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정부의 부처별 성적을 매기자면 꼴지는 국토부가 아닐까 생각된다. 대실패로 드러나고 있는 부동산 정책은 서민들과 청년들의 입에서 "이게 나라냐?"는 절망의 한숨만 나오게 하고 있다. 부동산 블랙홀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동안 국토부가 관장하는 다른 분야의 정책들은 개혁의 ㄱ자도 꺼내 보지 못하고 좌초하고 있다. 철도가 그렇다. 지난 수 십 년을 풍미한 철도 정책은 신자유주의적 시장 맹신 정책이었다. 사양산업으로 전락한 철도에서 국가의 역할을 종결짓고 탈출하거나 축소하는 것이 정부의 기본 설계 도면이었다. 그러나 기후 위기 시대 철도는 새로운 가능성을 가진 교통수단으로 주목받았고 르네상스라고 불릴 정도로 그 위상이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이 급격한 가치 전환의 시대에 낡은 정책을 대물림받은 가보로 숭배하고 있는 관료, 혹은 관료주의는 오늘도 철도 발전의 발목을 잡고 있다.
한국철도의 발목에 쇠사슬을 묶은 상징적 정책은 수서발 고속철도, 즉 SR의 출범이었다. 이명박근혜 정부의 오랜 숙원 사업이었고 철도 민영화와 경쟁체제를 이상향으로 설정했던 국토부 철도 관료들의 바램이 실현되었다. 수서고속철도 분리 문제로 사회적 갈등이 컸던 2013년, 나는 여러 차례의 언론 기고와 <철도의 눈물>이란 책을 통해 수서 고속철도 분리가 한국철도의 네트워크를 어떻게 훼손하는지 말했다. 그중에서도 고속선만 운행하는 SR이 포항, 창원, 전주, 여수 등의 도시를 외면하면서 결국은 지역 차별 문제에 직면하고 말 것이라고 예견했다.
네트워크 산업은 망 자체의 유기적 호환성이 그 건강함을 유지 시킬 수 있다. 코레일이 운영하는 고속열차는 고속선 뿐만 아니라 고속선과 연계된 일반선을 직결 운행해 고속 전용선이 없는 포항, 창원, 진주, 전주, 여수, 순천 지역에도 고속철도의 혜택을 제공하고 있다. 그런데 이 같은 혜택은 서울역과 용산역이 기종착역인 코레일에게만 해당되는 일이 되어버렸다.
국토부가 철도산업을 발전시키겠다며 분리시킨 SR의 등장은 포항이나 여수에서 수서까지 직통으로 갈 수 없는 시스템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SR분리 강행 때, 국토부가 주장하는 국민편익 우선이란 방침은 고려되지 않았다. 결국 곪고 곪은 문제가 터져버렸다. 지역사회의 압력은 국토부에 대안을 요구했다. 국토부는 이제라도 합리적 판단과 시민편익을 위한 조치에 나서야 했는데 어떻게든 분리체제를 공고히 하는 방안으로 지역사회에 응답했다. 대통령 임기 말 관료들의 놀이터가 된 정책 현실은 황당하기만 하다.
국토부는 지역사회의 의견을 수렴해 SR이 운행되지 않는 전라선에 수서발 고속열차를 운행하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수서 직통 고속열차 운행은 전라선뿐만 아니라 포항, 진주, 창원에서도 필요하다. 지역을 갈라 특정 노선에만 혜택을 주는 것은 통합의 인프라인 철도를 분열의 매개로 악용하는 가장 대표적인 사례로 남을 것이다. 국토부가 경상지역을 빼고 전라선에 우선 열차를 투입하려고 하는 이유는 수서발 지역선 운행사를 SR로만 고집하기 때문이다. 현재 SR의 차량 여유는 고작 10량 1편성이고 하반기에 가서나 한 편성을 더 늘릴 수 있다. 전라선에 상징적으로 수서발 고속열차를 운행하는 것으로 생색내기에 불과하다.
철도는 네트워크를 구성하는 선로라는 물리적 망이 전제된 시스템이다. 네트워크를 총괄하는 흐름이 전체 망을 주도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고 바람직하다. 인체 혈관의 특정 부분을 인위적으로 막는다면 막힌 부분만이 아니라 몸 전체가 제 기능을 못하는 것은 자연의 이치이다.
한국철도망을 일관되게 관리하고 운영하는 기관은 코레일이다. 역사와 운행노선, 차량 보유량에서도 SR에 비해 압도적이다. SR의 차량정비와 유지보수, 객실 서비스까지 코레일이 맡아하는 실정이다. 수서발 전라선 직통열차 문제 해결책은 단순하고 명확하다. 고속철도 차량 운영에 여유가 있는 KTX가 수서와 지역을 연결하면 된다. 전라선뿐만 아니라 포항과 경전선 구간까지 연결할 수 있다. 진정한 국민편익이 실현되는 것이다.
안전측면에서도 훨씬 유리하다. 일반선은 고속열차 뿐만 아니라 코레일의 일반열차, 화물열차가 공용하는 선로이다. KTX는 이 같은 노선을 고속열차가 개통된 이래 계속 운행해 왔기에 충분한 경험과 전문성이 확보되어 있다. 반면 SR이 전라선을 운행하기 위해서는 구간 면허 인증도 받아야 하고 운전에 투입되는 기관사들이 상당 시간의 실무견습도 받아야 한다. 철도 운행은 단순히 열차만 투입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역과 관제실과의 조응, 유지보수 팀과의 밀접한 협의, 기관사의 누적된 운행 경험을 통한 노선 이해, 그 밖에 갑자기 발생하는 이상 상황에 대처하는 노하우가 오랜 시간 축적되고 문화로 정착될 때 안전이 보장된다. 코레일과 SR의 수송지표를 비교해 보더라도 지역 도시와 수서간 고속열차 직통 운행은 누가 주력이 되어야 하는지 알 수 있다.
어떤 것이 합리적인지 불을 보듯 뻔한 사안임에도 국토부 관료들은 요지부동이다. 코레일이 아니라 오직 SR만이 수서발 전라선을 달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 이면에는 KTX가 수서역과 지역 일반노선을 연결할 경우 국토부가 숭배했던 경쟁체제의 허상이 그대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도색만 다른 열차가 같은 구간을 달릴 때 무엇이 경쟁의 효과인지 알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 출범 때 공공성을 기초로 한 철도개혁이 제시됐지만 관료들의 시간끌기로 한 걸음도 앞으로 내 딛지 못하고 있다. 이번에 제기된 전라선 수서발 고속열차 운행 방침은 국토부의 일방주의를 벗어나 시민편익의 관점에서 재조정되어야 한다. 국토부는 민주공화국의 주인인 국민의 이익을 수호하는 부처로 거듭나기를 간곡히 부탁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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