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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기득권 세력 모두 '미국 중심적 체계'에서 벗어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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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기득권 세력 모두 '미국 중심적 체계'에서 벗어나야 한다"

[창비 주간 논평] 트럼프에서 바이든으로…'미국'이라는 문제 설정

미국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정치와 경제에서 막강한 힘을 휘두르는 존재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 마음속에 새겨진 미국을 들여다보려는 것이다. 미국이라는 현실과 구조는 우리의 의식을 장악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해왔을 터이다. 그 엄청난 영향력을 인정하는 대부분은 미국에 의지하며 사는 것이 유리하다고 주장한다. 반면에 열등감에서든 민족적 자존심에서든 미국을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일반적인 입장은 이러한 양극단을 축으로 중간 어디쯤에서 방법을 모색하려는 것이다. 복잡한 국제 정세와 국내 정치가 얽힌 상황에서 친미 혹은 반미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은 현실적인 대안이 되기 어렵다는 동의 정도는 공유되고 있다. 그럼에도 결국 미국을 중심에 두고 사고하는 것은 변하지 않는데, 이는 우리가 미국을 절대적 기준으로 두고 존재적 위치를 설정해왔기 때문이다.

마음속에 각인된 미국은 곳곳에서 현실이 된다. 모두들 국가안보와 한반도 평화 구축을 위해서는 미국의 의중을 읽어내는 것이 관건이라고 한다. 미 정권이 바뀔 때마다 숨 고르며 가능성을 타진하지만 결정적 순간에 해결사 미국을 기다리다가 기회를 놓쳐버린 것이 한두 번이 아니다. 혹여나 심기라도 건드렸다 싶으면 굳이 미국이 나서지 않아도 내부로부터 외교 참사라는 식의 비난이 쏟아져 나온다. 경제는 또 어떠한가. 미국 없이는 단 하루도 버티지 못한다는 분석이 신념이 된 지 오래다. 중국과 일본의 경제제재는 극복 가능한 것으로 상상되기도 하지만 미국의 제재는 한국 경제의 숨통을 끊어놓을 것이라는 두려움이 가득하다. 미국처럼 되기 위한 일상의 열망은 '근대' '자유' '선진' 등의 이름으로 사회적 지향이 되었다. 미국에 대한 담론은 식민화된 지식체계를 경유하여 과학과 믿음의 영역을 아우르는 거대한 성역으로 존재한다.

미국을 벗어나려는 시도의 한계도 분명해 보인다. 민족과 자주 등을 일방적으로 강조하는 입장은 현실적이지 않아서라기보다 미국이라는 존재의 힘을 재생산하기에 문제적이다. 자신들의 입장과 정치적 중요성을 부각하기 위해서 극복하고자 하는 대상에 대한 절대적 신화를 더욱 그럴듯하게 재생산하는 것이다. 또한 미국에 반기를 드는 심리는 결국 미국에 의존하는 것과 유사한 감정구조를 공유한다. 이는 주체적으로 존재하지 못하는 상태에 대한 자백이기도 하다. 정희진이 반미문학 속 '식민지 남성성'에 대한 분석에서 밝혔듯 미국이라는 대타자에 대항하면서도 미국을 열망하는 이중적 인식의 틀은 한국의 남성성을 관통하며 담론의 장에서 일상의 수준으로 확장된다.('반미문학을 통해 본 식민지 남성성의 형성', 이화여대박사학위논문 2019)

북한의 의식구조 내 미국이라는 존재는 더욱 견고하며, 역설적이게도 정체성의 중심이라 평할 만하다. '평화의 보검'이라는 핵무기는 '제국주의 미국의 책동'을 막아내기 위한 수령의 주체적 결단이자 인민의 생명을 걸고 지켜야 하는 것으로 의미화된다. 국가 건설 시기만 해도 사회주의 혁명의 이상과 목표가 제시되었으나 지금은 미국으로부터 체제 안전을 보장받는 것에 급급한 상황이다. 이는 냉전 시기 미국의 적대시 정책에 직접적인 타격을 받아서이기도 하지만, 너무 오랫동안 적을 내면화해온 까닭에 미국에 대항하는 일에만 몰두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코로나 팬데믹과 같은 인류적 위기 상황에서도 여러 차례 열병식을 감행하고, 인민과 군대를 동원해 형형색색의 고층 건물을 건설하는 것은 '적'에게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키기 위함이다. 두려움과 열등감이 뒤엉켜 합리적인 판단이 어려워지면, 결국 고통받으며 스러져가는 것은 인민들이 된다.

미국에 결박된 한반도 사람들의 시각은 현실에 대한 냉정한 판단이나 미래에 대한 새로운 상상을 제한한다. 문제는 이렇듯 모든 것이었던 미국의 실체가 흔들리고, 담론 세계를 장악했던 미국 중심적인 지식체계의 허상이 폭로되기 시작했다는 데 있다. 트럼프 시대에 민주주의와 자유주의는 상당한 타격을 받았고, 미국이 주도했던 세계는 팬데믹으로 절체절명의 위기에 봉착했다. 미국의 세계를 당연하게 여기며 살아온 남북 모두 혼란스러운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세계 밖에 대한 지식과 감각이 무딜수록 두려움은 커질 수밖에 없다. 세계 밖의 존재들, 자의에서건 타의에서건 경계 밖으로 밀려난 이들에게 기대를 걸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변방에서 살아온 여성, 청년, 이주자, 난민의 경험은 이미 미국의 세계가 얼마나 허약한 것인지 증언하고 있다. 군사적 안보를 넘어서는 여성들의 연대, 국가주의로부터 자유로운 청년들의 의식과 감각, 국경을 허무는 이주자와 난민 등의 다층적인 삶의 경험과 전략은 지금껏 당연한 것으로 여겨온 것 너머를 상상하게 한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미국을 깊게 내재화한 대부분은 남북에서 경제력과 권력을 쥔 기득권 세력이다. 정치, 경제, 사회 모두에서 주도적 역할을 해온 이들은 미국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사고방식을 갖고 있다. 역설적이게도 가진 것이 없는 이들은 미국에 골몰하기보다는 당장 자신의 삶을 옥죄는 기득권에 저항하거나, 그마저 어려우면 살아남기 위해 자기 나름의 삶의 전략을 만들어갔다. 엉뚱한 상상력을 발휘하여 틈새를 만들기도 하고, 당연시 여겨지는 것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미국, 국가, 분단, 자본주의/사회주의 등과 같은 거대담론의 안팎을 횡단하는 모든 이들이 바로 새로운 세계의 보고(寶庫)일 것이다.

핵과 미사일의 국가 안보를 인간 안전으로 바꾸어내는 것, 억압적 국가를 사회와 공동체로 전환하는 것, 경제적 이해타산을 호혜관계로 극복하는 것, 성장을 상생으로 대체하려는 것 등은 이미 남북한의 곳곳에서 시도되고 있다. 다만 미국만을 추종해온 남북 기득권에게 인식되지 못했을 뿐이다. 이제 포착되지 않은 채 잔여적인 것으로 남겨진 것들을 대안적 인식의 틀과 몸의 감각으로 의미화하는 일에 나서야 한다. 미국을 극복한 '다른 미래'를 꿈꾼다면 경계 밖 수많은 상상력과 실천들의 가능성을 주목하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새로운 세계는 이미 지근거리에 도달해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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