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 거대한 전환의 시대
세상은 늘 매일매일 새로운 세상으로 바뀐다. 세상을 바꾸는 요인은 너무도 많아서 어떤 세상으로 바뀔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특정 원인에 따른 특정 결과는 예측이 가능하다. 연기론, 인과론이다.
가뭄이 계속되면 식물이 말라 죽는다. 싹을 틔우고 꽃이 피는 봄날에 영하의 한파가 몰아닥치면 그해 농사는 거덜 난다. 열파가 지속돼 작물이 타 죽으면 식량전쟁은 필연이다.
그런데 지금 그런 이상기온이 해마다 반복되고 있고 그 정도도 점점 더 심해진다. 기후위기가 곧바로 식량위기의 세상으로 바뀌는 것은 시간문제다.
지구온난화의 주범인 화석연료 기반 자원약탈의 근대 석유문명이 끝나는 것도 시간문제다. 농업과 농민이 다시 최상위 직업의 엘리트로 변하는 것도 시간문제다.
거대한 전환의 시대가 이미 진행되고 있. 개인과 사회와 국가가 기후위기에 적응하고 극복하는 방법은 오직 지금의 개발과 성장주의 사고방식을 바꾸고 근대 산업문명 자체를 뿌리부터 바꾸는 거대한 생태전환 이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
태양계와 우주로까지 확대해서 어떻게 하면 더 효율성 높게 자원을 약탈할 것인가를 개발해 온 서구 근대 과학기술 문명 자체에 대한 근본에서부터의 성찰과 사고의 전환 없이는 생태전환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지금 조금씩 조금씩 변하는 조용한 전환이 아니라 소용돌이의 혁명 같은 전환의 한 복판에 서 있다.
생태전환은 민주주의 혁명이다
사회주의 혁명은 무장투쟁을 중심으로 한 계급혁명을 추구했다. 지난 세기에 전 세계의 사회주의 혁명 투쟁 과정에서 수천만 명에서 수억 명으로 추산되는 인민들이 학살되거나 굶어 죽었다.
히틀러의 나치즘도 국가사회주의 혁명을 내세웠다. 스탈린 또한 국가 사회주의 혁명을 추구했다. 어떤 역사학자는 스탈린의 러시아와 히틀러의 독일 사이에 있는 동유럽 인민들 약 2000만 명의 학살 기록을 조사하면서 당시의 동유럽을 '피에 젖은 땅'으로 이름 붙이기도 했다.(<피에 젖은 땅: 스탈린과 히틀러 사이의 유럽>(티머시 스나이더 지음, 함규진 옮김, 글항아리 펴냄)
생태전환은 계급투쟁이나 폭력 무장투쟁을 통해 달성되는 그런 성격의 변화가 아니다. 국가사회주의 혁명을 통해 이룩되는 그런 국가와 사회 또한 아니다. 자본가계급과 부농 등 가진 자들을 모조리 싹 죽여버리고 자본과 토지를 노동자 농민에게 골고루 나누어주는 과거 청산과 생산수단의 사회화를 실현하면 되는 것도 아니다.
오직 비폭력 평화의 대화와 설득 방식만이 생태전환의 방법론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의 각성과 깨달음을 통한 실천만이 거의 유일한 생태전환의 길이다.
그 어떤 개인도 자신이 스탈린이나 히틀러의 학살 대상이 되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 어떤 인민도 국가 지도자의 지시 명령에만 복종해야만 하는 자유 없는 삶을 살고 싶어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기후위기 시대, 거대한 전환은 오직 민주주의만이 답이다.
탐욕을 극대화한 산업문명 자체를 뿌리부터 바꾸기 위해서는 바로 그 뿌리인 인민들의 생각이 바뀌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매일매일 온실가스를 마구마구 배출하는 탐욕의 삶을 인민들 스스로가 멈추지 않으면 생태전환은 불가능하다.
우리가 산업문명이 강요한 탐욕의 삶을 멈추면 산업문명은 붕괴된다. 인민들이 모두 공장식 축산의 소고기와 돼지고기를 먹지 않으면 공장식 축산은 망한다. 인민들이 모두 비닐과 일회용 플라스틱을 구입하지 않으면 비닐과 일회용 플라스틱은 사라진다.
일찍이 붓다와 예수, 마호메트과 공자, 맹자, 노자 등 인류의 스승들은 탐욕을 멈추라고 설파했다. 각성과 깨달음을 통한 자유인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멈춰 서서 앞만 바라보던 시선을 안과 옆으로 돌려 자신의 내면과 이웃(선우(善友))을 돌아보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붓다 깨달음의 첫걸음은 '멈추고(止) 자신을 바라 보라(觀)'였다. 가톨릭 수도원에도 기도와 묵상의 예배당에 들어가기에 앞서 잠시 멈춰 서는 스타치오(statio)라는 공간이 있다.
생태전환은 산업문명의 삶을 멈추고 생태전환의 삶을 실천하는 인민들의 다단계 조직화 민주주의가 답이다.
농본주의의 재생
생태전환의 핵심에 농본주의 사회의 재생이 있다. 탈화석연료(post-carbon)의 자연순환 농업, 이산화탄소 흡수의 기후농업이 중심이 되는 사회는 필연이다.
수많은 청장년들이 기후위기 적응과 극복을 준비하는 첫걸음을 농업에서 찾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인간 삶과 사회의 근본은 먹거리와 에너지라는 너무도 간단한 상식의 회복이라고 볼 수 있다.
지금 한국에서 농민은 최하위의 신랑·신부감이다. 아니 신랑·신부감 후보도 되지 못한다. 농사일은 맨 밑바닥 최하위 직업이다. 아니면 은퇴한 뒤에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같은 하얀 집을 짓고 자연과 벗 삼는 한가로운 여가의 취미생활 정도로 인식되고 있을 뿐이다.
1992년 구소련이 몰락한 뒤 거의 공짜로 공급받고 있던 구소련의 석유공급이 끊긴 쿠바에서는 모든 석유경제가 붕괴되는 사태가 일어났다. 공장 가동이 멈춰졌고 자동차도 멈춰 섰다. 당연히 석유농업도 붕괴되고 말았다. 쿠바는 순식간에 식량난에 직면했다. 이렇게 되자 쿠바 농민은 최고의 소득을 올리는 직업이자 최고로 안정되고 존경받는 직업인으로 바뀌었다.
아마도 조만간 한국에서도 그런 상황이 들이닥치게 될 것이다. 대학을 나오고 공장식 축산의 닭장 케이지 같은 사무실 칸막이에 갇혀 사육되면서 억 단위 연봉을 받는 대기업 노동자가 무용지물이 되는 세상이 올지도 모른다. 잘 나가던 쿠바 엔지니어들도 석유문명의 개발과 성장 체제의 붕괴 이후에는 직업 자체가 사라지고 말았다. 2008년 금융위기 때 리먼 브라더스 등 잘 나가던 월가의 금융노동자들이 목에 직업 구함이라는 광고판을 걸고 길거리에 서 있는 사진이 기억날 것이다.
석유문명의 멸망 이후 최고의 신랑·신부감으로 농민이 손꼽히게 될 수 있다는 사실은 조금만 생각해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헛소리가 아니다. 2010년부터 그리스는 국가 부도 위기에 처하고 IMF 사태를 맞게 된다. 2012년 그리스의 15~24세 청년층 실업률은 무려 54%였다.
이때 수많은 그리스 청년들이 농촌으로 내려가 농민이 되었다. 그리스 농민 수 증가는 유럽에서 돋보이는 현상이었다. 이들 청년들은 지금도 지역 유기농 협동조합을 만들고 그리스 지역순환경제를 활성화하는 주춧돌로 활동하고 있다.
농부, 시대를 앞서가는 기후위기의 선도 엘리트
세상의 일이란 늘 반전이 있게 마련이다. 자본주의건 사회주의건 서구 근대 산업화를 추동했던 진보이념은 이제 재앙이었음을 깨닫는 수많은 사람들이 우후죽순으로 늘어나고 있다. 전 세계 도처에서 개발과 성장을 끝내고 산업체제를 생태적으로 전환하면서 자연순환, 지역순환의 경제와 공동체를 회복하기 위해 뛰어드는 수많은 젊은이들이 생겨나고 있다. 그레타 툰베리는 그 맨 선두에 선 거대한 생태전환의 기후위기 전사이다.
산업농업의 정점에서 전 세계에 석유농업을 수출하고 강요해 온 미국에서조차 수많은 풀뿌리 지역에서는 유기농 소농과 농산물 직거래, 지역공동체 기반 협동조합 등이 꾸준히 확대되고 있는 중이다. 한때 중농비대화론 논쟁까지 있었던 미국에는 농림부 통계에 아예 농민 수 항목조차 없다. 농민은 소멸되어 버리고 말았다. 극소수 초국적 농식품 복합체가 농업노동자를 고용해 비행기와 기계로 농사를 짓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미국에서 꾸준히 풀뿌리 소농들이 증가하고 있다. 버니 샌더스,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 코르테스(AOC) 등 새롭게 솟아오르고 있는 민주사회주의 정치운동은 매카시의 나라 미국에서는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더욱 놀라운 일은 이들 민주사회주의 정치운동에 미국의 젊은이들이 열광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운동의 밑바탕에는 에너지전환 탈화석연료의 포스트-카본시티 운동, 유기농 소농 운동, 풀뿌리 지역공동체 운동이 튼튼한 뿌리로 자리 잡고 있다.
일찍이 1980년대 장일순은 생태전환의 한살림 운동을 제창하고 이를 행동으로 실천했다. 1986년 재귀동에 한살림 생산자와 소비자의 작은 유기농 직거래 매장이 최초로 열었다. 30년을 훌쩍 넘은 지금 한살림생협은 조합원 약 75만명에 매출액은 약 5천억원에 이르고 있다. 한살림 생산자 이외에도 전국 곳곳에는 기후위기와 식량위기를 인식하면서 묵묵히 유기농 농사를 고집하는 농민들이 있다.
한마디로 기후위기는 농업과 농민을 다시 세상의 중심으로 끄집어내고 있다. 강력한 농자천하지대본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는 것이다.
식량도 생산하고 햇빛발전도 생산하는 소농이 미래의 엘리트다
물론 '지구호'라는 초대형 산업시대 선박의 승객들 대부분은 서로 물건을 사고파는 일과 파티에만 열중할 뿐 엔진을 돌보는 일과 식량 확보에는 아예 관심조차 없다. 항로를 바꿔야 한다고 조언하는 사람들을 선장과 승무원들, 승객들은 외계인 취급하면서 외면한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타이타닉 산업호의 침몰은 조만간 피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개발과 성장의 자본주의 산업국가 체제는 자연과 인간을 오직 돈벌이의 대상, 약탈의 대상으로만 취급한다는 점에서 반자연, 반생명, 반인간의 체제, 비자연, 비생명, 비인간의 사회다. 사회주의 체제도 마찬가지다. 기업 활동의 자유만 있지 인간관계를 오직 이용과 활용의 상품화된 물건으로 취급한다는 점에서, 인민을 오직 대상으로만 취급한다는 점에서 부자유주의 체제인 점은 동일하다.
한국의 대의정은 민주주의가 아니다. 이른바 잘나고 똑똑한 여의도 정치인, 관료, 언론, 재벌 등 소수 엘리트의 독재 체제다. 이들이 자신이 갖고 있는 권력과 재물을 버리고 멈춰 서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생태전환의 길로 나서길 기대한다는 것은 연목구어다. 사실 이들 소수 엘리트는 기후위기와 생태전환의 관점에서 보면 엘리트가 아니라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고 탐욕과 우매함에 눈이 먼 미친 바보다.
조만간 식량위기가 닥쳤을 때 우리 사회의 정예는 이런 자원약탈의 공장과 사무실이 아니라 대자연 속에서 지역공동체 자원순환의 삶, 공생과 공유의 삶을 즐기는 농부들임을 뼈저리게 실감할 것이다.
그래서 식량도 생산하고 햇빛발전 전기도 생산하는 소농들이야말로 시대를 선도하는 진정한 엘리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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