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이 빵 어디서 났어?"
"학교에서 집이 가난하다고 줬는데요."
"이 새끼 거짓말 할래!"
부산 사상구 개금역에서 부산보훈병원으로 올라가는 언덕길인 백양대로의 오른쪽 언덕에는 아파트단지들이 이어져있다. 그 아파트 앞에 서자 한 뉴스에 보도된 최승우 씨의 슬픈 사연이 생각났다.
전두환이 광주의 피의 학살을 통해 권력을 잡은 정권 초기인 1982년, 13살로 중학교에 다니던 그는 경찰에 의해 이렇게 형제복지원에 잡혀갔다. 정신병동에 감금된 그와 어린 학생 등에게 소대장이라는 사람이 발가벗으라고 하고 찬물을 끼어 얹은 뒤 침상에 자라고 했다. 그날 밤부터 그에게 성폭행을 당해야 했다고 한다.
"왜 우리를 가두느냐"고 항의를 하는 사람이 있으면 담요로 싸서 폭행을 했고 그들은 어디론가 사라졌다고 한다. 죽여서 암매장한 것이다. 이렇게 납치되어 잡혀온 사람이 4300여 명, 암매장되어 사라진 사람이 최소한 513명이라고 하니, 생지옥 그 자체였다.
"아시안게임, 올림픽 등이 있는데 부랑자들이 거리에 보이지 않게 격리수용하라." 비극적인 형제복지원 사건은 전두환의 노숙자 등 '부랑아' 정화 지시와 함께 생겨났다. 전두환 정권은 부랑자를 수용하는 경찰에게 실적을 인정해주고 부랑자 수용에 일정한 국고를 지원했다.
사상구의 국유지를 헐값에 불하받아 형제복지원을 개설한 박인근은 일선 경찰의 도움을 받아 '부랑자', '노숙자' 뿐만이 아니라 역이나 길거리에서 주민등록증이 없는 사람이나 기차역에서 TV를 보고 있는 무고한 시민 등이 발견되면 무작위로 납치했다. 형제복지원에 갇힌 사람들을 조사한 결과, 70%가 가정이 있는 일반인이었고, 해운대에 놀러온 서울대생과 일본인도 있었다고 한다.
이처럼 멀쩡한 사람도 잡아간 이유는 인원 수 만큼 국가 보조금이 나오기 때문이었으며, 박인근은 이런 식으로 매년 20억 원 씩 12년 동안 국가 보조금을 받아 착복했다. 뿐만 아니라 이들에게 하루 10시간 이상씩 강제노역을 시켰으며, 저항하면 굶기거나 폭행했다. 남녀를 가리지 않고 성폭행을 일상적으로 자행했고, 500여 명 이상이 사망에 이르는 인권유린이 자행되었다.
하다못해, 납치된 아들과 딸을 구하러 온 아버지까지 강제수용했으며, 구타해 죽은 시신 중 일부는 300~500만 원에 의과대학에 실습용으로 판매하기도 했다니, 인간의 탈을 쓴 짐승 그 자체였다. 원래 계획은 부랑자를 수용해 1년 간 교육시켜 내보내는 것이지만 부산시의 조사결과 평균 1107일, 일부는 5년이나 갇혀있었다.
1987년 한 원생이 구타로 인해 죽는 것을 목격한 후, 원생 25명이 목숨을 걸고 탈출해 울산경찰서를 찾아가 도움을 요청하였으나, 오히려 경찰은 이들을 체포하려 했다. 원생들이 한 방송국을 찾아가 제보함으로써 사건은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하지만 박인근은 관련 기관들의 비호 속에 징역 3년이라는 솜방망이 처벌을 받고 나와 호의호식하다가 죽었다. 자식들은 이렇게 착복한 1000억 원대 재산을 물려받아 잘 살고 있다. 피해자들과 부산 지역 사회단체의 끈질긴 요구로, 문재인 정부 들어 이에 대한 재조사가 진행 되고 있다.
'부랑자' 등을 '보호'한다는 이름아래 생각할 수도 없는 인권 침해가 자행된 형제복지원 자리에는 이제 아파트단지가 들어섰다. 여러 단지로 나누어진 이 지역을 여러 번 돌아보아도 옛 흔적은 전혀 찾을 수 없었다. 이들이 암매장한 증거들도, 처참한 인권 침해의 흔적도, 아파트 건물 아래로 묻혀버린 것이다. 그러나 수용자들의 가슴속에 남은 씻을 수 없는 상처와 우리의 인권사에 기록된 부끄러운 역사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은 채 남아있다.
소위 '부랑아'들에 대한 이 같은 인권침해는 형제복지원이 처음은 아니었다. 그 원형을 찾으려면, 우리는 이제는 모월리 3구라고 불리는 충남 서산의 바닷가로 향해야 한다. 형제복지원의 참사가 벌어지기 14년 전인 1961년 이곳에서 비극이 시작됐다.
5‧16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박정희 정권은 사회 정화와 국토건설이라는 이름아래 조직폭력배, 병역기피자 등을 잡아 전두환 정권의 삼청교육대의 원형이 되는 국토건설단이라는 강제노동수용소를 만들어 제주도의 5‧16도로 건설 등에 투입했다('손호철의 발자국' 4. '제주 5‧16도로' <한국일보> 2020년 9월 1일자). 이와 함께 만들어진 것이 대한청소년개척단, 일명 '서산개척단'이다(이 이야기는 2018년 <서산개척단>이라는 다큐멘터리 영화로 만들어졌다).
박정희 정권은 을지로에서 자동차 정비업을 하는 민정식이라는 사람에게 위임해 부랑자 청년과 윤락녀 등을 모아 개척단을 만들고 서산의 뻘밭을 개간하도록 했다. 모월리 3구에 가면 이들이 개간한 넓은 논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역시 실적을 만들기 위해, 길 잃은 어린이들이나 통행금지를 위반한 소시민까지 잡아갔다.
이렇게 잡혀온 사람이 한 때 1700명에 달했고, 그 중 25%가 15세 미만의 유소년이었다고 한다. 이들은 부실한 식사 등 열악한 환경 속에서 아산에서 채굴한 돌을 날라 바다를 메워 방조제를 만드는 강제노동에 시달렸다. 목표량을 못 채우면 자행된 폭행으로 죽은 사람도 허다했다. 결혼식도 강제로 했다. 운동장에 남성 수용자들을 세워놓고 여성들에게 고르라고 한 뒤, 125쌍의 합동결혼식을 거행하고 이를 <대한뉴스>에 내보내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이렇게 개간한 땅이 무려 250만 평방미터다. 이들은 이 지역에 정착했는데 정부는 "개척을 하면 너희 땅이 될 것"이라는 약속을 깨고 경작권만을 인정한 채 소유는 국가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소송을 제기해 오랜 싸움 끝에 장기분할로 상환하라는 결정을 받았다. 자기들이 피땀으로 일군 땅을 아직도 1년에 300만 원씩을 내고 갚아야 하는 것이다. 생존자들은 진상규명추진위원회를 만들어 진상규명과 특별법제정, 보상 등을 요구하고 있다.
국토건설단이 대한민국의 '굴락(Gulag, 소련의 강제노동수용소)'이었다면, 형제복지원은 국가가 위탁한 '사설 굴락', 서산개척단은 '반(半)관 반(半)사영 굴락'이었다. 1215년 영국에서 선포한 마그나카르타 이후 근대 인권의 핵심에는 신체의 자유가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우리나라에는 1980년대에도 신체의 자유 없이 재수 없으면 강제노동수용소에 끌려가야 했다.
자본주의의 특징, 장점 중 하나는 '굶어죽을 수 있는 자유'다. 즉 굶어죽을 각오를 하면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 노예제와 달리 강제로 일을 시키지는 않는다. 하지만 유신 시절에는 '생계능력이 있으면서 무위도식하는 것'도 경범죄로 처벌을 받았다. '무위도식할 수 있는 자유'도 박탈한 것이다.
끝없이 펼쳐진 서산 모월리 3구의 논에서 자라고 있는 벼를 바라보고 있자, 저 벼들이 강제로 끌려와 이곳에서 강제노역에 시달렸던 서산개척단원들의 피와 눈물이 응고한 결정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일정한 직업이 없어 거리를 떠돌거나 차를 놓쳐 통행금지를 어기면, 그것도 아니고 단순히 운이 나쁘면, 서산개척단이나 형제복지원 같은 강제노동수용소에 끌려가 사람 이하의 삶을 살아야했던 것이 부끄러운 우리의 역사였다.
<후기>
문재인 정부 들어 검찰은 검찰과거사위원회의 재조사 권고에 따라 박인근 형제복지원 원장의 특수감금혐의에 대한 법원의 무죄판결을 파기해달라는 비상상고를 했지만, 대법원은 2021년 3월 이 사건으로 "헌법 최고의 가치인 인간의 존엄성이 훼손됐다"면서도 비상상고를 기각했다. 형제복지원 피해자들은 2020년 연말 출범한 제 2기 진화위(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의 조사에 마지막 기대를 걸고 있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