동유럽에서의 대안>은 무엇보다 현실사회주의의 실패를 겨냥하는 것이었다. 대학생 때까지 레닌, 스탈린의 신봉자였던 그는 1956년 스탈린의 공포정치를 비판한 흐루쇼프 비밀연설을 알게 된 뒤 흔들리기 시작했으며, 1956년 폴란드, 헝가리 노동자 봉기 때는 대자보 등을 통해 봉기를 응원하고 동독 당국의 정보 통제에 항의했다. 결정적으로 1968년 초 체코에서 일어난 '프라하의 봄' 운동이 그해 8월 소련군 탱크에 의해 짓밟히는 것을 보면서 동구 사회주의에 완전히 절망했다. 훗날 그는 소련군이 프라하에 진입하던 1968년 8월 21일은 자기 인생의 '가장 어두운 날'이라고 회고했다.
특히 그는 1957년부터 10년간 언론인 활동과 함께 고무공장과 플라스틱 공장의 조직전문가로 일하면서 동독의 경제 상황이 위기라는 것, 그 근본원인은 현장노동자의 발언권이 거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1967년 말 동독 공산당 서기장 월터 울브레히트에게 공장 내 '풀뿌리 민주주의'의 도입을 건의했으나 묵살됐다. 그리고 몇 주 후 체코에서 일어난 '프라하의 봄' 운동이 무력진압 된 것이다.(위키피디아 참조)
인간해방을 추구한다면서 오직 생산력 증대만을 위해 노동자들을 희생시키고, 노동자가 주인이라면서 실제로는 그들을 종속적, 예속적 지위로 격하시키며, 각 나라의 자발적 개혁 노력이 무력으로 진압되는 현실사회주의에서 바로는 희망을 발견할 수 없었고 1968년 이후 10년 가까이 침묵을 지키면서 <대안>을 준비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 유럽에서는 이미 1960년대 말부터 동구 사회주의의 미래를 비관했다고 볼 수 있다.
반면 한국에서는 광주항쟁의 결과 1980년대 이후 대학가와 운동권에서 반미주의와 함께 마르크스 학습 열풍이 일었고, 1984년부터는 이른바 사회구성체 논쟁이 뜨겁게, 그러나 별 소득 없이 전개됐다. 세계 지식사회의 흐름에 어두웠던 한국 지식계의 모습이었다.
정지창 전 영남대 독문과 교수는 1984년 미국에서 돌아온 김종철이 "군부독재를 물리치고 민주주의를 회복하는 정치투쟁도 중요하지만 탐욕스러운 서구문명으로부터 위기에 처한 지구를 구할 근본적 대안을 모색하는 일이 더 중요하게 여겨진다고 말했다"면서 "'사구체(사회구성체)'가 콩팥 같은 장기의 일부인 줄 알았다고 너스레를 떨던 그의 악동 같은 모습이 떠오른다"고 회고했다.('존경하는 벗 김종철 형을 보내며', <창작과 비평> 189호, 2020년 가을호, 327~328쪽)
그런데 김종철이 미국에서 배워온 것은 에콜로지 사상만이 아니었다. 그는 1997년 초 김우창 고려대 교수와의 대담에서 '버펄로에서 무엇을 얻었는가'라는 질문에 '인디언에 대한 관심을 얻었다'고 답한 것이다.('시적 인간과 자연의 정치', <시적 인간과 생태적 인간> 4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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