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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위기 시대, '노아의 방주'는 소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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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위기 시대, '노아의 방주'는 소농이다

[영농형 햇빛발전] ③

울창한 삼나무 숲이었던 이라크 사막

약 7500년 전 수메르인들은 티그리스-유프라테스 강 주면의 울창한 삼나무 숲을 베어내고 농경지를 만들었다. 그리고 베어낸 삼나무를 에너지로 수메르 도시국가와 수메르 문명을 건설했다. 길가메시 서사시는 다름 아닌 숲 파괴의 서사시다. 석탄과 석유 이전에 도시를 건설하고 도자기를 만들고 수레와 배, 농기계를 만든 에너지는 나무와 숲이었다.

그러나 수메르 농경지는 표토가 유실되고 곧바로 염화가 진행되면서 이윽고는 농업 자체가 지속 불가능하게 되어버리고 말았다. 수메르인들은 수메르 도시를 버리고 인근의 다른 숲으로 이동해 도시문명을 다시 건설했다. 우르, 라가시 등등의 도시문명 역사도 차례로 이런 숲 파괴와 자원 약탈로 인한 도시국가 흥망성쇠의 역사이다.(<숲의 서사시> 존 펄린 지음, 송명규 옮김, 따님 펴냄) 그 지역이 다름 아닌 지금의 이라크 사막지역이다.

서구 백인들이 '이스터 섬'이라고 이름 붙인 라파누이 섬 주민들도 울창한 야자나무 숲을 베어내면서 거대한 모아이 석상 문명을 건설했다. 최후의 야자나무가 사라진 이후의 라파누이는 끔찍한 식량위기와 전쟁, 카니발리즘(식인풍습)의 세상이었다.(<이스터 섬의 수수께끼>(폴 반·존 플렌리 지음, 유정화 옮김, 아침이슬 펴냄))

문제는 개발과 성장의 체제 자체다

산업혁명과 함께 철강 수요가 폭발하듯이 늘어나자 철 제련 연료로 영국의 숲이 작살나기 시작했다. 강 주변의 숲이 먼저 파괴되고 나서 내륙 안쪽 깊숙이까지 영국의 숲은 순식간에 거덜 나 버렸다. 그리고 이윽고는 아메리카 신대륙의 숲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이렇게 개발과 성장의 근대 산업사회는 숲 파괴와 땅속에 묻혀 있던 화석연료를 끄집어내 불태운 결과 이룩한 약탈문명이다.

지구 최후의 허파라고 불리는 아마존 숲 또한 위성 사진에서까지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산업농업의 농경지와 목초지를 위해 최후의 한 점 나무까지 급속하게 마구잡이로 불태워지고 있다.

우리는 지금 수메르와 라파누이와 똑같은 숲 파괴와 문명 붕괴의 길로 이미 들어서 있다. 화석연료를 불태운 결과 야기된 지구온난화는 붕괴의 속도를 마하 단위의 최대 속도로 끌어올린 가속기 페달이다.

숲의 시각에서 도시는 인공사막이다. 산업농업의 논과 밭도 예비 사막이다. 맨땅이 벌겋게 드러나는 것은 지구의 속살이 드러나는 상처와도 같다. 우리는 이 사막을 숲과 풀의 도시, 숲과 풀과 곡물의 논밭, 이산화탄소를 흡수하는 풀과 작물의 기후 농업 현장으로 바꿔야 한다. 기후 농법과 숲 가꾸기 기술은 이미 제시되어 있고 지금도 수많은 농부와 임업가들이 공생과 공존의 탄소 흡수 혼농 임업, 임간 축산, 풀 농법 등등 실험과 실천을 계속하고 있는 중이다.

문제는 기술이 아니다. 사람의 생각이 문제다. 주권자인 인민의 생각과 삶이 바뀌지 않으면 개발과 성장 체제 자체의 전환은 불가능하다.

기업인과 정치인, 관료뿐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묻는다. 생태전환이니 기후위기니 유기농이니 다 좋은데 개발과 성장을 해서 수출을 하지 않으면 자원도 부족한 한국이 무엇을 먹고 살 것인가. 그리고는 '생태 근본주의자들'의 경고는 잠꼬대로 치부하고 그냥 가던 길을 간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익숙한 생각을 바꾸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경로의존성이 가장 강한 정치·경제·사회·문화 체제를 바꾼다는 것은 역사가 증명하듯이 수많은 사람이 죽고 죽이는 반란이나 혁명이 아니면 어려운지도 모른다.

처음에는 소수에 지나지 않았던 사람들의 생각도 조금씩 늘어나다 보면 어느 순간 세상을 바꾸게 된다. 간디의 비폭력 저항운동도 그랬고 2016~17년 비폭력 평화의 촛불시위도 그랬다. 이단의 유대교인이었던 예수는 12명의 동조자를 규합해 어느 순간 로마를 그리스도교 국가로 바꾸고 유럽의 중세를 그리스도교 시대로 만들었다. 붇다의 사성제 깨달음을 제일 먼저 받아들인 사람은 5명에 불과했다.

16살의 그레타 툰베리가 시작한 1인 시위는 어느 순간 수백만 청소년들의 '금요파업'으로 확대되었다. 한국 사회의 생태전환도 마찬가지다. 10명의 생태전환 동조자가 150명의 동조자가 되고 한 마을의 생태전환 공동체가 수백수천 마을로 확대될 수 있다.

150명이라는 숫자는 일명 '던바의 수'라고 한다. 진화심리학자 로빈 던바가 사회성 동물인 사람이 친밀한 사회관계를 만들 수 있는 최대의 수는 150명이라고 한 데서 유래한다. 그 150명이 다단계로 단체나 사회, 국가 구성원의 3.5%를 혁명과 전환의 행동으로 이끌어내면 그 단체나 사회, 국가는 바뀐다. 체노웨스의 3.5% 법칙이다.(☞ 관련 기사 : <BBC NEWS 코리아> 2019년 9월 22일 자 '3.5%법칙: 소수는 어떻게 세상을 바꿀 수 있는가') 사실 모든 혁명과 전환은 다단계 조직화의 결과다.

풀잎, 나뭇잎보다 더 효율이 좋은 이산화탄소 흡수 장치는 없다

지구상에서 대규모로 이산화탄소를 흡수하는 곳은 딱 두 군데다. 숲과 바다다. 풀과 나무와 숲은 그 어떤 기계장치도 따라올 수 없는 탄소 흡수 생명체다. 숲을 파괴하는 임야태양광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인지는 조금만 생각해 보면 금방 알 수 있는 일이다.

바다 수온 상승은 인간이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다. 그러나 초원의 사막화와 도시 사막, 논밭의 예비 사막을 숲과 지속가능한 기후농업의 논밭으로 바꾸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며 인간이 살아남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길인지도 모른다.

땅은 속살을 드러내는 순간 죽는다. 거기다 무지막지한 제초제를 뿌리면 흙 1kg에 들어있는 약 300억 마리의 온갖 미생물 생명체는 끝장이다. 맨땅에 제초제를 쏟아부으며 농사짓는 관행농은 그래서 땅을 죽이는 죽임의 농업이다.

5세기 경 한랭 건조 기후가 중앙아시아 초원지대를 덮치자 유목민인 훈족의 대이동이 시작되었다. 이는 연쇄반응을 일으켜 서쪽으로는 게르만족의 대이동을 낳았고 결국 로마제국을 멸망시켰다. 지구 기온 상승으로 인류는 아마도 극소수 생존자들만 북극 지방에 옹기종기 모여 힘겨운 생존투쟁을 벌여 나가야 할지도 모른다는 음울한 전망이 나오고 있다.

과학자들이 지금의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절반 이하로 줄이는 혁명이 일어나야 한다고 경고하는 이유다. 무엇보다도 지금까지 배출한 이산화탄소를 대량으로 흡수하는 풀과 숲의 생명농업, 기후농업으로의 전환이 시급한 까닭이다.

오래된 미래, 4000년의 자급자족 자원순환 유기농 소농사회

20세기 초 미국 농무부의 전 토양관리 국장인 프랭클린 킹은 중국, 한국, 일본을 여행했다. 그는 미개한 동양 3국이 4000년 동안이나 똥을 활용한 자연순환 농법으로 엄청난 인구를 먹여살린 것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책을 썼다.(<4천년의 농부>(프랭클린 히람 킹 지음, 곽민영 옮김, 들녘 펴냄))

당시 미국과 유럽은 심각한 지력 손실로 농업이 위기에 처해 있었다. 워털루 전쟁이 끝나자마자 전장터에 득달까지 달려가 시체를 서로 가져갔던 사람들은 농부들이었다. 사람 시체는 가장 좋은 거름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킹이 미국 농업의 대안이라고 생각했던 자급자족의 자원순환 유기농업을 우리는 스스로 걷어차 버렸다. 그리고는 대신에 기계화, 화학화, 규모화의 지속불가능한 석유의존 농업으로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개발과 성장의 무한경쟁 사회, 탐욕을 극대화하는 한탕주의 떴다방 자원 약탈 경제의 구렁텅이 속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해방과 한국전쟁 뒤 한국을 신식민지처럼 지배하던 미국은 태평양에 버릴 정도의 남아도는 잉여 식량과 에너지를 '원조'라는 이름으로 한국에 제공해 한국의 식량과 에너지를 철저하게 미국에 의존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곧바로 미국은 한국을 미국의 농업 수출 시장으로 변모시켜 버렸다.

미국은 1957년부터 무상 원조를 줄이기 시작했고, 1959년부터는 차관을 강요했다. 1961년 당시 한국 정부 예산의 52%가 미국의 원조였다.

참혹한 식량위기 쓰나미가 순식간에 한국을 덮칠 수 있다

장면 정부 당시 미 국방부 연구소 랜드코포레이션(Land Corporation)의 '경제 저격수' 찰스 울프 박사(Charles Wolf Jr.)가 한국에 와서 경제관료들과 공동 작업 끝에 경제 개발 계획을 작성했다. 이 계획이 다름 아닌 박정희의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이다.

1961년 11월 미국을 방문한 박정희에게 당시 케네디 정부는 한국이 시급히 해야 할 일은 오직 두 가지, 농업의 생산성을 높이는 일과 전력을 안정되게 공급해야 하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비료와 농약, 석유 등 명백한 석유 의존 경제 체제의 강요였다.

오늘날 한국의 식량자급률은 20%대 초반을 오르락내리락한다. 기상이변으로 전 세계 식량 생산이 줄어들자마자 식량 수출국은 항구 봉쇄부터 결정한다. 식량은 안보 문제이다. 자국 국민들의 식량 확보가 우선이기 때문이다.

북한이 구소련 붕괴 직후 홍수와 가뭄으로 식량위기에 내몰리고 수를 알 수 없는 아사자가 발생했을 때 당시 북한의 식량자급률은 70~90% 수준이었다. 식량이란 10%만 부족해도 전 국민의 10%가 굶주려야 하고 그중 상당수는 굶어 죽을 수밖에 없다.

어떤 나라로부터도 식량을 수입할 수 없을 때, 한국은 단순무식하게 계산해도 전 국민 가운데 70%인 3500만 명이 굶주려야 하고 그 가운데 상당수인 수백만의 아사자가 발생할 수 있다. 생각만 해도 모골이 송연한 미래다. 그럼에도 우리는 아무런 준비조차 하지 않고 있는 게 현실이다.

풀과 숲의 기후농업, 농본주의 사회로의 전환은 필연이다.

농업이건 햇빛발전이건 규모의 문제는 핵심 문제이다. 오늘날 규모를 전 지구로 키운 세계화의 초국적 공룡 기업들은 암세포처럼 지구를 뒤덮고 있다. 그리고 조만간 지구 생명체의 영양분을 남김없이 다 먹어치운 다음 생명체의 멸종과 함께 자신도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그러기 전에 우리는 개발과 성장의 공룡들이 득시글거리는 약육강식의 황무지에서 탈출할 필요가 있다. 생존 가능성을 높이는 믿을 수 있는 사회안전망은 시장과 대형 슈퍼가 아니다. 기존의 체제에서 벗어나 친밀한 공생과 공유의 자급자족 지역공동체를 복원하는 것이 가장 확실한 생존 전략이다.

어떤 사업이건 그 규모는 사람의 규모를 넘어서면 그다음부터는 약탈이다. 공장식 축산의 수만 마리 소를 그 지역의 풀로 먹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수천수만 킬로미터(km)를 이동해온 곡물 사료가 매일같이 외부에서 대형 트레일러로 와야만 한다. 당연히 물물교환을 넘어선 외부 자원의 대규모 약탈이다.

질주하는 세계화의 고속 열차를 멈춰 세운 코로나 사태는 열차에서 뛰어내려 지역으로 달려갈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풀과 숲과 공생하는 지역순환 농업, 이웃과 공생하는 지역공동체의 재생, 지역화가 대안이다.

지역순환의 소농이 지역을 살리고 한국을 살릴 것이다. 건강한 유기농 식량도 생산하고 이산화탄소도 흡수하고 햇빛발전도 생산하는 자원순환의 자급자족 기후농업이 소농도 살리고 농업도 살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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