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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같은 전설의 언니들을 만났다..."길이 보여서 여기까지 온 게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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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같은 전설의 언니들을 만났다..."길이 보여서 여기까지 온 게 아니야"

[바람 같은 전설의 언니들] ① 동일방직 해고자 김용자 님을 만나

지난 40년간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으로 바뀐 것도 있으나 갈 길은 여전히 멀다. 인권운동네트워크 바람은 6월 5일 전설의 투쟁을 했던 여성노동자들을 모시고 <바람 같은 전설의 언니들> 이야기마당을 개최한다. 그러나 여성노동자들의 투쟁과 삶은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이에 그녀들이 해왔던 투쟁과 현재의 고민을 연재한다. 편집자.

0. 연재 순서

<바람 같은 전설의 언니들>① 동일방직 해고자 김용자 님을 만나

<바람 같은 전설의 언니들>② 구로동맹파업투쟁의 김준희 님을 만나

<바람 같은 전설의 언니들>③ 기륭전자분회의 유흥희 님을 만나

*행사 참여 링크 http://bit.ly/21바람후원행사신청

▲김용자 동일방직 복직투쟁위원장. 2019년 톨게이트여성노동자들에게 후원금과 후원물품을 전달했다. ⓒ동일방직복직투쟁위원회

김용자 동일방직 복직투쟁위원장을 처음 만난 건 톨게이트 수납노동자들의 싸움 때였다. 1978년에 있었던 철저한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이 40년이 지난 2019년에도 반복되고 있기에, 이들을 응원하고 경험을 나누는 자리가 마련되었다. 한국도로공사는 법원도 인정한 직접고용의무를 저버린 채 자회사를 거부한 톨게이트수납노동자들을 집단해고 했는데 대부분이 여성들이었다. 톨게이트여성노동자들도 상의탈의 투쟁, 고공농성, 노숙농성, 단식농성 등 하지 않은 게 없었다. 왜 40년이나 흘렸는데 달라진 게 없을까?

어용노조를 만들려는 남성노동자들에 맞서

70년대 대표적인 여성사업장인 동일방직 투쟁은 어땠는지, 지금도 달라진 게 없는 성차별적인 여성노동자의 현실에 대한 얘기를 들으려 김용자 위원장을 만났다. 김위원장은 단호하고도 차분한 어조로, 43년째 복직투쟁 중이라고 했다.

"우리는 돌아갈 현장이 있기 때문에 투쟁도 길게 했어. 동일방직 사건 같은 경우는 세계적으로도 있을 수 없는 역사적인 사건들이잖아요. 똥물사건, 나체시위까지. 똥물을 끼얹고 그 사람들을 해고시키고. 피해자들을 내몬 거잖아. 우리도 억울하니까 포기할 수 없었지. 사실 한국노총, 국가권력, 회사 이 3자가 합심해서 우리를 탄압한 거잖아."

나중에 밝혀진 사실에 따르면 동일방직의 민주노조를 없애기 위해 한국노총만이 아니라 중앙정보부도 개입했다. 사찰의 흔적이 국정원과거사진상규명에서 드러났다. 78년 2월의 똥물투척사건도 당시 어용이던 한국노총과 회사의 합작으로 이뤄졌다. 주요 행위자는 남성노동자들이었다. 그 이전의 투쟁인 1976년의 상의탈의 시위도 남성노동자들이 사측관리자와 함께 여성집행부를 불신임하려고 하자 이에 대항하면서 벌어진 투쟁이다.

왜 남성노동자들은 사측의 입장에 서서 폭력을 행사했던 것일까.

회사는 당시 다수의 여성노동자들을 효과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소수의 남성노동자들에게 특권을 주었다. 당시에는 지금보다 성차별적인 편견이 넘쳐났던 시대라 여성노동자에 대한 성희롱과 무시도 극에 달했다. 이른바 성별화된 노동통제다. 여성노동자들을 효과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남녀 성별 권력관계의 차이를 이용해 여성들에 대한 차별과 착취를 극대화한 것이다. 70년대 말 여성노동자들은 남성노동자들의 임금 절반인 5~6만원을 받았다.

"동일방직 직원 1300명 중에 남자들이 180명밖에 안됐어. 그런데도 불구하고 남자들이 주도권을 잡아야한다고 생각한 거지. 임금도 굉장히 차이가 컸어. 그러니까 노동조합 여성지부장을 탄생시킨 거지, 도저히 안 되겠거든. 3교대인데 화장실 갈 시간이 밥 먹을 시간이 없었어."

국무총리가 나오는 행사를 망치다

똥물투척 사건 이후 124명이 해고되었다. 해고된 후 갈 곳이 없었던 대다수 조합원은 인천 도시산업선교회(산선)에서 생활한다. 산선 앞은 항상 사복형사들이 즐비했다.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미행했다. 동일방직 여성노동자들의 해고는 국가권력과의 공모로 이루어진 것이니 예상가능한 일이다.

그러다보니 해고싸움은 국가기관에 대항한 싸움과 국가와 공모한 어용인 한국노총에 대항한 싸움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장충체육관에서 벌인 시위로 생방송을 중단시키기까지 했다. 1978년 3월 근로자의 날 행사가 장충체육관에서 열렸다. 국무총리까지 참석하는 규모있는 행사였다. 동일방직 여성노동자들은 행사장에 가서 "우린 똥물을 먹고 살수 없다"며 현수막을 펴고 구호를 외쳤다. 대부분 연행됐다. 나머지는 명동성당에 가서 단식농성을 했다. 나중에 종교 측의 중재로 일부는 현장에 복직했으나 나머지는 들어갈 수가 없었다.

"원래 명동성당에서 합의할 때는 조건 없이 복직을 시켜준다고 했어. 그런데 그렇지 않은 거지. 노조도 인정하고 우리가 해고됐던 기간의 임금도 보장하라. 그 조건으로는 못 간다 했지. 124명 중 76명이 남은 거지. 들어간 사람들이 한 달도 안 돼 나왔어. 못 견디고 다 나왔어. 현장에서 일하는데 형광등 깨고 협박하고 그랬나 봐요. 어떻게 혼자 들어가서 제대로 일하겠어. 노동조합이 살아서 (현장에) 들어가도 힘든데, 어리석은 결정인 거죠. 혼자라도 들어가는 게 내가 살 길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아니에요. 동지들을 배신할 수 없어. 그건 내 인생의 패배야. "

새롭게 집행부를 꾸리고 싸움을 이어갔다. 한국노총도 점거하고 동일방직을 다룬 연극을 하면서 투쟁을 이어가기도 했다. 1978년 9월 동일방직 똥물투척사건을 다룬 연극을 하던 여성노동자들은 연극을 하던 중 현수막을 들고 종로거리로 나와 시위를 했다. "노동3권 보장하라","유신헌법 철회하라" 경찰은 바로 진압에 나섰다.

"연극하고 다 잡혀갔어. 그때 정말 무서웠지. 그때 한 30명 이상은 구류됐어. 안기부, 치안부에 갔지. 매일 밤 11시만 되면 끌려가서 맞고 오고 그랬어. 가차 없었지."

김위원장은 똥물 사건만이 아니라 해고 이후의 싸움에도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해고 이후에 동일방직 노동자들하고 감옥에 간 사람이 60명이야. 구속사유는 폭력. 인천지역 사람들과 연대해서 인천 노동청을 점거 농성했지. 6명 다 구속됐지. 잡혀가면 정말 죽을 만큼 맞았어. 대우 이런 건 없었어. 구류 아니면 구속이지. 그때는 노동자들한테 특히 가혹했지."

투쟁을 통해 얻은 존재감

가혹한 탄압을 받았으나 여성노동자의 정신, 사회에 대한 생각을 놓지 않고 살았다. 나중에 들어간 현장에서도 열심히 하다 보니 일곱 번이나 해고당했다. 그러나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다. 오히려 동일방직투쟁을 통해 세상을 보는 눈을 얻었다며,'동일방직대학교'라고 작명까지 했다.

"당시로 되돌아가도 그런 선택을 하냐고 누가 물어. 나는 당연히 그 선택을 할 거 같다고 해. 그렇게 싸움으로써 내 존재감을 알았고 나도 쓸모 있는 인간이란 걸 배웠거든. 해고 안 당했으면 이 자리에 없다고 생각해. 우리는 이름도 없었어. 그때만 해도. 공순이 공돌이였거든. 근데 우리가 그걸 깬 거야. 나는 공순이가 아니다, 내 이름을 불러라. 내 이름이 있는데. 공장에서 나만 일하는 게 아닌데, 똑같은 인간이고, 귀천이 어디 있냐. 뭘 하든 똑같은 인격체로 바라봐야지. 우리가 그걸 주장한 거고. 그런 점에서 우리가 이겼다고 나는 생각해. 그래서 그 삶이 고단했지만 그래도 다시 선택할 거 같아."

그러면서 그것조차도 동지들과 함께 했기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고 했다.

"블랙리스트로 취업도 안 되고. 내일 먹을 쌀도 없었어, 너무 무서웠지, 칼 들고 죽는다고 옥상에 올라간 사람도 있었지. 그래도 버틸 수 있는 것은 동지들이 함께 하기 때문이야."

그래서인지 43년째 하는 모임인데도, 만나면 서로 밤새 이야기를 한다고 했다. 사회문제를 이야기 하느라, 고단했던 투쟁을 이야기하느라 시간이 모자란다고 했다.

최근 있었던 LG트윈타워 청소노동자투쟁 이야기가 나왔다. 회사가 2천만 원으로 회유해서 몇 명이 투쟁을 접었고 나며지는 나중에 이겨서 현장으로 복귀한다고 했다.

"자신이 선택할 걸 잘못했다고 후회하면 내가 불행할 거 같아. 어렵게 가진 그 가치관을, 동지들과 이어온 그걸 포기하는 게 진짜 포기지. 그냥 잠시 생계를 위해 쉬는 거랑 다르지."

ⓒ동일방직복직투쟁위원회

길이 보여서 여기까지 온 게 아니야

어떻게 그렇게 포기하지 않고 싸울 수 있었냐고 묻자 길을 알아서 싸운 것은 아니라고 했다. 경제적으로 너무 힘들어서 알바를 하더라도 마음은 포기할 수는 없었다고 했다.

"어찌됐든 그런 투쟁의 과정이 있으니까 단단해진 거지. 우리가 포기할 수 없는 이유가 그런 거기도 했고. 앞에 길이 보여서 여기까지 온 게 아니야. 너무너무 깜깜한데다 벼랑 끝이라 설 때가 없는 거야, 죽기 살기로 헤쳐 나가지 않으면 길이 없잖아. 그래서 여기까지 온 거지. 노동자들도 권리를 얘기할 수 있고 싸우면 이길 수 있고 얻을 수 있다는 걸 배웠지. 지금도 후배들한테 말해. 우리의 삶 속에 그 정신은 죽을 때까지 가져가야되는 거라고."

김위원장은 회사가 폐업했지만 복직 투쟁은 끝나지 않았다고 했다. 작년에 인천 만석동에 있는 사업장은 문을 닫았다. 지금도 마찬가지로 복직을 포기하지 않았다고 했다.

"동일방직에는 계열사도 13개나 있으니까. 방직은 아니더라도 상징적으로라도 나는 복직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 작년 하반기에 민변하고 만났어. 마지막으로 우리가 회사 상대로 복직 소송을 할 수 있느냐. 팀이 꾸려졌어. 원직복직을 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법리 해석을 했지. 시효도 있고 나이도 있고 공장도 없고 이런 부분에서 볼 때 어려울 거 같다고 그러더라고. 그런데 우리가 그냥 해보지도 않고 포기하는 건 난 하고 싶지 않다, 그렇게 말했어. 어렵겠지만 시도는 해봐야지."

왜 복직을 하고 싶냐고 재차 물었더니 "억울하니까"라고 답한다.

"내가 당했던 것들이 너무 잘못됐기 때문에 그거를 바로잡기 위해서지. 원직복직은 반드시 해야 해. 민주화운동으로 인정됐지만 종이때기 하나로 명예회복이 되는 건 아니야, 완전한 명예회복은 현장 복직이야. 하루라도 복직돼야지."

43년 만에 복직이라! 한 생애에 걸친 싸움을 하는 모습이 눈이 부시다. 자신이 세운 가치관을 지키며 동지들과 함께 가겠다는 의지가 맑고 그러나 무겁지만은 않다. 김위원장은 행복하게 살기 위해 싸운다고 했다. 얼마 전 갔던 개울물과 바위가 떠올랐다. 바위틈에 고인 물은 따뜻하지만 이끼가 피었고, 흐르는 저편 물은 깨끗하고 시원했다. 흐르는 물의 생명력이 느껴졌다. 투쟁하는 여성노동자들이 역사에서 절대 지워지면 안 되겠구나! 묘한 사명감을 느끼며 인터뷰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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