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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규직 투쟁의 시작 기륭 언니들..."위험하니까 남자들은 뒤로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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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규직 투쟁의 시작 기륭 언니들..."위험하니까 남자들은 뒤로 가"

[바람 같은 전설의 언니들] ③ 기륭전자분회의 유흥희 님을 만나

지난 40년간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으로 바뀐 것도 있으나 갈 길은 여전히 멀다. 인권운동네트워크 바람은 6월 5일 전설의 투쟁을 했던 여성노동자들을 모시고 <바람 같은 전설의 언니들> 이야기마당을 개최한다. 그러나 여성노동자들의 투쟁과 삶은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이에 그녀들이 해왔던 투쟁과 현재의 고민을 연재한다. 편집자.

※ 이야기마당 <바람 같은 전설의 언니들>은 5일 오후 2시 온라인으로 중계된다.(☞바로가기 : "전설의 투쟁을 했던 여성노동자들을 모십니다.")

0. 연재 순서

<바람 같은 전설의 언니들>① 동일방직 해고자 김용자 님을 만나(☞바로가기)

<바람 같은 전설의 언니들>② 구로동맹파업투쟁의 김준희 님을 만나(☞바로가기)

<바람 같은 전설의 언니들>③ 기륭전자분회의 유흥희 님을 만나

▲4일 한국가스공사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처우개선과 비정규직 정규직화를 요구하며 300리길 행진하는데 함께 하고 있는 유흥희 비정규직 이제그만 공동투쟁 집행위원장. ⓒ비정규직이제그만공동투쟁

유흥희 기륭전자분회장에게 <바람 같은 전설의 언니들> 이야기마당에 나오라고 했더니, "내가 어디 대선배님들과 같이 하냐"며 고개를 젓는다. 사실 유 분회장은 활발하게 투쟁하는 현직이다. 기륭전자 최동렬 회장에 대한 법적 소송도 조금 남았다. 게다가 그녀는 요즘 눈에 띄게 투쟁하고 있는 '비정규직이제그만 1100만 비정규직 공동투쟁(비정규직이제그만공동투쟁)'의 집행위원장이다. 나는 "기륭전자는 살아있는 전설이지. 여성비정규직 투쟁을 그렇게 치열하게, 그렇게 길게, 공장의 벽을 넘어 한 곳이 있어?"하며 꼬드겼다.

마음의 고향, 구로공단

유 분회장은 정화여상 재학 시절, 학내 민주화운동을 했다. 사학비리를 알린 전교협 선생님들을 지지하는 사학비리 투쟁을 함께했고, 그 과정에서 시험거부 투쟁(백지동맹)과 농성을 했다. 고등학교 때 투쟁한 적이 있으니, 혹시나 노동운동을 하기 위해 목적의식적으로 구로공단에 들어간 것은 아닌가 싶어 물었다. 그건 아니라고 했다.

"92년에 상고를 졸업하고 경리직으로 몇 곳에서 일했지. 마지막에 화장품 회사 경리를 했는데 대리점에서 장부 조작을 요구하는 거야. 나는 안 한다고 대리점장하고 대판 싸우고 나왔지. 사실 조그만 사업장에서 경리는 빛 좋은 개살구야. 뻑 하면 커피 심부름, 담배 심부름, 사적인 심부름을 시키고 그걸 매번 거부하는 것도 힘들고, 고등학교 갓 졸업했다고 애 취급하는 시선도 넘 싫고, 공장에 가서 마음 편하게 일만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구로공단에 갔지. 그런데 사람들이 나보고 정신 나갔다고 했어. 92년이니까 사회주의권이 망하고 운동이니, 노동이니 하는 것들에 대해 패배적인 시각이 컸을 때잖아. 그러니 내가 노동운동 하러 가는 걸로 생각한 사람들이 말린 거지."

생계를 해결하러 공단에 갔는데 어쩌다 보니 노동운동을 하게 된 경우라 다들 정신 나갔다고 했다. 유 분회장은 공단에서의 첫 1년은 너무 힘들었다고 했다. 공장에서는 위장 취업자와 같은 노동조합을 만드는 시늉만 하는 사람을 눈에 불을 켜고 찾는 분위기가 여전했다. 작은 떡볶이 모임만 가도 이상한 눈으로 보고, 사람들을 따로 만나기만 해도 요주의 인물처럼 관리했다. 결국 4년 7개월 만에 제대로 모임조차 만들지 못하고 현장을 그만두었다. 그 후 구로지역 도서관에서 단체 상근활동을 시작한다. 을지로의 인쇄노조 취업알선센터 상근자로도 일했다. 그렇게 몇 년을 보낸 뒤, 돈을 벌어야 하는 현실에 다시 구로공단으로 돌아갔다. 노동자로 살아야겠다는 마음이었다. 그녀에게 공단은 마음의 고향이었다.

파견직만 뽑는 달라진 구로공단

2005년 구로공단의 모습은 92년과 확 달라져 있었다. 구로공단에도 인력사무소, 파견업체가 넘쳐났다. 공장에서 노동자를 직접 뽑는 곳이 아예 없었다. 벼룩시장이나 인터넷으로 뽑았다. 1998년 '파견근로자보호 등에 관한 법률(파견법)'이 통과된 후 비정규직 사용하는 회사가 늘어난 것이다. 옛날 굴뚝형 공장이 사라지고, 아파트형 공장들이 들어섰다. 바뀐 공장 대부분은 50명 미만의 노동자들을 고용하는 공장들이 많았다. 그래도 규모가 있는 곳을 들어가고 싶었다. 여러 곳에 이력서를 넣었는데 나이는 많고 경력은 짧고, 게다가 경력 단절의 시간까지 있어서 인지 취업이 잘 안 됐다. 파견회사를 통해 들어간 곳에서 생애 처음 해고라는 것을 당해봤다. 그러다 2005년 6월, 워커스테이션이라는 파견회사를 통해 취업을 했다. 가리봉역에서 봉고차에 태워져서 들어간 곳이 우연하게도 기륭전자였다.

"처음에 갔던 곳은 핸드폰 케이스를 만드는 작은 회사였는데 새벽까지 야근, 특근을 했는데 해고됐어. 내가 이걸 '대청소 해고'라고 말했지. 하루는 파견직만 불러 놓고 청소를 시키는 거야. 핸드폰 케이스 중에서 단종된 품목들 정리하고 청소를 시키더니, 청소가 끝나고 정규직만 빼고 구두로 해고를 시켰어. 해고에 항의하다가 사과만 받고 그만뒀지. 혼자 싸울 자신이 없었거든. 다시 파견업체 통해서 취업하려는데, 담당자가 가리봉역으로 나오라고 해서 갔더니 봉고차를 타라는 거예요. 인신매매는 아닐까 걱정했는데 차 안에 아줌마, 아가씨들이 많은 거예요. 그 차에서 내려준 곳이 기륭전자였어. 당시 김소연이 기륭전자에 있는 걸 알아서 얼굴 안 마주치려고 애썼지."

면접은 간단했다. 33세라는 나이가 있으니 길게 일할 수 있는지, 혹시 결혼은 하지 않을지 물었다. 돈이 필요해서 길게 다닐 거고 야간특근 다 할 수 있다고 했다. 입사일만 적힌, 기간이 없는 계약서에 서명했다. 들어간 지 얼마 안 되었으니 조용히 지내려고 했다.

기륭전자의 파견노동자들은 최저임금보다 10원 많은 64만 8540원을 받았다. 잔업과 특근을 많이 해도 겨우 100만 원을 받을 수 있었다. 기륭전자에는 정규직과 계약직, 파견직 등 여러 고용형태가 있었다. 무분별한 해고와 차별적인 문화가 넘쳐나 짧은 기간이었지만 자연스럽게 노조에 가입했다.

"첫날부터 라인에 있는 사람들이 나 들으라는 듯 크게 말을 해. '지각하지 마라', '옆에서 잡담하지 마라', '조장들한테 잘 보여야 한다' 이런 말을 일상적으로 하는 거야. 아파서 안 나와도 해고되기도 하고. 조·반장들은 정규직도 갈구더라고. '영원한 정규직은 없다. 파견이 줄 서있다', '눈 밖에 나지 말고 줄 잘 서라' 그러면서 1등, 2등, 3등 줄 세우고. 이건 아니다 싶고. 하루를 다녀도 이건 아니다 싶어서 노조에 가입했지."

기륭전자 노조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함께 만든 노조다. 여성노동자가 많은 사업장이었으나 남녀 차별은 존재했다. 남성은 다 정규직이었다. 반면 여성은 생산직 중 조장 정도만이 정규직이었다. 정규직 중에 산전산휴 휴가를 쓰고 온 사람이 생긴 후에 기륭전자는 젊은 여성노동자는 6개월만 계약했고, 나이든 기혼 여성노동자는 1년 계약을 했다. 젊은 여성노동자는 결혼하거나 임신할 수 있다는 가정을 깔고 계약기간을 다르게 정한 것이다.

같은 포장업무를 해도 남성이 더 임금이 많았다. 심지어 정규직 여성노동자가 육아휴직 갔다 왔다고 괴롭히기도 했다. 노조는 노동부에 남녀 임금차별 진정을 해서 시정명령을 받았고, 실제로 법을 통해 차별된 임금을 받아 내기도 했다.

1895일, 간접고용 불법파견 투쟁

두 번째라 노조활동은 자연스러웠다. 2005년 노조는 인력파견업체들을 불법파견·파견직 임금차별(임금미지급)로 노동부에 진정했다. 파견법에는 제조업의 파견노동자 사용을 금지하고 있다.

기륭전자 직원 500명 중 연구원 200명은 정규직인데 반해 생산직 300명 중 정규직은 단 10명에 불과했다. 계약직이 40명이었고, 250명은 파견노동자였다. 감사 나온 노동부에서도 이런 구조는 처음 본다고 할 정도였다. 2005년 8월 초 파견법 위반이라는 결정이 나왔다. 노조는 '불법파견 정규직화'를 내걸고 8월 24일부터 공장점거 파업에 돌입한다. 그렇게 시작된 불법파견 비정규직 투쟁은 1895일이나 이어진다.

"이렇게 길게 싸울 줄은 몰랐지. 기륭전자에서 일한 기간보다 싸운 기간이 길어도 너무 길잖아요. 하하. 나만이 아니라 우리 조합원들 대부분이 파견이거나 계약직이었으니까. 그래도 후회는 안 해. 할 수 있는 싸움을 원 없이 했으니까."

실제 근무한 기간이 짧았는데도 왜 계속 싸웠냐고 물었더니, "어차피 파견이 넘쳐나니 어딜 가도 하루살이 노동자로 살 수밖에 없어서"라고 답한다. 그리고 너무 사람 취급 받지 못하는 것이 억울했다고.

"투쟁하면서 노동부에 갔는데 같이 싸우다 중단하고 나간 언니를 만났어요. 일자리 알아보려고 온 거지. 그런데 그 언니가 이렇게 말해. 계속 싸워서 공장에 들어가라고. 어차피 나와도 공단에서는 3개월, 6개월 파리목숨 처럼 짧게 일한다고."

불법파견은 기륭전자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파견이 확산되면서 3개월짜리, 6개월짜리 불법파견이 넘쳐났다. 파견노동자들은 길어야 1년을 일하고 나면 다시 일자리를 알아봐야 하는 신세다. 노조가 파견문제, 비정규직 문제에 대해 끝까지 싸워야 할 이유들이 하나씩 늘어났다.

기륭전자는 하청업체와의 계약 해지를 이유로 이들을 전원 해고했다. 그러나 법원은 기륭전자 노동자의 손을 들어주지 않았다. 검찰은 사측에 불법파견 혐의를 적용했으나 500만 원 벌금이 끝이었다. 반면 노동자들에게는 업무방해와 손해배상이 줄을 이었다. 그렇다고 싸움을 멈출 수는 없었다.

남성들은 뒤로 가라고 했지

오랜 시간 싸우면서 무서웠던 적은 없냐고 물으니 '공장에서 용역들하고 싸울 때'라고 했다. 오석순 조합원의 목을 조르는 남성 용역(사측이 만든 노동운동 파괴조직)을 볼 때 정말 끔찍했다고 했다. 그렇다고 용역과 맞서는 것을 연대 온 사람들에게 미루지는 않았다.

"2006년 싸움 때도 남자 용역이 많았어. 남자 용역들이 막은 공장 문을 해머로 부수고 현장에 열 발자국 들어간 것도 여성조합원들이 나서서 했다. 9박 10일 투쟁 할 때, 바닥에 눕는 투쟁도 우리가 앞장섰지. 거친 투쟁은 남자가 한다거나,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이 없어. 치마를 입어본 적도 없어. 현장에서의 성차별이 있었지만 싸울 때 우리가 여성노동자라는 걸 강조하지는 않았던 거 같아. 우리 문제는 우리가 풀어야 한다는 게 컸거든. 연대자는 연대자인 거니까. 당사자가 풀어야지. 그래서 우리는 남성동지들이 연대와도 '남자들은 앞으로 오세요'가 아니라 '뒤로 가세요' 그랬지."

그렇다보니 노동운동계에서 '기륭형님'이라는 별칭도 얻었다. 유 분회장은 여성노동자들이 대부분 비정규직인 현실에서 비정규직문제를 풀고 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비정규직운동에 대한 사회적 연대투쟁 촉발

공장점거 파업 이후에 삭발투쟁, 단식투쟁, 고공농성, 그리고 오체투지까지 했다. 2008년 투쟁 전 하이서울페스티벌이 열렸을 때는 조명탑 위에서 고공농성도 했다. 함께 올라간 최은미 조합원이 고소공포증으로 벌벌 떨면서 올라가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두려움을 잊으려 함께 불렀던 비정규직 철폐가! 과거로 돌아간 듯 눈빛이 반짝인다.

유 분회장에게 67일간의 단식투쟁이 힘들지 않았냐고 물으니 괜찮았다며, 힘든 건 2010년이었다고 했다. 2010년은 교섭이 지지부진해서 앞이 보이지도 않았다고 했다.

"그때는 정말 내가 감당하지 못하는 선까지 갔던 거 같아. 사회적 연대로 버틸 수 있었어. 윤종희, 오석순, 김소연이 모두 올라가 있어서 내가 발로 뛰어야 했잖아. 교섭도 힘들고 몸도 힘들고 고민이 많았어. 내가 내뱉은 말을 다 지킬 수 있을까, 거짓말이 되면 어쩌나 되돌아보게 됐지. 그런데 사실 출투(출근투쟁)가 더 힘들었어. 출근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는 거니까. 매일 회사를 볼 때마다 '정말 내가 이 회사를 다니고 싶은 걸까' 스스로 묻게 되니까 힘들었어."

2008년 투쟁은 고공농성과 단식투쟁으로 널리 알려졌다. 사회적 연대도 활발하게 일어났다. 당시 나도 기륭전자투쟁에 연대하기 위해 들락거리는 시간이 많아졌다. 2005년 시작된 투쟁이 1000일을 넘기려 하고 있었다. 특히 김소연 분회장이 94일의 단식으로 죽음의 문턱에 서며 큰 사회적 파장이 일었다. 함께 단식을 시작한 유 분회장은 뼈만 남은 모습으로 먼저 병원에 실려 가면서도, 오래된 동지 김소연을 두고 가는 것이 더 마음이 아파 눈물을 흘렸다.

"1000일 투쟁하고 나서 나를 버티게 하는 힘을 무엇일까 생각해봤어. 아마도 사람들과의 관계가 아닐까. 혼자 하는 싸움이 아니니까. 조합원들과 수많은 시민들과 단체 활동가들, 서로가 보이지 않는 줄로 연결돼 있는 느낌이지. 자기 시간과 마음을 내주고 함께 한 사람이 있는데 어떻게 이걸 끊고 가. 아마도 계속 싸웠던 건 나만의 싸움이 아니기 때문인 거 같아. 이미 사회적 연대로 우리 투쟁은 기륭만의 싸움이 아니게 된 거잖아."

기륭전자 투쟁에 대한 사람들의 애정은 저절로 생긴 것이 아니다. 단식투쟁을 하면서도 조합원들은 연대 온 사람들 밥 챙기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뿐인가. 기륭전자 투쟁 과정에서도 다른 투쟁에 연대를 쉬지 않고 했다. 울산 현대차 비정규직 노동자 싸움에, 한진중공업 김진숙 크레인농성 희망버스에, 쌍용자동차 투쟁 등 안 간 곳이 없다. 자기 사업장 투쟁에 매몰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함께 싸워야 이긴다고 생각했다.

2010년 사회적 합의로 싸움이 일단락됐다고 여겼을 때에는 연대해준 시민, 단체, 문화예술노동자들에게 일일이 인사를 했다. 그녀들의 사회적 연대에는'정'이 묻어있다. 연대나 투쟁에 사람 냄새가 가득했다. 힘든 오체투지 과정에서도 웃음기가 사라진 적이 없다.

▲2020년 1월 기륭전자분회 조합원들과 연대자들이 최동열 회장 집앞에서 체불임금 지급하라는 집회를 한 후 기념촬영 ⓒ기륭전자분회

사회적 합의를 물거품으로 만들었으나

조합원들은 국회의원회관 점거농성까지 하며 치열하게 싸워 정치권을 움직였다. 2010년 11월 정규직 직접고용 복직 합의가 이뤄졌다. 그때만 해도 없던 불법파견 관련한 의무조항이 생기는 등 성과를 거뒀다. 그런데 회사는 2013년, 본사를 옮기더니 신대방동 건물에 출근한 노동자들에게 업무도 주지 않았다. 합의이행을 거부한 것이다. 그해 12월 최동열 회장은 임직원도 자르고 야반도주했다. 돌아갈 공장이 없어진 것이다.

다시 거리로 나와 오체투지를 했다. 비정규직 제도를 없애지 않고는 그 무엇도 일시적인 것으로 끝날 수밖에 없다는 생각으로 비정규직 제도를 없애는 투쟁을 하기로 했다. 그런 의미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상경투쟁을 할 때 쉴 수 있는 비정규노동자의 집 '꿀잠'을 만들기로 결의한다. 많은 시민사회가 마음을 모아 꿀잠이 2017년 만들어졌다.

"우리는 마지막까지 명분을 중요시 여겼고 투쟁의 원칙을 놓치지 않고 가려고 했어. 모두가 동의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잖아. 조합원들이 흔쾌히 동의해준 게 고맙지."

비정규직 노동자의 삶의 조건은 더욱 나빠지는데 투쟁은 흩어져 있었다. 촛불투쟁 이후 새로 취임한 문재인 대통령은 비정규직 제로를 만들겠다고 선언했으나 현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유 분회장을 비롯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2018년 11월, '비정규직 이제그만 1100만 공동투쟁' 만들자는 제안을 한다. 비정규직 당사자들이 함께 투쟁하면 뭔가 달라지지 않을까 싶었다. 당사자들의 절박함도 중요할 뿐 아니라 같이 싸우면 서로가 연결되어 있음을 피부로 느끼고 문화도 바뀌지 않을까. 비정규직 제도가 만든 개별화된 현실을 바꿀 무언가가 되지는 않을까 기대했다. 그녀는 현재까지 집행위원장으로서 비정규직노동자들과 함께 투쟁을 이어가고 있다.

유 분회장의 얘기를 듣고 있자니 '전설'의 낱말 뜻이 다시 훅 새겨진다. 기륭전자투쟁을 여성비정규직의 전설적 투쟁이라고 일컫는 것도 어쩌면 포기하거나 타협하지도 않으면서 그리고 자기 사업장의 문제로만 싸운 적이 없어서는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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