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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난설헌‧허균, 조선 신분제를 넘어선 비운의 남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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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난설헌‧허균, 조선 신분제를 넘어선 비운의 남매

[손호철의 발자국] 20. 강원도 강릉 : 시대를 앞서간 '중세 조선의 근대인' 허난설헌과 허균

'첫째, 여자로 태어난 죄, 둘째, 조선에 태어난 죄, 셋째, 김성립의 아내가 된 죄'. 경기도 광주 초월읍에 있는 안동김씨 종중묘역에 가면 3층 묘역 중 제일 아래층에 일찍이 이처럼 한탄했던 '한국 페미니즘의 선구자' 허난설헌(1563~1589)의 묘가 있다.

허난설헌은 14살에 김성립과 결혼한 뒤 조선에서 여자로 태어나 그의 아내가 된 것을 한탄하며 살다 26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출가외인'이라는 한국식 법도에 의해 시가인 안동김씨 종중묘역에 묻혀야 했다.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고향 강릉에서 500리나 떨어진 낯선 곳이자 별로 사이가 좋지 않았던 시댁 묘역에 묻혔으니, 죽어서도 안식할 자유가 없었던 것이다.

▲ 경기도 광주 안동김씨 종중묘역 하단에 있는 허난설헌의 묘와 시비 ⓒ손호철

강릉의 자랑인 아름다운 경포호를 끼고 초당두부로 유명한 초당동에 들어서면 허남설헌과 허균(1569~1618) 생가의 터와 기념관이 나타난다(이 곳의 이름도 우리의 가부장제를 반영해 '허난설헌 허균 기념관'이 아니라 '허균 허난설헌 기념관'이다). 그 순서야 어찌되건, 조선 시대, 전근대 시대 한반도에서, 이 둘처럼 시대를 앞서간 남매는 없었다. 둘은 명문가에서 태어났고 뛰어난 재주를 가지고 있었지만, 불운한 삶을 살았다.

▲ 허난설헌, 허균 남매가 자란 강릉 초당동에 가면 '허균 하난설헌 기념관'이 있다. ⓒ손호철

여성에게 글을 가르치지 않는 시대에서도 허난설헌은 오빠들 어깨너머로 일찍이 글을 배웠다. 그의 천재성을 아까워한 오빠가 친구이자 당대 최고의 시인이었지만 서자로 출세를 못한 이달에게 부탁해 허난설헌은 시를 배웠다.

불행이 본격화된 것은 어린 나이에 안동김씨 김성립과 결혼하고서부터다. 남편은 허난설헌의 재주에 주눅이 들어 밖으로 나돌며 기생집 등을 전전했고 시어머니는 그를 구박했다. '시름 많은 여인 홀로 밤새 잠 못 이루었으니 / 먼동 뜰 때면 비단 수건에 눈물자국 많으리(愁人獨夜不成寐/曉起鮫綃紅淚多).' 독수공방을 그는 '사시가(四時訶)'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게다가 딸과 아들을 연이어 잃고 말았다. 설상가상으로, 아버지 어머니도 죽고 자신을 아끼던 오빠가 귀양을 가는 등 불행은 계속됐다. 허난설헌은 자식의 죽음 앞에서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자식을 곡한다'는 '곡자(哭子)'를 눈물로 썼다.

'지난해 사랑하는 딸을 잃었고 / 올해에는 사랑하는 아들을 잃었네 / 슬프고 슬픈 광릉땅이여 / (중략) / 백양나무에는 으스스 바람이 불고 / 도깨비불은 소나무 숲에서 번쩍인다 / (중략) / 부질없이 황대 노래를 부르며 / 피눈물로 울다가 목이 메인다(去年喪愛女 / 今年喪愛子 / 哀哀廣陵土 / 肅肅白楊風 / 鬼火明松楸 / 朗吟黃坮詞 / 血泣悲呑聲)'.

초당 기념관 앞뜰 대리석에 써놓은 이 시를 보자, 한 여인의 슬픔에 가슴이 미어졌고, 허난설헌은 왜 이후 도교적인 시를 많이 썼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현실을 피해 도교 세계에 빠지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허난설헌이 중세 조선의 그릇된 현실에 눈을 감지는 않았다. '동쪽집 세도가 불길처럼 거세던 날 / 드높은 다락에선 풍악소리 울렸지만 / 북쪽 이웃들은 가난해서 헐벗으며 / 주린 배를 안고서 오두막에 쓰러졌네 / 그러다 하루아침에 집안이 기울어 / 북쪽 이웃을 부러워하니 / 흥하고 망하는 것이야 바뀌고 또 바뀌어 / 하늘의 이치를 벗어나기가 어려워라'. '감우(感遇)'라는 시에서는 사회현실을 고발했다.

'용모인들 남에게 떨어지리오 / 바느질 길쌈 솜씨 모두 좋은데 / 가난한 집안에서 자라난 탓에 / 중매 할미 모두 나를 몰라준다네 / 추워도 주려도 내색을 않고 / 온종일 창가에서 베만 짠다네 / (중략) / 베틀에는 베가 한 필 짜였는데 / 뉘 집 아씨 시집갈 때 옷감 되려나 / (하략)'. 가난한 여인을 노래함이란 뜻의 '빈녀음(貧女吟)'이다. 재야 역사학자인 이덕일은 이 시를 "노동자가 노동의 결과물로부터 소외된다는 마르크스의 소외론이 나오기 300여 년 전에 시인의 직관으로 간파한 소외론"이라고 극찬했다.

▲ 강릉 기념관 앞에 설치되어 있는 허난설헌 동상 ⓒ손호철
▲ 강릉 기념관 앞에는 허난설헌의 대표시인 '곡자'를 새긴 시석이 설치되어 있다. ⓒ손호철

이처럼 모순된 현실에 분노한 초기 페미니스트이자 이에 시로 맞선 '저항시인'이었던 허난설헌은 26세의 어린 나이에 시름시름 앓다가 자신의 작품들을 소각하고 이 세상을 떠났다. 친정에 있던 시와 그림들도 태워달라고 했지만 이를 아깝게 여긴 허균이 정리해 가지고 있다가 명나라 사신으로 갈 때 명나라 관리들에게 보여주고 비용을 지원받아 명나라에서 출간했다. 이후 숙종 때에는 일본에서도 출간되었으니, 허난설헌은, 이덕일의 지적대로 '조선 여인 최초의 한류'였다.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고 부르지 못하는 신세이니.' 최초의 한글소설인 <홍길동전>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이다. 우리는 이 소설을 허균이 쓴 것으로 배웠고 이 소설 덕분에 누이 허난설헌보다 허균이 대중에게 널리 알려졌다.

▲ 강릉 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는 허균의 영정 ⓒ손호철

허난설헌 못지않게 재주가 많았던 허균은, 뛰어난 재주에도 불구하고 여성이라는 이유로 이를 펼 수 없었던 누나와 달리, 좋은 가문과 재주 덕분에 출세가도를 달렸다. 그는 광해군의 총애를 받아 요즘의 대통령비서실이라고 할 수 있는 승정원의 동부승지, 우승지, 좌승지 등 요직을 두루 거친 뒤 외무부 장관인 정2품 예조판서까지 지냈고 여러 차례 조선을 대표해 사신으로 중국을 다녀왔다. 하지만 중세 조선이 용납할 수 없었던 자유분방한 정신으로 파직과 복직, 유배를 반복해 여섯 번의 파직과 세 번의 유배를 겪었고 결국 능지처참당하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그는 유교의 성리학을 신봉하던 봉건적 조선에서 국가적 차원에서 억압했던 불교, 도교 등에 심취했던, '사상의 자유'와 '종교의 자유'의 선구자였다(일각에서는 그가 청나라에 사신을 왕래하며 천주교도 접했으며, '한국 최초의 천주교도'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광해군의 스승인 유몽인은 허균이 고서를 암기하는 것을 들었는데 "유불도 3가의 책을 시원하게 외워내니 아무도 그를 당할 수 없었다"고 감탄했다. 그는 사명대사, 서산대사 등 고승들과 교류했고 삼척부사 시절 불상 놓고 염불했다고 탄핵되어 쫓겨나며 '문파관작(聞罷官作)'이란 글을 남겼다.

'오랫동안 불경을 읽어온 것은 / 내 마음 달랠 것이 없어서라네 / (중략) / 내 분수 벌써 벼슬과는 멀어졌으니 / 파면장이 왔다고 내 어찌 근심하랴 / 예절의 가르침이 어찌 자유를 얽매리오 / 인생의 부침을 다만 천명에 맡길 뿐 / 그대는 모름지기 그대 법도를 지키게나 / 나는 내 나름대로 내 인생을 이루겠네.'

그는 일찍이 서얼, 서자들과 가깝게 지냈고 이와 관련된 역모죄로 능지처참을 당했다. 서얼제라는 신분제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는 <홍길동전>을 허균이 썼다는 기존의 학설은 여러 정황을 볼 때 잘못된 것이라는 주장이 최근 들어 설득력을 얻고 있다. 그러나 <홍길동전>이 아니더라도 서얼 제도 비판 등 중세 조선의 질서를 비판했던 허균의 자유로운 정신, '근대정신'을 찾아볼 수 있는 문헌들은 많다.

'서얼 출신이라고 인재를 버려두고, 어머니가 개가했다 해서 그 자식의 재능을 쓰지 않는 제도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 하늘이 낳았는데 사람이 그를 버리니, 이것은 하늘을 거역하는 것이다.' '인재가 버려지고 있다'는 뜻의 <유재론(遺才論)>에서 허균이 편 주장이다.

백성들은 아무 권리 의식 없이 사는 항민(恒民), 수탈당하며 원망만 하는 원민(怨民)이 아니라 잘못한 세상을 바로잡을 기회를 노리고 있는 호민(豪民)이 되어야 한다는 <호민론>도 주목할 만하다. '천하에 가장 두려워할 바는 백성뿐이다. 특히 호민은 딴 마음을 품고 자기 욕심을 실현하려는 자로 몹시 두려워해야 한다. 지금 백성의 원망은 고려 말보다 훨씬 심하다.'

조선의 기본 틀인 유교와 신분제를 뛰어 넘었던 그의 자유분방한 생각과 행동은 정적들로 하여금 그를 '천지간의 괴물'이라느니 '올빼미 같고 개돼지 같은 인물'이니 하는 비판을 하게 만들었고, 그를 사형시킨 광해군이 인조반정으로 쫓겨난 뒤에도 그는 복권되지 못했다. 정조와 고종 때도 복권이 논의됐지만 노론의 반대로 그는 대한민국이 생길 때까지 끝까지 복권되지 못했던, 조선시대의 '이단아 중의 이단아'였다.

▲ 홍길동이 장성 사람이라는 일부 기록에 기초해 전남 장성이 만들어 놓은 홍길동테마공원 ⓒ손호철

허균 허난설헌 기념관에서 북쪽으로 10여분 달려가면 강릉시 사천전리에 나지막한 언덕 이 나타난다. 이무기가 엎드려 있는 모습이라고 해서 교산(蛟山)이라고 부르는 언덕이다. 허균의 외갓집이자 허균이 태어난 곳으로, 허균은 이 산 이름을 자신의 호로 삼았다. 이 언덕에서 한참 건설 중인 빌라를 지나 숲속을 한참을 헤매다보면 버려진 낡은 시비가 나타난다. '사람들은 너무 누추해 살 수 없는 곳이라고 하지만, 나에게는 신선의 세계라네'로 끝나는 허균의 시를 써 놓은 '교산시비'다.

시비 앞에 서자, 서얼이 차별받던 시대에 서얼과 어울리며 이들이 차별받지 않는 사회를 꿈꾸었던 허균은 '시대의 서얼'이라고 평한 한 평론가의 평이 생각났다. 맞다. 허균과 허난설헌은 중세 조선이라는 시대를 앞서간 '시대의 서얼'인 '근대인'이었다(그것이 이들이 '중세인'임에도 불구하고 한국 근현대사 기행에 이들을 다루는 이유다.).

▲ 강릉 교외의 교산이란 언덕에 버려져 있는 교산시비는 허균의 파란만장한 삶을 중언해주고 있다. ⓒ손호철

허난설헌과 허균은 실학의 대가인 다산 정약용, 그리고 신분제를 타파한 프랑스혁명, 이 혁명에서 획득한 시민권을 여성에게도 똑같이 적용해줄 것을 요구한 콩도르세의 '여성의 시민권을 위한 청원'과 같은 초기 페미니즘 운동보다 200년 앞선 16세기에 살았으면서도, 다산도 갖지 못 했던, 신분제와 가부장제에 대해 선각적인 비판의식을 갖고 있었던 '근대인'이었다.

▲ 강릉 기념관에는 그동안 허균이 쓴 것으로 알려져온 최초의 한글소설 '홍길동전'이 진열되어 있다. ⓒ손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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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호철

화가를 꿈꾸다 서울대학교 정치학과로 진학했다. 독재에 맞서다 제적, 투옥, 강제 징집을 거쳐 8년 만에 졸업했다. 어렵게 기자가 됐지만, '1980년 광주 학살'에 저항하다 유학을 갔고 서강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로 일하며 진보적 학술 활동과 사회운동을 펼쳐왔다. <국가와 민주주의>, <한국과 한국 정치>, <촛불혁명과 2017년 체제> 등 이론서와 <마추픽추 정상에서 라틴아메리카를 보다>, <레드 로드-대장정 13800KM 중국을 보다> 등 역사 기행서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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