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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민주화의 미카엘, 지학순 주교가 뿌린 씨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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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민주화의 미카엘, 지학순 주교가 뿌린 씨앗

[손호철의 발자국] 23. 강원도 원주 : 민주화 투쟁에 앞장섰던 정의구현사제단과 KNCC

"본인은 양심과 하느님의 정의가 허용치 않음으로 비상군법회의 소환에 불응한다. 유신헌법은 민주 헌정을 파괴하고 국민 의도와 관계없이 폭력과 공갈과 국민투표라는 사기극에 의해 조작된 것이기 때문에 무효이고 진리에 반대된다."

박정희 정권의 살벌한 광기 앞에 모두 숨죽여 있던 유신 초기인 1974년 7월 23일, 천주교 원주교구 교구장인 지학순 주교는 내외신 기자들 앞에서 밤새 작성한 자신의 양심선언을 읽기 시작했다. 북한에서 신학교 재직 중 해방과 함께 공산 정권이 들어서자 어렵게 월남해 신부가 된 지 주교는 70년대 들어 사회운동에 적극 나서기 시작했다.

특히 지 주교는 박정희 정권이 유신을 선포한 뒤에도 계속 유신을 비판해 1974년 7월 6일 해외여행에서 귀국하다가 중앙정보부에 체포됐다. 이에 가톨릭 주교회의가 항의성명을 발표해 석방됐지만 연금된 상태였다. 그는 이에 개의치 않고 다시 유신은 무효라는 비판 성명을 발표한 것이다. 화가 난 박정희는 그를 다시 구속시켰고 징역 15년을 선고했다.

▲ 원동성당에 진열되어 있는 지학순 주교 사진

원주 중심가에 있는 원동성당은 지학순 주교가 생활했던 곳으로, 그 옆에는 가톨릭회관이 자리 잡고 있다. 지 주교가 구속된 지 두 달 뒤인 9월 23일, 이 회관에서 열린 세미나에 참석한 함세웅 등 300여 명의 젊은 사제들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사목헌장에 따라 '현실 세계와 민중의 삶 속으로' 들어가기로 결의하고 모임의 이름을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하 정의구현사제단)'으로 결정했다. 원동성당으로 자리를 옮긴 신부들은 1000여 명의 신도들이 참석한 가운데 미사를 드린 뒤 유신 철폐 시위를 벌였다.

한국 민주화운동에 한 획을 그은 정의구현사제단의 역사는 이렇게 시작됐다. 원동성당 입구에는 악마의 머리를 밟고 악마의 목에 칼을 꽃아 숨통을 끊어 놓으려는 대천사 미카엘의 조각이 자리 잡고 있다. 이를 보고 있자, 이 조각이 군사 독재에 칼을 겨누었던 정의구현사제단을 정확히 형상화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의구현사제단은 출범 이후 끊임없이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해 독재정권, 나아가 반민주적 세력에 대항해 칼을 겨누었다.

▲ 지학순 주교가 1970년대 반유신 등 민주화운동에 앞장섰던 원주 원동성당. 악마의 목에 칼을 겨누고 있는 대천사 미카엘의 조각이 상징적이다. ⓒ손호철
▲ 원동성당 옆에 있는 가톨릭회관. 지학순 주교 구속에 항의해 모인 신부들이 정의구현사제단을 만든 곳이다. ⓒ손호철

특히 사제단은 1970~80년대 '민주화운동의 성지'가 된 명동성당을 중심으로 5‧18 학살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 "탁 하고 책상을 쳤더니 억하고 죽었다." 정부는 1987년 야당과 민주화운동 진영의 직선제 개헌 요구 속에서 터져 나온 서울대생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에 대해 이처럼 어처구니없는 발표를 했다. 사제단은 이 같은 정부의 발표에 대항해 고문치사의 진실을 폭로했고 이를 통해 6월 항쟁이 승리를 거두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1987년 민주화 이후 가톨릭의 '주류'는 전반적으로 보수화되고 정치로부터 거리를 두기 시작했지만, 사제단은 이와 달리 다양한 사회운동을 계속 벌여 나갔다. 2004년 김수환 추기경은 국가보안법 폐지가 시기상조라고 말했지만, 사제단은 이를 비판하며 국가보안법 폐지를 주장했다. 2007년에는 "이제 자본 독재에 맞서 경제민주주의와 경제 정의를 위해 나아가야 한다"며 김용철 씨와 함께 삼성 비자금을 폭로했다. 이후에도 4대강 반대 운동에 나섰다. 최근에는 추미애 법무부장관을 내세운 더불어민주당과 윤석열 검찰총장의 대립과 관련해, 민주당 편을 들어 검찰개혁을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해 진보진영 내에서 논쟁거리가 되기도 했다.

▲ 87년 6월 항쟁과 관련, 민주헌법 제정을 요구하는 정의구현사제단 신부들 ⓒ정의구현사제단 제공

"세계교회협의회(WCC)는 정치적으로 민주주의가 위협을 받을 때 인권과 정의를 위해 많은 지원을 해주었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2004년 청와대에서 가진 WCC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공식 약칭은 NCCK이지만 KNCC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관계자들과의 면담에서 이같이 감사의 말을 전했다. 한국민주화 운동에 있어서, 가톨릭에 정의구제사제단이 있었다면, 기독교에는 KNCC가 있었다.

해방 후 한국 기독교는 북한의 반기독교 정책에 밀려 월남한 서북청년단을 시작으로 반공주의에 기초해 극우 독재 정권을 지지해 왔다. 기독교는 이승만 정권과 결탁해 각종 특혜를 받았고 박정희 정권 하에서는 정교 유착이 더욱 심화됐다.

"우리나라의 군사 혁명이 성공한 이유는 하나님이 혁명을 성공시킨 것." 김준곤 목사는 1968년 처음 열린 대통령 조찬 기도회에서 이처럼 칭송했고, 유신 선포 후 열린 1973년 국가조찬기도회에서도 "10월 유신은 실로 세계정신사적 새 물결을 만들고 성서적 축복을 받을 것"이라고 아부했다.

KNCC는 달랐다. 1948년 설립된 KNCC는 창립과 함께 WCC에 참여했다. KNCC가 본격적으로 민주화운동에 투신한 시점은 박정희 정권이 유신을 선포하고 1974년 민청학련과 인혁당 재건위 사건을 터트리는 등 반인권적 폭력 지배를 노골화한 이후다. 이 같은 폭거를 보면서 KNCC는 인권위원회를 설립하고 이를 중심으로 민주화운동에 적극 나섰다. 1970대 중후반부터 1980년대까지의 민주화운동에는 언제나 KNCC가 있었다.

이제는 사라진 용어지만 1970년대 생겨나 1980년대까지 사용된 용어가 있다. 얼마 전 타계한 백기완 선생이 만든 '재야'라는 용어다. 당시는 민주노총과 같은 민중 단체도, 참여연대와 같은 시민단체도 존재하지 않았고 다만 학생운동과 대학 교수, 문인, 인권변호사 등 참여적인 지식인 등이 김대중, 김영삼을 중심으로 한 야당과 손을 잡고 군부 독재 정권에 대항해 민주화운동을 했다. 이들 '반(독재) 정부' 민주화운동 인사들을 지칭하는 용어가 바로 '재야'였다.

이의 중심에는 KNCC가 있었고, 민주화운동과 재야는 종로 5가에 사무실이 위치한 KNCC를 다른 수식어 없이 '종로 5가' 내지 '5가'로 불렀다. 1970년대 긴급조치 시대에 저항해 목요기도회를 개최했고 동교동의 이희호 여사가 이를 통해 KNCC와 동교동을 연결시켰다. 교단의 대학생 대표들이 한국기독교청년협의회(EYC)를 만들어 민주화운동의 손발로 활약했다. 박형규 목사의 제일교회, 홍근수 목사의 향린교회 등이 그 중심이었다. 박형규 목사는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15년형을 선고받는 등 무려 6차례나 옥고를 치러야 했다. 민주화 이후 그 영향력이 대폭 약화됐지만, 이들의 사회 참여는 계속되어 2016년 탄핵 정국에서 박근혜의 퇴진을 주장하기도 했다.

▲ 박형규 목사 구속에 항의해 양심수 석방 기도회를 여는 KNCC ⓒKNCC 자료 사진
▲ 민주화운동 진영에 '5가'로 통했던 종로 5가의 한국기독교회관 ⓒ손호철

물론 불교 등 다른 종교들도 민주화운동에 기여했다. 하지만 이들은 대개 1980년대 이후 시작됐고 그 강도도 가톨릭, 기독교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했다. 예를 들어, 불교의 경우 '6월 항쟁 불교도반 한마당'에서 장적 스님이 지적했듯이, "1980년대 이후 '중생이 아프면 보살이 아프다'는 유마거사의 가르침에 입각해 반독재 투쟁 민주개헌 투쟁에 왕성하게 활동"하기 시작했다. "반민중적 권력 집단이 자행하는 폭력과 비민주적인 제도는 철폐되어야 한다"는 창립선언을 내걸고 시작된, 최초의 본격적인 불교 주도의 민주화운동 단체인 민중불교운동연합이 창립된 것도 1985년이다.

이처럼 군사독재 시절 가톨릭과 기독교가 일찍부터 민주화운동에 중요한 역할을 한 이유가 무엇 때문인가? 첫째, 이들 종교가 '반공주의'에 기반해 있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따라서 군사독재는 민주주의 세력과 반대 세력에 덧씌우던 전매특허 '빨갱이로 몰아가기'가 불가능하다는 이점이 있었다. 이 이점이 이들 종교가 다른 비종교적 민주화운동에 비해 유리한 점이었다. 하지만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다른 종교들도 기본적으로 반공주의에 기초해 있다는 점에서 가톨릭과 기독교가 유독 민주화운동에 적극적이었던 이유는 아닌 것 같다.

두 번째 이유가 중요하다. 서양에서 생겨난 종교인 가톨릭과 기독교는 국제적으로 영향력이 강한 미국과 유럽에 강한 연고를 갖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불교 같은 '동양 종교'나 천도교, 원불교 등 같은 '토착 종교'들과 달리, 이들을 탄압할 경우 국제적인 압력에 직면해야 했다. 이 같은 '전략적 이점'이 가톨릭과 기독교를 민주화운동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수 있게 만든 것이다.

대학로에서 종로5가 쪽으로 내려오다 보면, 오른쪽으로 붉은 벽돌의 큰 빌딩이 나타난다. 한국 기독교의 위상을 보여주는 듯, 규모가 엄청난 한국교회 100주년 기념관이다. 여기에서 조금 더 내려가면 골목 안에 100주년 기념관과는 비교가 되지 않게 작고 낡은 빌딩이 나타난다. 1970~80년대 민주화운동 진영에서 '종로5가'로 통했던 한국기독교회관이다.

그 앞에 서면, 인권위원회 창립 30주년을 맞이하여 2004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가 빌딩 외벽기둥에 설치한 기념판이 이 건물을 중심으로 일어났던 민주화투쟁의 역사를 증언해 주고 있다. ‘군사독재 억압통치의 시대에도 인권, 민주화, 평화운동이 불길처럼 타올랐다. 여기가 그 중심지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

▲ 한국기독교회관 정면 기둥에는 KNCC의 민주화 투쟁을 기록한 동판이 설치되어 있다. ⓒ손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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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호철

화가를 꿈꾸다 서울대학교 정치학과로 진학했다. 독재에 맞서다 제적, 투옥, 강제 징집을 거쳐 8년 만에 졸업했다. 어렵게 기자가 됐지만, '1980년 광주 학살'에 저항하다 유학을 갔고 서강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로 일하며 진보적 학술 활동과 사회운동을 펼쳐왔다. <국가와 민주주의>, <한국과 한국 정치>, <촛불혁명과 2017년 체제> 등 이론서와 <마추픽추 정상에서 라틴아메리카를 보다>, <레드 로드-대장정 13800KM 중국을 보다> 등 역사 기행서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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