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우리의 반공 교육에서 가장 유명하며, 우리 사회의 반공주의를 가장 웅변적으로 보여주는 문장이다. 영동고속도로 속사 출구에서 내려 북쪽인 오대산 쪽으로 조금 달리면 텅 빈 넓은 주차장이 나타난다. 이승복기념관이다. 기념관으로 들어가면 하늘을 향해 손을 번쩍 든 소년의 커다란 전신상 위에 크게 써놓은 이 같은 글씨가 방문객을 맞는다.
기념관에는 이승복 동상 이외에도 이승복이 공부하던 교실과 학교를 보존해 놓았고 전시실에는 이 군의 유품, 당시의 상황을 그린 그림, 그의 이야기가 실린 초등학교 교과서 등이 진열되어 있다. 1968년 12월 9일 북한의 '무장공비'는 근처에 있는 이승복 집에 나타나 이 군과 어머니, 남동생, 여동생을 살해했고 아버지와 형에게 부상을 입혔다.
이틀 뒤 <조선일보>는 살아남은 형의 증언의 형태로 "공비들이 온 가족들을 모아놓고 공산주의 선전을 하자 '이승복이 나는 공산당이 싫다'고 얘기했고 공비들이 이군의 입을 찢고 가족들을 몰살했다"고 보도했다. '이승복 신화'가 탄생한 것이다.
우리 사회에 아직도 반공주의가 여전히 강력하지만, 과거와 같은 광기는 사라진 만큼 이승복기념관은 넓은 시설과는 대조적으로 관람객은 보이지 않았다. 이승복 이야기는 민주화 이후 반공 교육이 줄어들고 교과서에서도 빠지면서 잊히고 말았다. 잊혀진 이 말이 다시 주목을 받은 것은 1988년 한 언론운동가가 그동안 언론계에 떠돌던 이야기('문제 기사를 쓴 <조선일보>기자가 현장에 없었고 기자가 만든 이야기'라는) 등에 기초해 한 잡지에 조작설을 제기했기 때문이다.
언론 시민단체들은 이승복 기사 오보 전시회를 열었고 이승복 동상을 철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승복 가족과 <조선일보>가 그 언론인과 단체를 명예훼손으로 고발했고 법원은 이들의 손을 들어줬다. 기념관에는 '이승복의 명예회복'이란 제목 하에 이를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나는 이승복이 정말 그 말을 했느냐는 것이 쟁점이 되면서, 정말 중요한 문제가 묻혀 버리고 말았다고 생각한다. <조선일보>와 박정희 정권의 주장대로, 그리고 사법부가 인정한대로, 이 군이 정말로 이 말을 했다면, 이 군이 어떻게 해서 이 말을 하게 됐느냐는 것이다.
만일 문제의 발언을 한 사람이 성인이거나, 성인이 아니더라도 한국전쟁을 통해 공산당을 직접 경험한 미성년자이라면, 이 같은 발언을 한 것이 이해가 된다. 하지만 이 군(1959~1968)은 한국전쟁 종식 뒤에 태어난 만큼, 한국전쟁 등을 통해 공산당을 직접 체험하지 않았다. 또 사망 당시 9살에 불과한 산골의 초등학생이 여러 책 등을 읽고 공산당이 무엇인지 이성적으로 분별할 수 있는 나이가 아니었다. 그런데 어린 아이가 무엇을 알기에, 죽을지 모르는 공포의 순간에도 이 같은 말은 했겠는가?
강남에 사는 부잣집 아들도 아니고 하루 끼니도 연명하기 어려운 강원도 산골 화전민의 아들인 이 군이 말을 잘못했다가는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는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자신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이 말을 하게 만든 것은 바로 반공교육이다. 즉 이승복 사건, 이승복의 공산당 발언이 보여주는 것은, 박정희 정권이 이를 대대적으로 선전하고 교육시키면서 의도했듯이, '공산당은 초등학교 어린이들까지 목숨을 걸고 싫다고 소리칠 정도로 나쁜 놈들'이라는 사실이 아니다.
이승복 사태가 보여주는 것은 공산당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어린아이가 이 소리를 할 정도로 이승만 정권과 박정희 정권이 어린 학생 때부터 반공주의를 주입시켜 왔다는 사실이다. 다른 많은 점이 그러하지만, 최소한 이 점에 관한 한, 우리 체제는 북한과 너무도 닮은꼴이었다. 만일 이승복이 북한에 태어나, 비슷한 상황에 처했다면 뭐라고 했겠는가? 분명히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나는 미제국주의가 싫어요! 나는 남한 파쇼도당이 싫어요!"
결국 반공교육과 이에 따른 반공주의가 이승복으로 하여금 이 같은 발언을 하게 만들었고, 역으로 이승복의 문제의 발언이 최고의 반공교육 교재가 되어 반공주의를 강화하는 순환구조가 만들어진 것이다. 이 사건 후 이승복 이야기는 초등학교 도덕교과서에 실렸고 초등학교마다 그의 동상이 세워졌다.
우리 땅의 동해 북쪽 끝인 고성에서 부산까지 이어지는 7번 국도는 동해를 끼고 달리는 만큼 기가 막힌 풍경을 자랑한다. 이승복기념관에서 강릉을 거쳐 동해대로라고 불리는 이 도로를 타고 울진 죽변항 근처까지 약 150킬로미터를 달려가 나곡4리에서 월천2리 쪽으로 빠져 나가면 버려진 작은 탑이 나온다. '자유수호의 탑'이다. 바로 이곳이 이승복 죽음의 시작인 울진 무장공비 사건의 현장이다.
1960년대 후반은 우리의 경제발전이 아직 본격적으로 성과를 내기 전으로, 일찍이 계획경제에 의한 산업화를 추구했던 북한은 경제력 등으로 우리보다 앞서있다고 평가받던 시기였다. 국제적으로도 베트남에서 북베트남의 공세가 진행되는 등 북한에 유리한 여건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에 북한은 한편으로는 남한에 통일혁명당과 같은 지하당을 건설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모험주의적이고 군사주의적인 노선에서 '무장공비'를 남파하는 등 강력한 대남공세에 나섰다.
1968년 1월 21일 김신조를 비롯한 무장 특수부대 30명이 청와대를 습격했다가 실패했다. 이로부터 9개월이 지난 10월 30일부터 11월 2일 사이에 북한은 15명이 한 조를 이룬 무장공비 8개조 120명을 울진 나곡리해안과 삼척 지역에 침투시켰다. 이들은 강원도 오지 산간지역에 소규모 게릴라 기지를 만드는 것을 목적으로 했는데, 가는 곳마다 사람들을 모아 놓고 위조지폐를 살포하고 공산주의를 선전했지만 별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군경합동작전에 의해 대부분 사살되었다. 그 과정에서 희생당한 군인, 예비군, 그리고 지역주민들을 추모하는 탑이 자유수호의 탑이다.
이들 중 일부가 군경의 추적을 빼돌리고 150킬로미터 이상을 진군해 평창까지 올라왔고, 이승복 사건을 일으킨 것이다. 설사 일부의 주장대로 이승복이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변하지 않는 사실이 있다. 그것은 북한 무장공비가 9살 소년을 죽였다는 사실이다. 이승복 사건의 진정한 의미는 "나는 공산당의 싫어요"라는 발언이나, 그 말의 진위 여부가 아니라 바로 이 사실에 있다.
이승복 사건을 통해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위에서 지적했듯이, 아무것도 모르는 9살 소년으로 하여금 그 같은 말을 하게 만든 반공주의 교육이다. 다른 하나는 1960년대 후반 모험주의적이고 군사주의적인 잘못된 판단에서 남한에 계속해서 무장공비를 내려 보낸 북한은 자신들이 해방시키겠다고 외쳐온 '일하는 기층민중(화전민)'의 9살짜리 어린 아들까지도 죽였다는 사실이다. 물론 마오쩌둥의 말대로, "혁명은 저녁만찬이 아니고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을 전복하는 폭력적 행위"라지만, 이런 모험주의적이고 군사주의적인 통일 전략, 혁명 전략은 문제가 많다.
이 점에서 이승복 사건은 1960년대 말 남북한 체제의 부끄러운 민낯을 모두 보여준 역사적 사건이다. 잊지 말아야 것은 우리도 북한처럼 무장 침투부대를 북한에 보냈다는 점이다. 이 같은 사실이 알려진 것은 실미도 사건 때문이다. 1971년 정체불명의 무장군인들을 태운 버스가 청와대로 향하다가 노량진에서 폭발했다. 영화로도 만들어진 이 사건은 김일성 암살을 위해 인천 앞바다 실미도에서 훈련을 받던 북파부대원들이 열악한 환경과 불투명한 미래에 분노해 청와대로 돌진하다가 자폭한 것이다.
이는 실제 무장부대를 북파한 사건이 아니었고, 정부도 우리 군의 북파가 있었다는 사실을 부정해 왔다. 그러나 북파공작원들의 소송으로 법원이 2002년 이들의 존재를 인정해줬고 이들을 국가유공자로 인정하는 법안까지 제정됐다. 이들의 구체적 실체는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정부자료 등에 따르면 1953년 휴전 이후 1972년 남북공동성명 때까지 북파된 공작원은 7726명에 달하는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이승복기념관을 떠나며, 나는 남북한의 모험주의적이고 군사주의적인 통일 정책 때문에 목숨을 잃은 이승복 가족들, 그리고 이승복과 달리, 이름없이 희생당한 북파공작원들을 위해 추모의 묵념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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