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0년간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으로 바뀐 것도 있으나 갈 길은 여전히 멀다. 인권운동네트워크 바람은 6월 5일 전설의 투쟁을 했던 여성노동자들을 모시고 <바람 같은 전설의 언니들> 이야기마당을 개최한다. 그러나 여성노동자들의 투쟁과 삶은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이에 그녀들이 해왔던 투쟁과 현재의 고민을 연재한다. 편집자.
※ 이야기마당 <바람 같은 전설의 언니들>은 5일 오후 2시 온라인으로 중계된다.(☞바로가기 : "전설의 투쟁을 했던 여성노동자들을 모십니다.")
0. 연재 순서
<바람 같은 전설의 언니들>① 동일방직 해고자 김용자 님을 만나(☞바로가기)
<바람 같은 전설의 언니들>② 구로동맹파업투쟁의 김준희 님을 만나(☞바로가기)
<바람 같은 전설의 언니들>③ 기륭전자분회의 유흥희 님을 만나
유흥희 기륭전자분회장에게 <바람 같은 전설의 언니들> 이야기마당에 나오라고 했더니, "내가 어디 대선배님들과 같이 하냐"며 고개를 젓는다. 사실 유 분회장은 활발하게 투쟁하는 현직이다. 기륭전자 최동렬 회장에 대한 법적 소송도 조금 남았다. 게다가 그녀는 요즘 눈에 띄게 투쟁하고 있는 '비정규직이제그만 1100만 비정규직 공동투쟁(비정규직이제그만공동투쟁)'의 집행위원장이다. 나는 "기륭전자는 살아있는 전설이지. 여성비정규직 투쟁을 그렇게 치열하게, 그렇게 길게, 공장의 벽을 넘어 한 곳이 있어?"하며 꼬드겼다.
마음의 고향, 구로공단
유 분회장은 정화여상 재학 시절, 학내 민주화운동을 했다. 사학비리를 알린 전교협 선생님들을 지지하는 사학비리 투쟁을 함께했고, 그 과정에서 시험거부 투쟁(백지동맹)과 농성을 했다. 고등학교 때 투쟁한 적이 있으니, 혹시나 노동운동을 하기 위해 목적의식적으로 구로공단에 들어간 것은 아닌가 싶어 물었다. 그건 아니라고 했다.
생계를 해결하러 공단에 갔는데 어쩌다 보니 노동운동을 하게 된 경우라 다들 정신 나갔다고 했다. 유 분회장은 공단에서의 첫 1년은 너무 힘들었다고 했다. 공장에서는 위장 취업자와 같은 노동조합을 만드는 시늉만 하는 사람을 눈에 불을 켜고 찾는 분위기가 여전했다. 작은 떡볶이 모임만 가도 이상한 눈으로 보고, 사람들을 따로 만나기만 해도 요주의 인물처럼 관리했다. 결국 4년 7개월 만에 제대로 모임조차 만들지 못하고 현장을 그만두었다. 그 후 구로지역 도서관에서 단체 상근활동을 시작한다. 을지로의 인쇄노조 취업알선센터 상근자로도 일했다. 그렇게 몇 년을 보낸 뒤, 돈을 벌어야 하는 현실에 다시 구로공단으로 돌아갔다. 노동자로 살아야겠다는 마음이었다. 그녀에게 공단은 마음의 고향이었다.
파견직만 뽑는 달라진 구로공단
2005년 구로공단의 모습은 92년과 확 달라져 있었다. 구로공단에도 인력사무소, 파견업체가 넘쳐났다. 공장에서 노동자를 직접 뽑는 곳이 아예 없었다. 벼룩시장이나 인터넷으로 뽑았다. 1998년 '파견근로자보호 등에 관한 법률(파견법)'이 통과된 후 비정규직 사용하는 회사가 늘어난 것이다. 옛날 굴뚝형 공장이 사라지고, 아파트형 공장들이 들어섰다. 바뀐 공장 대부분은 50명 미만의 노동자들을 고용하는 공장들이 많았다. 그래도 규모가 있는 곳을 들어가고 싶었다. 여러 곳에 이력서를 넣었는데 나이는 많고 경력은 짧고, 게다가 경력 단절의 시간까지 있어서 인지 취업이 잘 안 됐다. 파견회사를 통해 들어간 곳에서 생애 처음 해고라는 것을 당해봤다. 그러다 2005년 6월, 워커스테이션이라는 파견회사를 통해 취업을 했다. 가리봉역에서 봉고차에 태워져서 들어간 곳이 우연하게도 기륭전자였다.
면접은 간단했다. 33세라는 나이가 있으니 길게 일할 수 있는지, 혹시 결혼은 하지 않을지 물었다. 돈이 필요해서 길게 다닐 거고 야간특근 다 할 수 있다고 했다. 입사일만 적힌, 기간이 없는 계약서에 서명했다. 들어간 지 얼마 안 되었으니 조용히 지내려고 했다.
기륭전자의 파견노동자들은 최저임금보다 10원 많은 64만 8540원을 받았다. 잔업과 특근을 많이 해도 겨우 100만 원을 받을 수 있었다. 기륭전자에는 정규직과 계약직, 파견직 등 여러 고용형태가 있었다. 무분별한 해고와 차별적인 문화가 넘쳐나 짧은 기간이었지만 자연스럽게 노조에 가입했다.
기륭전자 노조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함께 만든 노조다. 여성노동자가 많은 사업장이었으나 남녀 차별은 존재했다. 남성은 다 정규직이었다. 반면 여성은 생산직 중 조장 정도만이 정규직이었다. 정규직 중에 산전산휴 휴가를 쓰고 온 사람이 생긴 후에 기륭전자는 젊은 여성노동자는 6개월만 계약했고, 나이든 기혼 여성노동자는 1년 계약을 했다. 젊은 여성노동자는 결혼하거나 임신할 수 있다는 가정을 깔고 계약기간을 다르게 정한 것이다.
같은 포장업무를 해도 남성이 더 임금이 많았다. 심지어 정규직 여성노동자가 육아휴직 갔다 왔다고 괴롭히기도 했다. 노조는 노동부에 남녀 임금차별 진정을 해서 시정명령을 받았고, 실제로 법을 통해 차별된 임금을 받아 내기도 했다.
1895일, 간접고용 불법파견 투쟁
두 번째라 노조활동은 자연스러웠다. 2005년 노조는 인력파견업체들을 불법파견·파견직 임금차별(임금미지급)로 노동부에 진정했다. 파견법에는 제조업의 파견노동자 사용을 금지하고 있다.
기륭전자 직원 500명 중 연구원 200명은 정규직인데 반해 생산직 300명 중 정규직은 단 10명에 불과했다. 계약직이 40명이었고, 250명은 파견노동자였다. 감사 나온 노동부에서도 이런 구조는 처음 본다고 할 정도였다. 2005년 8월 초 파견법 위반이라는 결정이 나왔다. 노조는 '불법파견 정규직화'를 내걸고 8월 24일부터 공장점거 파업에 돌입한다. 그렇게 시작된 불법파견 비정규직 투쟁은 1895일이나 이어진다.
실제 근무한 기간이 짧았는데도 왜 계속 싸웠냐고 물었더니, "어차피 파견이 넘쳐나니 어딜 가도 하루살이 노동자로 살 수밖에 없어서"라고 답한다. 그리고 너무 사람 취급 받지 못하는 것이 억울했다고.
불법파견은 기륭전자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파견이 확산되면서 3개월짜리, 6개월짜리 불법파견이 넘쳐났다. 파견노동자들은 길어야 1년을 일하고 나면 다시 일자리를 알아봐야 하는 신세다. 노조가 파견문제, 비정규직 문제에 대해 끝까지 싸워야 할 이유들이 하나씩 늘어났다.
기륭전자는 하청업체와의 계약 해지를 이유로 이들을 전원 해고했다. 그러나 법원은 기륭전자 노동자의 손을 들어주지 않았다. 검찰은 사측에 불법파견 혐의를 적용했으나 500만 원 벌금이 끝이었다. 반면 노동자들에게는 업무방해와 손해배상이 줄을 이었다. 그렇다고 싸움을 멈출 수는 없었다.
남성들은 뒤로 가라고 했지
오랜 시간 싸우면서 무서웠던 적은 없냐고 물으니 '공장에서 용역들하고 싸울 때'라고 했다. 오석순 조합원의 목을 조르는 남성 용역(사측이 만든 노동운동 파괴조직)을 볼 때 정말 끔찍했다고 했다. 그렇다고 용역과 맞서는 것을 연대 온 사람들에게 미루지는 않았다.
그렇다보니 노동운동계에서 '기륭형님'이라는 별칭도 얻었다. 유 분회장은 여성노동자들이 대부분 비정규직인 현실에서 비정규직문제를 풀고 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비정규직운동에 대한 사회적 연대투쟁 촉발
공장점거 파업 이후에 삭발투쟁, 단식투쟁, 고공농성, 그리고 오체투지까지 했다. 2008년 투쟁 전 하이서울페스티벌이 열렸을 때는 조명탑 위에서 고공농성도 했다. 함께 올라간 최은미 조합원이 고소공포증으로 벌벌 떨면서 올라가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두려움을 잊으려 함께 불렀던 비정규직 철폐가! 과거로 돌아간 듯 눈빛이 반짝인다.
유 분회장에게 67일간의 단식투쟁이 힘들지 않았냐고 물으니 괜찮았다며, 힘든 건 2010년이었다고 했다. 2010년은 교섭이 지지부진해서 앞이 보이지도 않았다고 했다.
2008년 투쟁은 고공농성과 단식투쟁으로 널리 알려졌다. 사회적 연대도 활발하게 일어났다. 당시 나도 기륭전자투쟁에 연대하기 위해 들락거리는 시간이 많아졌다. 2005년 시작된 투쟁이 1000일을 넘기려 하고 있었다. 특히 김소연 분회장이 94일의 단식으로 죽음의 문턱에 서며 큰 사회적 파장이 일었다. 함께 단식을 시작한 유 분회장은 뼈만 남은 모습으로 먼저 병원에 실려 가면서도, 오래된 동지 김소연을 두고 가는 것이 더 마음이 아파 눈물을 흘렸다.
기륭전자 투쟁에 대한 사람들의 애정은 저절로 생긴 것이 아니다. 단식투쟁을 하면서도 조합원들은 연대 온 사람들 밥 챙기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뿐인가. 기륭전자 투쟁 과정에서도 다른 투쟁에 연대를 쉬지 않고 했다. 울산 현대차 비정규직 노동자 싸움에, 한진중공업 김진숙 크레인농성 희망버스에, 쌍용자동차 투쟁 등 안 간 곳이 없다. 자기 사업장 투쟁에 매몰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함께 싸워야 이긴다고 생각했다.
2010년 사회적 합의로 싸움이 일단락됐다고 여겼을 때에는 연대해준 시민, 단체, 문화예술노동자들에게 일일이 인사를 했다. 그녀들의 사회적 연대에는'정'이 묻어있다. 연대나 투쟁에 사람 냄새가 가득했다. 힘든 오체투지 과정에서도 웃음기가 사라진 적이 없다.
사회적 합의를 물거품으로 만들었으나
조합원들은 국회의원회관 점거농성까지 하며 치열하게 싸워 정치권을 움직였다. 2010년 11월 정규직 직접고용 복직 합의가 이뤄졌다. 그때만 해도 없던 불법파견 관련한 의무조항이 생기는 등 성과를 거뒀다. 그런데 회사는 2013년, 본사를 옮기더니 신대방동 건물에 출근한 노동자들에게 업무도 주지 않았다. 합의이행을 거부한 것이다. 그해 12월 최동열 회장은 임직원도 자르고 야반도주했다. 돌아갈 공장이 없어진 것이다.
다시 거리로 나와 오체투지를 했다. 비정규직 제도를 없애지 않고는 그 무엇도 일시적인 것으로 끝날 수밖에 없다는 생각으로 비정규직 제도를 없애는 투쟁을 하기로 했다. 그런 의미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상경투쟁을 할 때 쉴 수 있는 비정규노동자의 집 '꿀잠'을 만들기로 결의한다. 많은 시민사회가 마음을 모아 꿀잠이 2017년 만들어졌다.
비정규직 노동자의 삶의 조건은 더욱 나빠지는데 투쟁은 흩어져 있었다. 촛불투쟁 이후 새로 취임한 문재인 대통령은 비정규직 제로를 만들겠다고 선언했으나 현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유 분회장을 비롯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2018년 11월, '비정규직 이제그만 1100만 공동투쟁' 만들자는 제안을 한다. 비정규직 당사자들이 함께 투쟁하면 뭔가 달라지지 않을까 싶었다. 당사자들의 절박함도 중요할 뿐 아니라 같이 싸우면 서로가 연결되어 있음을 피부로 느끼고 문화도 바뀌지 않을까. 비정규직 제도가 만든 개별화된 현실을 바꿀 무언가가 되지는 않을까 기대했다. 그녀는 현재까지 집행위원장으로서 비정규직노동자들과 함께 투쟁을 이어가고 있다.
유 분회장의 얘기를 듣고 있자니 '전설'의 낱말 뜻이 다시 훅 새겨진다. 기륭전자투쟁을 여성비정규직의 전설적 투쟁이라고 일컫는 것도 어쩌면 포기하거나 타협하지도 않으면서 그리고 자기 사업장의 문제로만 싸운 적이 없어서는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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