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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쟁의 역사’ 공추위 26년…‘주민운동의 전설’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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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쟁의 역사’ 공추위 26년…‘주민운동의 전설’이 되다

공추위 집행부는 ‘투사’가 되어 돌격·헌신

고한사북남면신동지역살기공동추진위원회(위원장 김태호·공추위)는 강원도 탄광촌의 주민운동단체이다.

생존권 투쟁을 위해 만들어진 공추위는 결집력과 투쟁력, 기획력 등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국내 주민운동사에서 새로운 전설로 평가받는다.

▲지난 3월 23일 사북 뿌리공원에서 열린 '폐특법 족쇄 혁파 및 3.3주민운동의 날 기념식'에 이철규 국회의원, 최승준 정선군수, 김태호 공추위 위원장이 퍼포먼스를 진행하고 있다. ⓒ정선군

강원랜드 설립의 일등 공신에 자만하지 않고 끊임없는 담금질과 내부혁신을 통해 강원도 등 지역사회는 물론 중앙 정치권과 중앙부처에도 (공추위의)존재감을 분출해왔기 때문이다.

때문에 공추위를 일컬어 잠자는 ‘휴화산’이 아니라 언제 터질지 모르는 불타는 ‘활화산’으로 비유되기도 한다.

공추위 발족이후 강원랜드 설립의 근간이 되는 폐특법 제정을 시작으로 폐특법 시한부의 족쇄를 걷어내는 빛나는 성과를 계기로 공추위 26년의 역사를 되돌아보는 시리즈를 4회에 걸쳐 연재한다(편집자 주)

◆생존권 투쟁으로 외면 받는 탄광촌→관심의 진원지가 된 열정의 단체

과거 탄광촌은 정치권과 중앙정부에서 철저히 소외된 관심 밖 사각지대였다. 탄광에서 광부들 수십 명이 한꺼번에 사고로 죽임을 당하고 진폐증으로 연간 수백 명이 죽어나가는 살인적인 노동환경에서도 광업주와 정부는 오로지 석탄증산에만 혈안이었다.

근로기준법과 산재보상보험법, 광산보안법을 외면하는 기업주, 이를 옹호하는 관청과 경찰 등 기관에 주눅 든 광부와 가족들의 기본권은 막장에 매몰됐다.

이런 상황에서 1980년 4월 탄광촌 사북에서 발발한 사북사태는 ‘광부도 인간이다.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절규였고 가수 라훈아가 읊었던 ‘잡초’들의 반란이었다. 1980년 계엄령 하에서 일어난 사북사태는 당시 전두환 국보위의 신군부와 중앙정부 및 정치권을 당혹하게 만들었고 태풍의 눈으로 인식되었다.

사북에서 시작된 1980년 4월의 소요사태 이후 전국 주요 공단과 대학가에 이어 광주의 5월을 촉발시켰기 때문에 사북은 민심이반의 진원지로 인식되기에 충분했다.

▲1980년 4월 사북안경다리에 사북광업소 광부와 부녀자들의 진압을 위해 출동한 경찰관과 대치하는 광부들의 모습. ⓒ사북항쟁동지회

사북사태가 진정될 무렵 신민당 의원들이 현지 진상조사에도 불구하고 신군부는 계엄군을 앞세워 심야시간에 수백명의 광부와 부녀자들을 불법 체포, 연행해 폭행과 고문으로 짓이겼다. 이처럼 사북은 1980년 4월의 씻을 수 없는 통한의 아픔이 켜켜이 쌓인 곳이다.

정선지역 탄광촌의 중심인 고한읍과 사북읍은 1989년부터 급격한 폐광의 회오리에 휘둘리면서 지역주민들의 위기의식은 최고조에 달했다.

과거 고한사북은 ‘강아지도 지폐를 물고 다닌다’는 말이 나돌 정도로 호경기를 누렸으나 정부의 석탄산업 합리화정책이후 빈집이 늘어나면서 거리는 적막강산으로 변하며 탄가루만 날렸다.

1960년대와 1970년대를 거쳐 1980년대 중반까지 산업화시대의 일등공신이라며 ‘산업전사’라 칭송하던 정부가 1988년 서울올림픽의 성화가 꺼진 뒤 산업쓰레기처럼 배척당한 것을 주민들은 깨달았다.

무연탄이 국가경제발전의 ‘검은 진주’에서 하루아침에 ‘미운 오리새끼’로 전락하자 폐광촌은 버림받은 땅이 된 상황을 직시하게 되었고 주민들의 동요는 시작되었다.

이대로 주저 않을 수 없다는 절박감과 위기의식을 느낀 상인들과 지역주민, 광부들은 생존권 수호차원의 호소와 대정부 투쟁에 대한 필요성에 공감대가 형성된 것이다.

심을보 초대 공추위 공동위원장은 “국가에너지 자원개발을 위해 산업전사로 치켜세우며 증산정책을 추진하던 정부가 폐광정책으로 광부와 탄광촌을 팽개쳤다”며 “한숨과 자포자기 대신 강력한 주민궐기를 통해 정부와 투쟁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된 이유”라고 말했다.

이에 따라 1994년 12월 7일 출범한 공추위는 곧장 주민생존권보장 서명운동을 실시해 불과 6일 후 9837명에 달하는 서명을 받을 정도로 주민들의 투쟁 공감대는 하늘을 찔렀다.

▲1985년 2월 28일 사북복지회관 광장에서 지역주민과 광부 등 7000여 명이 집결해 대정부 투쟁을 선포하고 시가행진을 펼치고 있다. ⓒ공추위

박효무 초대 공추위 공동위원장은 “공추위 출범 초창기 관에서도 푸대접을 받았고 회원들의 식사와 교통비 등 모든 경비는 위원장 주머니에서 지출했다”며 “그만큼 지역주민 모두 절박했고 지역을 위해 뭉쳐 싸워야 한다는 의지 하나로 물불 가리지 않고 뛰었다”고 회고했다.

이듬해 2월 13일 공추위는 고한읍사무소에서 ‘탄광촌 생업보장 대토론회’를 열어 정부에 지역의 건의사항을 채택하고 정부가 이를 수용하지 않을 경우 대정부투쟁 불사선언을 했다.

정부가 공추위의 목소리를 외면하자 대토론회 2주 뒤인 2월 27일에는 사북광업소 복지회관광장에서 ‘생존권 쟁취를 위한 제1차 주민 총궐기대회’를 개최했다.

사북광업소 복지회관광장은 1980년 4월 민심이반의 도화선이 된 ‘사북항쟁’의 피눈물과 절규가 녹아있는 역사적인 의미가 있었고 제2의 ‘사북사태’도 불사한다는 공추위의 결연한 의지를 보여줄 필요성이 있었다.

2월 27일 고한과 사북의 1200여 상가가 모두 철시한 가운데 열린 주민 총궐기대회는 지역주민 5000여 명이 참여하는 성황을 이뤘다.

특히 집회를 앞두고 시내버스와 택시는 집회장소인 사북 복지회관 광장까지 무료로 주민들을 실어 날랐다.

추운 날씨에도 집회장에 모인 주민들의 열기는 뜨거웠고 연단에 오른 공추위 위원장과 지역대표들은 폐광촌을 외면하는 정부를 규탄하고 정부가 주민들의 요구를 외면할 경우에는 제2의 사북사태도 불사할 것임을 경고했다.

이날 1차 궐기대회의 하이라이트로 공추위원장과 주민대표 6명이 연단에서 삭발식을 감행했고 이어 복지회관 광장에서 현수막과 깃발을 앞세운 채 전체 주민들이 안경다리~사북석탄회관~사북읍사무소까지 1.5km구간에서 시가행진을 펼쳤다.

공추위 주도로 시작된 고한사북 주민들의 1차 생존권 투쟁은 영하의 날씨에도 불구하고 뜨거운 열정과 폭발적인 함성과 결집력을 보여주자 언론에서는 ‘제2의 사북사태’라는 표현이 등장했다.

그러나 사북사태 이후 15년이 지나 펼쳐진 1차 주민총궐기대회가 이처럼 엄청난 폭발력과 뜨거운 열정으로 종료되었지만 정부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이에 공추위는 다음날 다시 사북광업소 복지회관 광장에서 제2차 주민총궐기대회를 열었다.

제2차 총궐기대회에서 공추위는 투쟁의 강도를 높이고 주민들의 분노를 극적으로 표출하기 위해 정부규탄 차원에서 주민대표 40명이 삭발식과 무기한 단식투쟁을 선포하고 5000여 명의 주민들이 사북광업소 복지회관에 모였다. 상여를 앞세운 시가행진은 결연했고 미적지근한 정부 반응에 불만을 품고 태백선 철도 점거 농성까지 하자는 것이 고한사북 주민들의 투쟁 열기가 고조되기도 했다.

또한 고한과 사북지역의 이장 40명 전원이 정부의 폐광촌 냉대정책에 항의해 사퇴서를 정선군에 제출했다. 이어 지역의용소방대원과 군의원, 도의원들이 사퇴서를 제출하고 지역JC회장과 각급 사회단체장과 회원 100여 명도 삭발농성과 단식농성에 동참했다.

특히 공추위는 성명서를 통해 3월 3일까지 정부의 탄광촌 특별대책이 수립되지 않을 경우 대규모 궐기대회를 비롯해 초중고 학생들의 등교거부, 납세거부, 지방선거 불참운동까지 전개하겠다는 초강경 투쟁전략을 발표했다.

상황이 다급해지자 박우병 지역출신 국회의원이 나서 3월 1일 오후 심을보 공추위 위원장, 송계호 군의원, 동원탄좌노조 김영범 위원장, 성희직 도의원 등 4명이 박재윤 통상자원부장관과의 만남을 주선했다.

▲1980년 2월 27일 열린 제1차 생존권 투쟁에서 공추위 집행부가 대정부 투쟁을 선포하고 있다. ⓒ공추위

그러나 4시간에 걸친 협상에도 불구하고 박재윤 장관의 입에서는 주민대표단의 기대에 부응하는 답변이 나오지 않으면서 지역주민들의 실망감이 커졌고 급기야 정부에 대한 분노가 치솟기 시작했다.

성희직 전 도의원은 “박재윤 장관을 만난 주민 대표단은 주민들의 요구에 정부가 무엇을 해줄 수 있는지 답변을 요구했다. 그러나 장관의 답변은 너무 모호하고 딱 부러지는 내용이 없었다. 결국 4시간에 걸친 협상은 아무 것도 얻지 못하고 시간만 낭비했다. 이 소식이 사북지역에 알려지자 농성에 참여한 주민들의 분노가 더욱 고조되었다.”고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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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춘봉

강원취재본부 홍춘봉 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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