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철 칼럼집 <발언 1>의 첫 글 '거짓언어와 '성장'논리 속에서 - 나의 한국 현대사'는 아마도 그가 자신의 개인사를 밝힌 유일한 글이 아닌가 싶다. 이 글에서 그는 자신이 평생 경계하고 반대해온 두 가지를 말한다. 거짓언어와 경제성장이 그것이다.
그는 이 글에서 "우리 세대가 영위해온 삶은 거짓언어의 숲 속을 끝없이 헤매는 파행의 연속이었다"면서 중학생 때의 체험을 회고했다.
김종철은 "이상하게도, 3.15에 대한 내 기억 속에 언제나 가장 뚜렷하게 남아있는 것은 그때 담임선생님이 하셨던 거짓말"이었다면서, 물론 평범한 교사가 상부의 지시를 따를 수밖에 없었겠지만, 어린 제자들에게 거짓말을 함으로써 "선생님은 결국 신용을 잃었고, 우리들은 벌써 어린 나이에 스승을 존경할 수 없는 불쌍한 존재가 되어버렸다"고 회고했다. 특히 그러한 거짓말의 가장 끔찍한 결과는 "우리들 중에서 그 이후 자신의 인생행로에서 거짓언어의 일상화를 당연지사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는 점이다.(<발언 1> 13~14쪽)
고등학교 1학년 때는 농촌으로 봉사하러 가는 도중에, 학생들의 대열이 어지럽다는 이유로, 육군 장교가 학교 선생님을 지휘봉으로 마구 구타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그 군인은 5.16 군사쿠데타 직후 국가재건최고회의 시절 지역 계엄사령부 최고 책임자였다.(<발언 1> 14쪽)
일제시대 이래 폭압적 권력 아래 타율적, 피동적 존재로 살아온 한국인들의 모습이었다. 그는 식민지시대와 군사정권 시절을 통해서 상명하복의 군대 논리가 우리 사회의 온갖 영역에 침범했으며, 이로 인해 "자주적.자발적 사고와 판단으로 행동하는 '자유인의 논리'가 아니라 '노예의 논리'가 이 사회의 지배 원리가 되어온 것"이고 진단했다. 김종철은 "한국이라는 땅에서 우리들이 살아온 삶은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진실 속에서' 산다는 느낌과는 거리가 너무도 먼 것"이었고, 언제나 우리의 삶은 거짓언어, 상투적인 언어, 화석화된 '공식적' 언어 속에서 영위되어 왔다고 말한다.(<발언 1> 20~21쪽)
그 때문이었을까? 김종철은 무엇보다 거짓언어의 삶을 경계했고, 자주적 사고에 의한 진정성 있는 앎을 추구했던 것 같다. 그에게 안다는 것은 인간들의 삶의 느낌을 있는 그대로 정직하게 파악하는 것이었다. 나아가 보다 나은 인간다운 삶을 위해 필요한 그 무엇을 절실하게 추구하는 것이었다. 지식보다는 감수성이 중요하고, 지식을 위한 지식이나 과시를 위한 학식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것이었다.
예컨대 그는 <대지의 상상력> 서문에서 1965년 대학 신입생 때부터 2004년 대학에서 나오기까지 40년간 영문과 학생으로 공부를 하고, 영문과 교원으로 일한 대가로 밥을 먹고 지냈지만, 자신을 한 번도 영문학도나 영문학자로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밝힌다.
"요컨대 한국인으로 태어나 살아가는 인간이 자신의 절박한 현실에서 비켜나 영문학 연구라는 '한가로운' 지적 유희에 몰입해 있는 게 과연 정당한 일인가 하는 생각이 빈번히 뇌리를 사로잡았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영문학이라는 학문 분과가 최초로 개설된 것은 영국이 아니라 아프리카, 인도 등 영국의 해외 식민지 교육기관이었고, 이는 영국 지배층이 식민지 엘리트들의 정신을 혼란·마비시키기 위한 효과적인 수단으로 영문학 교육을 활용했다는 뜻이다. 그는 해방 후 한국의 대학에서 영문과가 과도한 지위를 차지해온 현실을 일종의 지적 식민지 상태로 해석했다.
그는 시인 이문재와의 대담에서('이것은 문학이 아니다', <문학동네> 2008년 겨울호)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앎에 대한 그의 이러한 태도는 학문 여정에서도 드러난다. 그의 뉴욕주립대학(버펄로) 유학(1983년)을 주선했던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에 따르면 "한 번은 그도 세상의 풍습에 따르려고 했었던지, 대학원 박사 과정에 들어갈 생각"을 하고 고려대 비교 문학과정에 들어왔다. 그러나 한번 등록한 다음에는 다시 등록하지 않았고, 해외 견문이 필요하다며 김우창 교수의 소개로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하지만 1년도 안 돼 버펄로 체재를 마감하고 스코틀랜드 에딘버러의 인문연구소로 가고 싶다는 편지를 김우창 교수에게 보낸 뒤 이마저도 그만두고 1984년 여름 귀국했다.
이에 대해 김우창 교수는 "내가 은근히 바랐던 것은. (중략) 그가 그럭저럭 그곳의 학위 과정에 들어가 박사 학위 하나라도 얻어 왔으면 하는 것이었다. 박사 학위의 의의가 순전히 대외 과시나 설득용에 불과하다는 것을 나도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나는 그가 세상 사는 데에 그러한 것이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라면서 "그러나 그는 내가 생각한 것보다는 더 철저하게 신념으로 사는 사람이었다. 마음 깊이로부터 의의 있다고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닌 일을 하기에는 진정성이 그에게는 너무나도 중요한 것이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김우창 교수는 "김종철 교수의 이러한 고집 또는 사고와 감정의 독자성을 나는 그가 근본적으로 시적인 인간이라는 점에서 이해한다"면서 "그의 가장 중요한 신조는 경험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이라고 평가했다.(김우창 '시적 인간과 자연의 정치', <시적 인간과 생태적 인간> 421~423쪽)
"나의 사상의 뿌리는 우리 외할머니"
'거짓언어와 '성장' 논리 속에서 - 나의 한국 현대사'에서 김종철은 한국 사회의 기본 성격이 박정희 시대에 굳건히 정립됐다면서 그 특징을 '경제성장'이 모든 것에 우선하는 사회, 즉 경제성장을 위해서라면 "역사도 문화도 전통도 헌신짝처럼 내던질 준비가 되어 있는 사회, 그리하여 영혼도 깊이도 없는 사회"로 규정했다. 농촌을 살린다면서 토착적 민중문화를 가차 없이 파괴하고, 민중의 지속가능한 삶의 근본 토대인 공동체들을 급속히 해체시킨 결과였다.(<발언 1> 17쪽)
그가 경제성장에 일관되게 반대한 이유는 무엇보다도 사람과 사람, 그리고 인간과 자연 간의 건강한 관계를 파괴하기 때문이었다. 즉 생명공동체를 파탄 냈기 때문이다. 훗날 김종철은 석유자원의 고갈, 기후위기 등 자연상태의 변화가 경제성장을 불가능하게 만들어 버린 객관적 현실을 되풀이 강조했지만, 초기의 입장은 농적 순환 사회의 보존에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생태사상의 근원은 "외할머니로 표상되는" 한국 전통 농촌의 공동체적 생활방식이었다.
영남대 교수 시절의 일화. 진보 성향의 지식인들의 모임에서 그는 '지금 우리에게 제일 필요한 것은 노동운동, 사회운동보다도 농적 가치를 살리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에 대해 한 참석자가 '김 선생, 당신 사상의 뿌리가 뭐요'라는 물어오자 '그 뿌리는 우리 외할머니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의 외할머니는 마산 근처 농촌 진동에서 일찍이 남편을 잃고 농사일로 자식 일곱을 키워 시집 장가를 보낸 분이다. 김종철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김종철은 이 강연에서 "사람에게 제일 소중한 재산은 타인"이고, "나는 이 세상에 관계 속에 존재하는 것"이며, "내 인생이 풍부하다는 것은 내가 맺어온 인간관계가 윤택하다는 것"이라고 관계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강조하면서 "농민사회에서는 인간관계는 기본적으로 평등할 수밖에 없"으며 "지금 도시 사람들은 시골의 농민회에서 농민들이 경험하는 정도의 민주주의를 향유할 기회가 거의 없"다고 말한다.
그는 또 농업과 농민생활의 회복이 중요한 이유로 순환적인 물질대사 구조 문제를 꼽는다. 유한한 지구 체계 속에서 사람이 오랫동안 생존을 하려면 생활패턴, 즉 물질대사가 순환적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현재의 석유농법 체제에서는 이러한 순환구조가 깨져버렸다는 것이다. 즉 예전에 땅을 기름지게 했던 사람과 가축의 배설물이 이제는 강과 바다로 그대로 내버려지고 그 대신 석유로 만든 화학비료를 사용하다 보니 그 순환의 구조가 막혀버렸다는 것이다. 그 결과는 지력의 상실, 자원의 고갈이다.
밥이 똥이 되고, 똥이 밥이 되는 순환적 물질대사는 농업혁명 이래 1만 년간 지속돼온 반면 현재의 석유농법은 기껏해야 100년 남짓(미국에서 석유가 발견된 것은 1859년, 화학비료 발명은 1910년 무렵)이다. 그나마 석유 생산은 줄어들고, 기후위기 때문에 더 이상 사용할 수도 없는 실정이다.
김종철은 "자주적 농민의 자급적 삶을 가능하게 하는 공동체의 회복만이 생태적 위기를 극복하고,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틀이라고 생각한다"면서 자유인이라면 당연히 이런 세상을 꿈꿀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흔히 김종철의 에콜로지 사상에 영향을 미친 요인으로 영국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 1983~84년 미국에서 접한 유럽의 녹색사상, 해월을 비롯한 장일순 권정생 등이 얘기되지만 그 원류에는 외할머니로 표상되는 한국의 농촌공동체가 있었던 셈이다.
실제로 김종철은 1983년 자신이 유럽 녹색사상의 충격적이고 음울한 메시지에 강렬하게 반응한 것은 "어쩌면 그것이 내 몸과 정신 속에 오랫동안 잠들어있던 어떤 근본적인 의문을 다시 일깨우고, 그 의미를 포착할 수 있게 해준" 때문인지 모른다고 말했는데, 그 의문이란 자신의 어린 시절 맑고 푸르기만 하던 고향 바다가 언젠가부터 시커먼 죽음의 바다로 변하기 시작했을 때, 새마을 운동 불과 몇 해 만에 외할머니 마을의 정겨운 시골 길들이 살벌한 시멘트 길로, 초가지붕이 양철지붕으로 흉물스럽게 변하고, 시골 사람들의 인심마저 사나워지고 있음을 느꼈을 때 자신이 느낀 슬픔과 분노, 절망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는 또 자신의 20대 글을 모은 첫 평론집 <시와 역사적 상상력>(1978년)에 이미 근원, 근본, 공동체, 관계 등 그가 이후 자주 사용하는 낱말들이 등장한다는 이문재의 지적에 대해 "아마 그때부터 내가 논리적으로는 아니지만 일종의 생태적인 감수성을 갖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때 근원적이라는 게 사람과 사람의 관계도 관계지만 인간과 자연, 인간과 자연, 인간과 비인간 간의 관계까지 포괄하는 그런 의미에서 쓴 것 같아요"라고 답했다.(김종철·이문재 대담 '이것은 문학이 아니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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