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지금 어떤 시간을 통과하는 중일까. 1년 전쯤 느닷없이 출현한 코로나19의 영향 아래 끝날 듯 끝나지 않는 코로나 시대를 지나며 누적된 피로와 어떤 상실감을 호소하는 목소리가 심심치 않게 들려온다. 그러나 코로나19는 갑작스럽게 발생한 사건이 아닐뿐더러 우리에게 익숙했던 일상이 그 발생과도 무관하지 않다. 사실 우리는 회복해야 하는 무엇인가를 상실한 것이 아니라, 상실된 상태로부터 전 지구적으로 새로운 삶의 방식을 재구축해야 할 상황에 놓인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운이 좋게도 완전한 파국 시점에 도달하지 않은 채 어떤 결정의 가능성이 주어진 시간을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코로나19로 말미암은 그간의 경험은 고통과 더불어 우리에게 앞으로 펼쳐질 삶의 국면들에 대한 암시를 주었고 또 어떤 결정을 해야 할지 성찰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었다. 우선 위기 속에서 사람들이 겪는 고통은 동등한 것이 아니라 각각의 경제적·사회적 조건에 따라 차별적이라는 점을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게다가 이런 와중에도 부동산·주식 가격 폭등을 통해 자산을 가진 이들은 더욱 부유해지고 고용 불안정과 경기 침체의 영향 속에 빈곤한 사람들은 더욱 빈곤해지는 부의 양극화가 심화하면서 사람들은 더욱 복잡한 심사를 갖게 되었다. 그 안에는 허탈함과 분노, 공포도 담겨 있지만 동시에 불평등에 대한 예민한 문제의식과 공동의 문제를 창조적으로 해결해나갈 사유와 정동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실제로 코로나19라는 공동의 문제에 대처해온 과정은 공동체의 역량과 시민적 주체성을 검증받는 시간이기도 했는데, 지금까지는 우리 스스로 자부심을 느낄 만한 분석과 지표들을 꽤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돌봄의 가치와 돌봄노동의 중요성을 체감한 일은 코로나 시대를 경유하는 과정에서 획득한 아주 특별한 배움의 경험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공동체를 이루는 구성원들이 삶의 국면마다 겪게 되는 생활의 필요를 함께 나누고 헤쳐나가며 서로 돌보는 일"(백영경 '복지와 커먼즈', <창작과비평> 2017년 가을호)의 가치와 중요성을 우리는 지난 한해 동안 온몸으로 부딪혀가며 절감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앞으로 변화할 우리 삶의 방식과 긴밀히 관련된 사안은 코로나19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제시된 환경과 생태 문제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이 상당히 확대되었다는 점이다. 특히 코로나19와 더불어 전 세계적으로 발생한 이상기후의 징후로 인해 기후위기에 대한 감각은 다른 어느 때보다 그 실감의 정도가 컸다. 그간 깊이 들여다보면 불편하고 또 생각하면 골치가 아파 회피한 면이 없지 않은 기후위기의 문제를 말 그대로 피부로 느끼게 된 경험의 의미는 결코 작지 않다. 이를 더욱 유의미한 방향으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위기에 대한 감각을 넘어 기후정의(Climate Justice)를 통한 인식의 변화와 행동으로까지 나아가야 한다. 어쩌면 기후정의와 관련한 행동과 실천이야말로 우리의 공동체 역량과 시민적 주체성을 뚜렷하게 입증할 또 하나의 중요한 시험대가 되지 않을까 싶다.
기후정의는 기후위기에 관한 대응과 조치가 생태의 문제만이 아니라 인권의 문제이고, 불평등의 문제이며, 또한 공동체의 역량 강화와도 관련이 있음을 일러준다. 기후 문제가 우리 시대의 정치적·경제적·윤리적 차원의 문제들이 가로지르는 교차점에 놓여 있다는 표현은 이제 너무나 현실적이고 직감적인 말이 되었다. 최근 몇몇 국가들의 과감한 결정과 조치 또한 이를 방증한다. 독일은 탈원전과 더불어 탈석탄 계획을 추진하며 실제로 작년 말 경제적 보상조치를 매개로 화력발전소 한곳을 폐쇄했다.(☞ 관련 기사 : <한겨레> 2020년 12월 23일 자 '[이주의 온실가스] 불 꺼지기 시작한 독일 석탄…모든 발전소 폐쇄 가속')
프랑스 법원은 기후변화에 제대로 대응하지 않은 정부의 책임을 물어 손해를 배상하라는 상징적인 판결을 냈을 뿐 아니라, 마크롱 대통령은 헌법 1조 1항에 기후정의적 요소를 추가해 "공화국은 생물다양성과 환경보전을 보장하고 기후변화에 맞서 싸운다"라는 문장을 넣으려는 중이다.(☞ 관련 기사 : <경향신문> 2월 4일 자 '"프랑스 1유로 내라" 지구 위한 큰 판결') 새롭게 출범한 미국의 바이든 정부 역시 전직 국무장관 존 케리를 기후특사로 임명하고 파리기후협약에 재가입하며, 2030년까지 연방 토지와 수역의 석유 시추를 중단하는 등 다양한 기후 관련 조치 및 행동을 실행하고자 한다.
이러한 변화의 행보에 비추어볼 때 우리나라의 현재 상황은 어떠한가? 2050년까지 탄소중립을 달성하고 온실가스 배출 역시 최소화하겠다고 선언했지만 실제 행정과 법률 제정은 그것의 실현 가능성을 의심케 한다. "경제성장주의에 매몰되어 기업들에게 새로운 이윤 추구의 기회만을 만들 뿐, 사회적 불평등 해결도 그리고 기후위기 해결도 불투명한 녹색성장류의 접근"은 재고되어야 한다.(☞ 관련 기사 : <프레시안> 1월 27일 자 ''탈탄소경제법'이 아니라 '기후정의법'이어야 한다')
경제성장의 시각과 기후정의적 시선을 양자택일의 구도로 놓고 판단하거나 형식적으로 절충하는 일이 시대착오적이라는 사실은 분명해졌다. 기후정의는 우리가 선택항에 두고 고를 문제가 아니라 지금 바로 그에 맞는 결정과 행동을 실천해야 할 사안이기 때문이다. 독화살을 맞은 사람이 가장 시급하게 할 일은 화살이 날아온 각도나 화살의 종류를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우선 자신의 생명을 위협하는 화살을 몸에서 뽑아내는 일이라는 옛이야기를 떠올리면, 우리의 결정이 어떤 방식이어야 하는지 좀 더 뚜렷해진다.
*이 글은 <창작과비평> 2021년 봄호 '책머리에'의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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