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그날이 왔다. 모두 힘을 합쳐 탄소중립을 달성하자는 신기후체제가 시작됐다. 지지부진한 포스트 교토체계 논의 끝에 골든타임을 허비하고 가까스로 합의한 파리협정에 거는 기대가 크다. 불충분하고 불완전한 국제규범일지라도, 국제기구, 국가, 정치권, 재계, 금융권, 학계, 언론, 광고, 시민사회 모두가 한 목소리로 과거는 묻지 않고 탄소중립을 외치고 있다.
우리나라도 뒤늦게, 대략 작년부터 기후위기를 본격적으로 다루기 시작했다. 더는 일부 사회운동의 전유물이 아니게 되었다. 여전히 외신과 가십, 그리고 아전인수가 판을 치지만, 때로는 성장주 투자 목록으로, 때로는 환경이나 에너지 정책으로, 그리고 정치적 스펙터클에서는 ‘XX 대전환’의 배경으로 자리를 잡은 것 같다. 물론 배출 감축 흐름과 필수 도입 정책에 저항하거나 이를 지연시키려는 세력들이 곳곳에 존재한다. 단기 이익을 최대한 유지하려는 부류도 있는 한편, 다른 쪽에는 사회 안전망을 확보하려는 진영도 있다.
탄소버블 시대. 환경만이 아니라 경제, 정치, 사회, 이 모든 곳이 탄소로 넘쳐나는 세상에서 누군가는 희망을, 또 누군가는 절망을 말한다. 그 사이에서 분출하는 분노가 어디로 향할지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장기지속의 시간대를 넘어서는 인류세․자본세에서 우리는 파괴와 멸종의 거대한 가속화 시대(The Great Acceleration)를 끝내고, 공존과 평화의 거대한 전환(The Great Transformation)에 접어들 수 있을까. 다른 색깔을 띤 착취․채굴의 가속화가 새로운 극단의 시대를 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장기 비상사태(chronic emergency)는 한편으로는 비상정지(emergency brake), 다른 한편으로는 가속주의(accelerationism)라는 두 속도 전략으로 통과할 수밖에 없다. 얼핏 보면 이율배반으로 보이지만, 나쁜 것의 감속과 좋은 것의 가속이 필요하다.
질주학(dromology)을 창안한 폴 비릴리오는 속도와 시공간에 대해 독특한 관점을 취했는데, 테크놀로지 가속화의 한계를 사유하고 비판적으로 전망했다. 더 이른 시기에 발터 베냐민은 ‘비상정지’ 개념에서 진보와 혁명의 의미를 재전유했다. 기후위기에 어울리는 혁명적 사고를 이들에게서 얻을 수 있다. 이외에도 생태주의 대안은 다양하고, 우리에게 영감의 원천이 된다. 그렇다. 기후위기 대응 목표인 탈탄소는 현재 이 순간과 신속하고 철저한 단절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모든 것을 멈추자는 말이 아니다. 체제의 모순과 균열이 심화되는 과정에서 권력관계의 재편을 추동하는 새로운 긍정의 가속주의가 병행되어야 한다. 최근 안드레아스 말름의 다소 파격적인 주장도 경청할 만하다. 그는 자본주의적 점증주의나 평화 코뮤니즘(peace communsim)이 아니라, 생태적 전시 코뮤니즘(ecological war communism)을 통해서 기후․팬데믹 재난의 변증법적 동학을 헤쳐나갈 수 있다고 제안한다(<코로나, 기후, 장기 비상사태>(Corona, Climate, Chronic Emergency, Verso, 2020) 참조).
감속과 가속의 속도 전략은 지속가능성 전환이론의 ‘파괴’와 ‘창조’라는 이중 전략과 맞닿아 있다. 국가의 권한과 자원을 총동원해 기성 체제의 안정화가 아니라, 그 반대로 불안정화를 경험하도록 기획한다. 탄소집약적 산업, 금융, 기술, 문화 등의 축소와 중단을 직접적으로 의도하는 것이다. 이와 동시에 자생적 혁신 실험들을 지원하고 다양한 사회세력이 전환의 능동적 주체로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한다. 다중 스케일의 여러 거점에서 생태적, 사회적 커먼즈를 개척하고 확산하는 노력들을 그 자체로 인정하고 보호하는 것이다.
물론 신기후체제에서 감속과 가속의 속도 전환이 말처럼 쉽지 않을 것이다. 인간의 역사는 가속화의 역사이기 때문에 정지와 감속을 단행하기란 매우 어렵다. 경제성장과 온실가스 배출의 탈동조화 견해가 주류를 이루는 상황에서 취해지는 온건한 개혁 조치는 탈탄소의 가능성을 더 낮춘다. 여기에 기술주의적 욕망이 더해지면 비상 브레이크에 접근할 방법은 거의 사라진다.
대안의 가속주의에 허용되는 범위도 제한적이다. 지배 레짐의 변혁 문턱을 넘을 수 있는 구역에 근접할 기회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불가능에 가깝다. 자율 관리, 창조 역량, 공동 생산 등의 커먼즈 권력은 대체로 지배 레짐을 일부 보완하는 역할로만 행사할 수 있다. 반면 자본의 포트폴리오 확대와 녹색 가치의 창출과 실현은 속도 무제한의 전용 고속도로로 실현된다.
코로나19 대응이 주로 긴급 지원과 백신 개발의 임시방편에, 그것도 빈자와 빈국에 더 큰 타격을 주는 방식에 초점을 맞추는 관성은 또 다른 팬데믹(Disease X)의 발생 가능성을 지우지 못할 것 같다. 2018년, 세계보건기구(WHO) 회의에서 Disease X 발발 경고가 있었듯이, 코로나19와 같은 사태는 블랙스완 사례가 아니라, 지속불가능한 생태계로 인해 예상 가능하게 경향적으로 나타나는 결과로 보는 게 맞다.
기후위기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각종 자연재난과 사회재난을 통해 더 심대한 영향을 미친다. 지금까지 질주해온 관성까지 고려해 곧 도달할 금지선을 넘지 않으려면 가급적 서둘러 비상 브레이크를 잡아당겨야 한다. 따라서 온실가스 배출 자체를 전면적으로 제한하는 규제수단과 민주적․계획적 전환관리가 없다면, 투자와 생산, 그리고 노동과 소비 방식의 자발적 변화는 부정의 속도를 올릴 뿐이다.
기후위기의 원인과 책임 관계가 불공정하고 불평등하게 설정되고 있는 것처럼, 사건사고와 전환정책에 대처하는 적응력 또한 차별화된다. 엘리트 기득권이 사적 요새와 탈것으로 팬데믹과 기후위기에 대응하고 있는 것과 반대로, 다수의 취약계층은 고립된 주거공간과 소외된 사회관계에서 그 피해와 손실을 온몸으로 떠안고 있다. 그렇다고 다음 20대 대선에서, 2025년과 2030년에, 기후부정의가 완화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설사 탄소회계상 온실가스 감축이 어느 정도 성공하더라도, 기후정의가 거기에 동조화되어 상황이 개선될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희망과 의지에 충만해야 할 새해, 가망이 없어 보이지만 그래도 희망을 버리지 못한다. 실천을 자제할 때가 아니기 때문이다. 기후위기라는 복잡한 고르디우스의 매듭은 복잡한 방법으로 풀 수 없다. 간단하지만 대담한, 부정의 감속과 긍정의 가속을 동시에 조합하는 속도의 정치가 절실하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