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을 명명할 수 없다는 것
1821년(순조 21) 8월 4일, 한양에서 "구토하고 설사하는 병의 증상으로 인해 평양성 안에서만 사망한 이가 하루 사이에 삼백 명"이라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조선 정부는 이 병이 무엇인지 조사하기 시작했고, 8월 13일 평안감사 김이교의 보고를 통해 7월 말일부터 평양부의 성 안팎에 괴질이 유행하기 시작해서 사망자가 열흘 사이에 1천 명이 되었다는 보고를 받았다. 김이교의 보고를 받은 다음 날 정부는 콜레라가 황해도 지역에서도 유행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같은 달 17일, 서장관 홍언보는 산해관 이남의 해안 주변에 괴질이 유행해서 죽은 사람이 많다는 보고를 했는데, 이를 통해 조선에서는 이 병이 중국을 거쳐 평안도 지역으로 유입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김이교의 보고 이후 열흘 뒤에 콜레라는 화성을 비롯한 경기도 일대로 확산되었고, 다시 열흘 뒤에 충청도 산골까지 번졌다. 그리고 경상도와 전라도로 곧바로 확산되었다. 1822년 이 병은 다시 유행해서 제주도까지 퍼지는데, 이때 유행은 전년도에 감염된 보균자에 의해서 일어난 것이었다.
당시 괴질이라고 불렸던 이 병은 인도에서 발생해서 전 세계로 확산되었던 콜레라로, 아시아의 경우 인도, 미얀마, 타이를 거쳐 1820년 중국의 광동에 침투했고, 이후 영파, 절강, 서북지역에서 유행하게 된다. 그리고 1821년 남경과 산동, 북경을 거쳐 중국 전역에서 창궐한 뒤 산해관을 거쳐 요동 바닷가 지역을 따라 조선의 의주를 통해 황해도와 평안도로 유입되게 된다.
괴질이란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을 지칭하는 것으로, 콜레라가 오랫동안 괴질이라 불렸다는 것은 당시 조선인들이 콜레라의 원인을 알 수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병을 지칭할 수 없다는 것, 그것은 병을 치료할 방법을 모른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학자들은 증상을 통해서 이 병의 원인과 치료법을 찾기 위해 문헌을 찾아 비교한다. 학자들은 설사, 오한, 명치 밑이 아프고 식은땀이 나며 속이 답답한 증세, 근육의 뒤틀림 등으로 유추하여서 과거에 존재했던 병인 마각온, 갈탑의 이름을 붙이기도 하고, 민간에서는 습기나 쥐를 원인이라고 생각하여 습온(濕瘟), 서(鼠)라고 부르기도 했다.
콜레라의 원인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은 서양도 마찬가지였다. 콜레라라는 명칭이 이 병을 지칭하는 일반명사가 되기는 했지만, 콜레라란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에서도 등장하는 병으로, 기본적으로는 이질, 즉 설사병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다시 말해서 콜레라는 증상 중 하나를 설명하는 명칭이지 이 병의 본질을 규정하는 이름은 아니라는 것이다. 병에 대한 명명과 그 명명에 뒤따르는 정의 및 설명이 적절하지 않다는 것은, 병에 대한 조처를 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19세기 조선과 영국 정부의 전염병에 대한 태도
콜레라가 유행했을 당시 영국정부가 공리주의자이자 해부법안의 제정에 기여한 토마스 스미스(1788-1861)의 견해에 따라 콜레라를 비전염병적인 병으로 규정하고, 섹스나 음주 등의 비도덕적인 생활, 가난, 정치에 대한 특정한 입장, 가족적 가치의 무지에 대한 병이라고 규정했던 것은 바로 이를 잘 보여주는 사태이다. 또 당시 러시아의 경우 정확한 병의 원인을 모르는 채 전염을 막기 위해 지역을 봉쇄하고 격리함으로써 군중의 폭동을 유발하기도 했다. 다시 말해서 19세기 후반 위생개념이 등장하고 근대의학이 본격적으로 전 세계에 확산되기 이전까지 콜레라는 명명과 규정에 실패한, 치료가 어려운 병이었다고 볼 수 있다.
조선이 영국과 달랐던 것은, 영국의 경우 콜레라가 사회문제에서 발생한 것이라고 규정한 반면 조선은 통치의 잘못에서 발생한 것이라고 보았다는 것이다. 조선은 전염병이 발생하면 가장 먼저 위정자들이 반성하고, 그 이후 국가 재정을 풀어서 구휼하고, 죽은 자들을 장사지내고 연고 없이 사망한 사람들을 위한 제사를 지낸다. 실제로 이 모든 과정은 조선시대에 전염병이 창궐할 때마다 반복적으로 국가가 해오던 전염병 대처법이다.
조선시대 행정의 발달과 정치적 정당성의 위기
여기에서 잘 보아야 할 것은, 조선의 대처가 사실은 여론에 대한 대처였다는 점이다. 농업국가이자 유교국가인 조선의 가장 중요한 의무 중 하나가 진휼, 즉 재해에 직면한 백성들에게 재정적 지원을 해주는 것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늘 재정난에 허덕였기 때문에 전염병에 피해를 입은 사람들을 충분히 구제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따라서 국가는 여론의 악화, 그리고 사회질서의 붕괴를 막기 위해서 최대한의 노력을 기해야 했다.
그런데 19세기의 조선은 두 가지 측면에서 전염병으로 인한 국가 정당성의 훼손과 국가적 손실을 해결하기 어려웠다. 하나는 재해의 시대라고 불러도 될 정도로 조선 후기는 재해와 전염병이 많이 발생했는데, 이로 인해서 국가가 구휼을 위한 충분한 재정을 마련하기도 전에 다시 재해가 발생하는 악순환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이전 시기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중앙집권적 행정체계는 발달한 데 반해 전문적인 관료를 고용하고 키워내기 위한 예산이 부족했다는 것이다.
두 번째 문제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전쟁이 중앙집권적 관료제의 발달을 추동했던 서양과 달리 동아시아의 관료제는 자연재해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발달했다. 자연재해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정부는 국가의 영토를 확정하고 지역을 구분하며 인구를 정확히 파악하려는 노력을 기하게 된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을 조사하고 정책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관료의 전문성이 요구된다.
이 전문성에는 백성에 대한 애정, 정책집행에 있어서 정책의 기준에 따라 누구를 배제할 것인지를 정확하게 규정하는 냉정함, 법의 집행 시 거센 사회적 저항과 성난 개인들의 일탈 을 개인적 감정이 아닌 법적 근거에 따라 처리할 수 있는 공정성 등이 포함된다. 전염병의 경우 구휼 뿐만이 아니라 약의 제조 및 보급 역시 관료들의 업무 중 하나에 속했다.
전근대 국가는 현대국가와 비교해 볼 때 자연재해를 처리할 충분한 재정적, 행정적 역량이 없으므로 국가의 대처는 언제나 충분치 않았다. 전근대 동아시아국가는 인정(仁政), 즉 백성들에게 세금을 덜 걷고 의식주를 보장해주는 관대한 정치를 지향하는데, 이로 인한 재정확보의 실패는 결국 재해처리의 실패로 이어지고, 재해처리의 실패는 국가의 목표가 실현되지 않은 것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국가는 언제나 재해와 관련해서는 그 권력의 정당성이 도전받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조선후기 행정의 발달은, 행정이 국가 정당성의 큰 부분을 구성하는 요소가 되었을 때 어떤 한계를 가져오는가를 잘 보여준다. 재해를 처리하기 위해서 국가가 행정을 발전시키는 것은 국가의 책무이다. 그런데 어쩔 수 없이 재해의 처리는 항상 불충분하다. 더 큰 문제는 충분히 많은 관료의 충원과 행정의 발달이 요원한 상황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을 행정과 법적 처벌의 강화를 통해서 해결하려고 하거나, 그러한 요구들이 여론으로 등장할 때 나타나는 문제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국가정책을 건전하게 비판하고 국가와 백성 사이의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낼 수 있는 중간자적 역할을 하는 존재들이 성장하기보다는 여론이 이분법적으로 대립하게 되기 쉽다. 그리고 이런 문제를 정치적으로 풀지 못할 경우, 일견 국가를 강화시키는 것처럼 보이는 행정의 강화와 국가를 지지하는 여론이 역설적으로 새로운 국가 정당성의 위기로 잔존하게 된다. 19세기 조선에서 그랬다는 얘기다.
<참고문헌>
김신회. 2014. "1821년 콜레라 창궐과 조선 정부 및 민간의 대응양상" <한국사론> 60.
신동원. 2013. <호환 마마 천연두: 병의 일상 개념사>. 돌베개.
시민정치시평은 참여연대 부설 참여사회연구소와 <프레시안>이 공동 기획,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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