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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미 운동의 기원을 찾아서

[손호철의 발자국] 14. 부산 미문화원 : 한국의 반미운동과 자주파는 이곳에서 시작됐다

"교수님 같은 진보 학자들의 노력으로 한국에서도 진보 운동이 부활했는데…"

"진보 지식인들을 그리 과대평가 해주시다니요. 한국전쟁 후 진보 운동이 사라진 뒤 수 십 년간 진보 지식인들과 운동가들이 평생을 걸고 노력해도 못 이룬 진보 운동을 부활시킨 사람은 따로 있습니다."

"그게 누구지요?"

"전두환이지요."

"전두환이요?"

"네."

"아니 전두환이 왜?"

"그가 1980년 광주학살을 통해 불가능할 것 같은 진보 운동을 단칼에 복원시켜주지 않았습니까? 반미의 불모지에서 반미 운동이 살아나고요. 사실 전두환이 진보를 부활시키기 위해 군에 위장 취업했던 북한의 프락치가 아닌가 하는 엉뚱한 생각을 가끔 합니다. 그게 아니더라도 광주학살을 통해 반미 운동 등 진보 운동을 부활시켜 적을 이롭게 했으니 전두환에게 적용해야하는 진짜 죄명은 국가보안법 위반이지요."

부산의 중심가인 광복동 뒤쪽에 있는 부산근대역사관 앞에 서자 떠오른 것은 김영삼 정부가 12.12 군사쿠데타 등과 관련해 전두환을 감옥에 보냈던 1990년대 중반에 한 언론과 가졌던 이 인터뷰였다. 그렇다. 역사는 행위자의 주관적 의도와 전혀 다른, 예기치 못한 결과를 가져오는 경우가 종종 있다. 전두환의 1980년 5‧18 광주학살이 대표적인 예이다.

이 학살은 우리에게 "국가란, 미국이란 무엇인가?"를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고, 그 결과 반미의 무풍지대에 거센 반미 운동을 불러일으켰다. 그 기폭제가 된 것은 1982년 2월에 있었던 부산미문화원 방화 사건이다. 부산근대역사관은 1999년 미문화원을 미국으로부터 반환받아 만든 것으로, 부산미문화원 방화의 현장인 이곳에 서자 문제의 인터뷰가 생각난 것이다.

▲ 대학생들이 방화했던 부산미문화원은 이제 부산근대역사관으로 변해, 부산의 역사를 증언해주고 있다. ⓒ손호철
▲ 역사관에는 부산의 근현대사가 잘 요약돼 있다. ⓒ손호철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한국전쟁 이후 사라진 반미 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곳은 광주였다. 첫 방화 사건은 부산미문화원이 아니라 광주미문화원이었다. 부산미문화원 사건이 일어나기보다 1년 3개월 전, 즉 광주항쟁이 처참하게 진압된 지 반년이 지난 1980년 12월 9일, 전남 농민 운동가들과 대학생들이 광주미문화원 직원들이 퇴근한 뒤 지붕에 구멍을 뚫고 휘발유를 부어 불을 질렀다.

광주항쟁 당시 부산 앞바다에 미국항공모함이 와있다는 보도를 보고 군의 작전지휘권을 가진 미국이 군의 만행을 제어해 줄 것을 기대했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항쟁 지도부인 윤상원 대변인이 전화로 글라이스틴 주한미국대사에게 군부와의 협상 중재를 요청했지만 이조차 거절당하고 진압 작전에 의해 처참하게 사살 당하자, 분노한 생존자들이 반미 운동에 나선 것이다. 여론을 우려한 전두환 정권은 이를 단순 누전사고로 발표했다. 방화자들이 밝혀진 뒤에도 '부랑아들의 영웅심리'로 치부하고 쉬쉬했다.

15개월 뒤, 젊은 신학대 대학생이 부산미문화원 앞에서 통을 들고 택시에서 내렸다. 통을 전해 받은 두 여대생은 문화원 안에 미리 들어가 있던 다른 여대생들과 문을 깨고 실내에 잠입, 통에 있던 휘발유를 바닥에 뿌렸다. 밖으로 나온 이들은 준비한 방화봉에 불을 붙여 건물 안으로 던졌다. '펑' 소리와 함께 문화원은 불타기 시작했다. 이들에게 휘발유통을 전해준 총지휘관 문부식은 건너편 2층 창가에서 이를 촬영했다.

"광주 시민을 학살한 전두환 파쇼정권을 타도하자!" "미국은 더 이상 남조선을 속국으로 만들지 말고 이 땅에서 물러가라!" 가까운 국도극장과 유나백화점에서는 다른 대학생들이 창밖으로 구호가 적힌 유인물을 살포했다. 기이하게도, 구호 중에는 "전두환은 이미 북침 준비를 완료하고 다시 동족상잔을 준비하고 있다"는 엉뚱한 것도 들어있었다.

이 사건은 국민들, 나아가 미국과 세계를 충격에 빠트렸다. 특히 문화원에서 공부하고 있던 한 학생이 죽고 여러 명이 화상을 입자 여론은 비판적이었다. 수배령이 떨어진 문부식 등은 원주 최기식 신부를 찾아갔고 그의 주선 하에 자수했다. 최 신부는 이들을 의식화시킨 김현장을 숨겨준 죄로 구속됐고, 방화 사건은 전두환 정권과 가톨릭의 대립으로 발전했다. 결국 김현장, 문부식은 사형선고를 받은 뒤 감형을 받았고 민주화가 되자 1988년 출소했다.

▲ 대학생들이 방화해 불타고 있는 부산미문화원 사진. 민주인권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 방화 사건의 배후인 김현장을 숨겨준 혐의로 최기식 신부가 구속되는 사진이 역사관에 진열되어 있다.

방화라는 극단적 수단을 사용한 것과 그로 인해 무고한 희생자들이 생긴 것은 소영웅주의라는 비판을 받을 만하다. 하지만 이 사건은 불평등한 한미 관계, 그리고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다수 국민들이 어찌되건 극우 정권을 지원해온 미국에 대해 근본적으로 생각하게 한 역사적인 기여를 했다.

나아가 미국과 세계가 한국을 다시 생각하게 만들어줬다. 김현장은 2012년, 사건 30주년 인터뷰에서 담당검사가 "신미양요 이후 미국 코를 납작하게 해준 유일무이한 사건"이라고 높이 평가해 줬고, 석방 후 만난 해외공관 무관은 "이 사건 이후 제3세계 관계자들이 자신을 처음으로 사람 대접을 해주더라"며 고마워했다고 말했다.

사건의 여파는 엄청났다. 강원대 성조기 소각 사건(1982년), 광주미문화원 2차 방화(1982년), 대구미문화원 폭발 사건(1983년), 부산미문화원 투석 사건(1985년), 서울미문화원 집단 점거(1985년), 부산미문화원 집단 점거(1986년) 등 반미 투쟁이 이어졌다. 1986년에는 서울대생 김세진, 이재호가 신림동에서 대학생들의 전방입소훈련 시위 중 "양키 용병교육 전방입소 결사 반대"를 외치고 분신해 사망했다.

▲ 서울대학교 인문대 앞에는 1986년 '양키 용병교육 전방 입소를 거부한다'며 시위 도중 분신한 김세진, 이재호 열사의 추모비가 세워져 있다. ⓒ손호철

전대협(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과 한총련(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 등 학생운동, 나아가 오래 동안 민중 운동의 최대 정파로 활동해온 반미통일운동 중심의 자주파 내지 민족해방주의파(NL)가 이 방화 사건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나아가 그 중 일부는 북한을 추종하는 반미주체사상파(주사파)로까지 발전하게 된다. 불평등한 한미 관계와 미국의 잘못된 대한 정책에 대한 정당한 문제제기가 이후 지나치게 모든 문제를 외세의 탓으로 돌리고 북한을 미화하는 극단적인 방향으로 흘러간 것이다.

▲ 서울미문화원을 점거하고 주한미국대사와의 면담을 요구하는 대학생들. 민주인권기념관 전시물

풍문과 추측에 의존하던 광주에서의 미국의 역할에 대한 구체적인 증거들이 나타난 것은 1996년이다. 미국의 탐사전문기자 팀 셔록(Tim Shorrock)이 정보자유법을 통해 4천 페이지에 달하는 5‧18 관련 미국 정부의 문서들을 받아서 공개한 것이다. 여기에는 당시 글라이스틴주한미국대사 5‧18 직후 미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한국인은 들쥐 같아서 누가 지도자가 되건 따라갈 것이다. 한국인에게 민주주의는 적합하지 않다"는 망언을 한 인종주의자 존 위컴 한미연합군사령관 등 극소수 비밀 팀과 만든 '체로키 파일' 등이 포함되어 있다.

"12.12 쿠데타는 한미군사협정 위반이지만 미국은 이를 묵인했다. 1980년 봄 학생들의 시위가 거세지자 국무장관은 글라이스틴에게 미국이 진압을 위한 군사 작전에 반대하지 않는다는 것을 군부에 전달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신군부가 5월 18일 계엄령을 선포하자 놀랐고 이후 전개에 당황했다. 백악관은 분단위로 광주 상황 보고받았는데 신군부의 왜곡된 정보에 의존해 통제 불가능한 폭동 내지 혁명이라고 인식했다. 카터 대통령은 광주를 '공산주의자들의 폭동'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결정적인 것은 21일 군의 대학살이 있은 뒤 열린 22일 백악관 회의이다. 여기에서 미국은 군의 학살을 알면서도 광주 점령 군사작전을 승인했다. 민주화보다 진압이 더 중요하다는 것으로, 이는 한국전쟁 이후 미국의 최대 실책이었고 미국은 광주에 사과해야 한다."

미국은 그동안 공수부대의 이동을 몰랐다는 등 책임이 없다고 밝혀 왔지만, 셔록은 그 허구성을 폭로했다.

세월이 흐르며, 김현장은 호남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1997년 대선에서 김대중이 아니라 자신의 대법원 재판의 판사였던 이회창을 지지했고, 2012년 대선에서는 박근혜를 지지했다. 문부식은 방화로 학생이 목숨을 잃은 것, 동의대 사태 때 진압 경찰이 숨진 것 등과 관련해 '우리 속의 폭력', '우리 속의 파시즘'이라는 문제를 놓고 운동의 자기성찰을 촉구했다. 하지만 이와 관련한 보수언론과의 인터뷰로 운동권으로부터 비판을 받아야 했다.

물론 이 같은 성찰은 필요하지만, 운동권의 폭력은 극히 예외적 현상이며 한국전쟁 이후 우리 운동의 주된 특징이 다른 나라들과 달리 테러가 아니라 분신, 투신과 같이 자기 자신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자기 폭력'이었다는 점을 보지 못한 일면적 관찰이다. 다만 최근 나타나고 있는 민주화운동 진영의 일련의 일탈을 보면, 민주화운동 세력의 자기성찰이라는 그의 문제의식은 그 어느 때보다도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부산근대역사관은 부산에 역사에 대해 잘 정리되어 있는 좋은 지역 역사관이다. 특히 주목할 것은 '근현대 한미 관계'에 대한 전시이다. 개화기인 '19세기 한미 관계'로부터 '미군정', '한국전쟁과 미국의 원조', '미문화원 방화 사건과 반환 운동'을 간단히 시기별로 설명하고 있고 미군정 관련 서적도 진열되어 있다.

▲ 역사관에는 미문화원방화 사건과 이후 문화원 반환 과정을 설명해 놓았다. ⓒ손호철

기이한 것은 미문화원 방화사건에 대한 설명이다. 방화에 대해 "당시 일방적인 의존의 대상이었던 미국에 대한 반감 표시"라고 쓰여 있을 뿐, 정작 기폭제였던 5‧18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다.

미문화원의 역사도 방화 사건과 1995년 시민단체의 미군부대 반환 운동, 1996년 문화원 폐쇄, 1999년 반환을 잘 설명해주고 있다. 충격적인 것은 이곳이 해방 후 미군이 주둔했던 미군정 사무실이었다는 사실이다. 미군정 사무실에서 미문화원으로 변신하고 반미 운동으로 불탔다가 시민들의 반환 운동 덕으로 미국으로부터 반환받아 부산근대역사관이 된 이 건물의 역사는, 복잡했던 한미관계를 웅변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군사파쇼 정권을 지탱시켜주는 가장 큰 힘은, 정치적 기반도, 경제력도, 경찰력도, 군사력도 아니며, 바로 비정상적이고 불평등한 한미 관계라고 생각합니다." 문부식이 38년 전 재판부에 쓴 탄원서의 일부다.

부산근대역사관을 떠나며 물었다. 민주화가 됐으니 이제 군사파쇼 정권은 아니지만, 박근혜 정부, 그리고 문재인 정부를 지탱시켜주는 가장 큰 힘은, 문부식이 생각했듯이, 불평등한 한미 관계인가? 그리고 문부식이 생각했듯이, 그리고 이후 자주파들이 생각했고 일부는 지금도 생각하고 있듯이, 아직도 우리 사회의 여러 문제들의 근원이 불평등한 한미 관계인가?

▲ 한국전쟁 포스터가 걸려있는 미대사관. 미문화원방화 사건은 미국이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묻고 있다. ⓒ손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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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호철

화가를 꿈꾸다 서울대학교 정치학과로 진학했다. 독재에 맞서다 제적, 투옥, 강제 징집을 거쳐 8년 만에 졸업했다. 어렵게 기자가 됐지만, '1980년 광주 학살'에 저항하다 유학을 갔고 서강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로 일하며 진보적 학술 활동과 사회운동을 펼쳐왔다. <국가와 민주주의>, <한국과 한국 정치>, <촛불혁명과 2017년 체제> 등 이론서와 <마추픽추 정상에서 라틴아메리카를 보다>, <레드 로드-대장정 13800KM 중국을 보다> 등 역사 기행서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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