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8차 노동당 대회는 끝났고, 미국의 바이든 행정부는 출범했다. 이 사이에 문재인 정부는 정의용 전 청와대 안보실장을 외교장관으로 기용했다. 북한과 미국의 중요한 변화를 한반도 평화를 향한 "마지막 노력"의 계기로 삼아보겠다는 문재인 대통령의 의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과도한 의미 부여는 정부 스스로 자제할 필요가 있다. 기실 사상 최초의 북미정상회담 성사를 두고 정의용 당시 안보실장이 "주도했다"는 평가는 과도한 것이다. 북미정상회담을 양측에 제안해 이를 성사시켰다는 '주도자'가 아니라 김정은 총비서의 제안을 도널드 트럼프 당시 대통령에게 전달한 '메신저' 역할로 보는 것이 적확하다. '운칠기삼'이었다는 뜻이다.
문재인 정부가 겸손의 미덕을 가지고 실력을 키웠어야 할 시기에 자만의 덫에 빠져 시야가 흐려진 것이 남북관계 악화와 한반도 평화프로세스 중단의 원인 가운데 하나였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그리고 그 책임으로부터 컨트롤 타워 역할을 했던 정의용 장관 내정자의 책임도 결코 작지 않다. 이에 따라 외교장관의 교체는 정책과 전략의 유의미한 변화의 신호탄이 되어야 한다.
외교장관 교체, 정책과 전략의 진화로 이어져야
이와 관련 문 대통령의 18일 신년 기자회견 발언의 문제점을 짚어볼 필요가 있다. 문 대통령은 "비핵화가 완전히 실현된다면 그때는 북미 간에 또 남북 간에 또는 3자간에 평화협정 체결을 통해서 평화가 완전히 구축되면서 북미관계가 정상화되는 이런 과정"이라고 말했다. 이 발언은 평화협정의 주체와 관련해 남북미중 4자 평화협정이 되어야 한다는 당사자들의 오랜 논의와 거리가 있는 것이다.
더 중요한 문제는 평화협정 체결과 북미관계 정상화의 조건으로 완전한 비핵화가 선행될 필요가 있다는 취지의 발언에 있다. 이는 정의용이 안보실장 재직 시 "한반도 비핵화를 통한 평화체제 구축"이라고 여러 차례 발언한 것과도 맥락을 같이 한다. 하지만 이러한 인식과 발언은 중대한 문제를 안고 있다. 문 대통령이 바이든 행정부도 계승·발전시켜야 한다고 강조한 싱가포르 북미정상회담 합의 사항과도 맞지 않기 때문이다.
싱가포르 북미공동성명은 새로운 북미관계 수립을 1항으로,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2항으로,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를 3항으로 두었다. 그리고 후속협상을 통해 이들 합의를 "동시적·병렬적"으로 이행키로 했었다. 즉, 북미관계 정상화-평화체제 구축-완전한 비핵화를 동시적으로 추진키로 한 것이다. 그러나 문 대통령의 발언은 완전한 비핵화→평화협정 체결→북미관계 정상화 순서로 가야 한다는 의미를 품고 있다.
더구나 평화협정 체결과 평화체제 구축은 동일한 것이 아니다. 평화협정에서 합의한 사항을 완전히 이행할 때 비로소 평화체제가 구축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평화협정 체결은 비핵화에 상당한 진전이 있고 그 완성이 가시권에 들어올 때 이뤄지는 것이 현실적이고도 바람직하다. 이에 따라 대북정책 재검토의 주체는 바이든 행정부뿐만 아니라 문재인 정부도 되어야 한다.
본 글의 주제인 비핵화와 관련해서는 표현부터 달리 해야 한다. 문 대통령부터 고위 관료에 이르기까지 "북한의 비핵화"라는 표현을 습관적으로 사용해왔는데, 이 표현부터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누누이 강조하지만 공식적이고 합의된 용어는 "한반도 비핵화"이다. 이에 따라 일방적인 속성을 갖고 있는 "북한의 비핵화"라는 표현은 비핵화에 필요한 최소한의 공감마저 형성하는 것을 어렵게 한다.
더욱 강해진 비핵화 체념론
북한의 8차 당대회를 거치면서 한반도 비핵화에 대한 체념적인 정서는 더욱 강해지고 있다. 북한이 "조선반도(한반도) 비핵화"라는 표현조차 하지 않으면서 다양한 핵무기 증강 계획을 밝히고 "국가 방위력 강화"를 노동당 규약에 명시했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비핵화가 불가능해진다는 것은 한반도 평화와 남북관계 발전도 그만큼 어려워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냉정하게 볼 때, 비핵화 전망이 매우 어두워진 것은 사실이다. 우선 북한의 핵 능력 자체가 크게 강화되었다. 일례로 스톡홀롬국제평화연구소(SIPRI)는 북한의 핵무기 보유고가 2016년 약 10개에서 2020년에는 30~40개로 늘어난 것으로 분석했다.
이에 더해 북한은 8차 당대회에서 새로운 전략 핵무기부터 전술핵무기 개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핵무기 증강 계획을 밝혔다. 북한의 핵 능력이 강화되었고 그 핵 능력을 더 강화하겠다는 것은 그만큼 한반도 비핵화 실현이 더욱 어려워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북한뿐만 아니다. 북한과 군사적 적대나 경쟁 관계에 있는 나라들의 군사력도 크게 강화되었다. 트럼프 행정부 시기 막대한 군사비가 투입되어 미국의 군사력도 크게 강화되었는데, 여기에는 B61-12를 비롯한 신형 핵무기도 포함된다.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2017년 세계 12위로 평가받았던 한국의 군사력은 2020년과 2021년엔 세계 6위로 평가되고 있다.
반면 북한은 2017년 18위에서 올해엔 28위로 떨어졌다. 남북한의 군사력 격차가 벌어질수록 북한의 핵무기 포기 가능성도 위축된다. 북한으로서는 군사력 균형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북한과 적대 관계에 있는 일본 역시 매년 군사비를 증액하고 있다.
정치외교적 환경도 여의치 않다. 오바마 행정부의 '전략적 인내'도 트럼프 행정부와의 '톱다운' 외교도 경험한 김정은 총비서의 결론은 "미국에서 누가 집권하든 미국이라는 실체와 대조선 정책의 본심은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미국에선 'ABT(Anything But Trump, 트럼프가 한 일을 뒤집는다는 뜻)'가 유행이고 여기엔 북미 정상회담도 예외는 아니다. 설상가상으로 한반도 문제에 큰 영향력을 갖고 있는 미국과 중국의 전략경쟁도 치열해지고 있다.
이러한 점들을 종합해볼 때, 한반도 비핵화와 이와 연동된 평화체제 구축 및 남북관계 발전이 매우 어려워진 것만은 분명하다. 그러나 체념하거나 절망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갈등과 경쟁이 격화되면 대화와 타협의 필요성이 커지는 속성도 있기 때문이다.
우선 북한이 당대회에서 "비핵화"에 대해 일절 언급하지 않은 것을 다른 각도에서도 바라볼 필요가 있다. "조선반도 비핵화가 김일성-김정일의 유훈이자 북한의 변함없는 목표"라는 말도 없지만, "조선반도 비핵화가 종말을 고했다"는 표현도 없다.
역사를 반추해보면
역사에서도 교훈을 얻을 수 있다. 1994년 10월 북미간의 제네바 기본합의는 그해 6월 한국전쟁 이래 최악의 전쟁 위기를 거치면서 나온 것이었다. 2006년 10월 북한이 최초의 핵실험을 강행하자 "비핵화는 물 건너갔다"는 주장이 팽배했었다. 하지만 그 직후 북미대화와 남북대화, 그리고 6자회담이 선순환이 이뤄지면서 비핵화에도 의미 있는 진전이 있었다.
가장 극적인 사례는 2017-2018년에 나왔다. 2017년엔 김정은과 트럼프의 치킨게임으로 한반도 위기가 고조되었고 이 와중에 북한은 11월에 화성-15형 미사일을 발사하곤 "국가 핵무력 완성"을 선언했다. 그러자 "비핵화는 끝났다"는 말이 더더욱 유행했다. 그러나 4개월 후 김정은은 "완전한 비핵화" 의사를 표명하고는 남북정상회담과 북미정상회담에 임했다.
물론 결과는 좋지 않았다. 그리고 북한의 핵 능력은 지속적으로 강화되었다. 이러한 사례들을 북한의 속임수 게임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그러나 유념해야 할 것이 있다. 상기한 기회들이 유실된 데에는 한국과 미국의 책임도 결코 작지 않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북한을 비판하는 것 못지않게 한미 양국의 정책적·전략적 실패도 자성해야 한다. 그래야만 비핵화에 대한 희망, 이와 연동된 평화체제와 남북관계 발전에 대한 기대를 되살릴 수 있다.
* 다음에 이어질 글 : 김정은과 바이든, 교집합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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