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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법원 엘리트들, 소수정당 국회의원 '노회찬'을 짓밟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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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검찰·법원 엘리트들, 소수정당 국회의원 '노회찬'을 짓밟다

[음식天國 노회찬] <20> 서초동 '법조타운' 설렁탕집 '이남장'

1.

추운 겨울에는 설렁탕만 한 음식이 없다. 사골, 도가니 등 소뼈와 양지 등을 오랫동안 푹 곤 국물에 밥을 말아 먹는 음식으로 개화기를 전후해 서울에서 대중화되기 시작했다. 질 좋은 수육에 소주로 반주를 하고 뜨끈한 설렁탕 한 그릇 뚝딱하면 속이 든든한 게 부러울 것이 없다.

노회찬도 날씨가 쌀쌀해지면 '이문설농탕'이나 '하동관' 따위의 유명 설렁탕집과 곰탕집을 즐겨 찾았다. 그 가운데 을지로에 본점을 둔 '이남장'도 있었다. 1970년대 문을 연 뒤 성업을 거듭하여 서초동점을 비롯해 서울과 경기도 일원에 이남장 설렁탕집이 10개에 이른다.

11월 중순의 늦가을 저녁 서초동 이남장 2층에 몇몇 변호사들이 모였다. 권력과 자본에 맞선 노회찬의 '삼성 X파일' 사건 법정에서 노회찬의 용기를 변론했던 분들이자 초기 민주노동당 법률지원단의 일원이었던 분들이다. 좌장 격인 이덕우 변호사(법무법인 창조)를 비롯해 백승헌(법무법인 경), 김정진(제일합동법률사무소), 이민종(서울시교육청 감사관), 박갑주·김수정 부부 변호사(법무법인 지향)가 시간을 내주셨다.

이날 모임이 있고 한 달쯤 뒤인 12월 10일 마침내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정의당 김종철 대표는 찬성당론을 발표하면서 '의인 노회찬'의 이름을 앞세웠다.

"'삼성 X파일'과 '떡값 검사 명단' 폭로로 고(故) 노회찬 의원은 의원직을 상실했지만 마땅히 법의 심판을 받았어야할 그 이름들은 버젓이 살아남았습니다. 검찰의 특권 앞에 노회찬과 같은 의인이 희생되는 불행한 역사를 끝내기 위해 공수처 설치는 피할 수 없는 과제입니다."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아 더욱 한스럽지만, 노회찬은 20대 국회에서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법을 처음 발의(2016년 7월 21일)한 정치인이다. 무겁고 무서운 단어로 조합된 법안을 노회찬은 참으로 알기 쉽게 설명했다.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신설을 반대하는 것은 동네파출소가 생긴다고 하니까 그 동네 폭력배들이 싫어하는 것과 똑같은 거죠. 모기들이 반대한다고 에프킬라 안 삽니까?"

'음식천국 노회찬'의 스무 번째 이야기는 그래서 더욱 운명적이다.

일러스트 김경래

2.

'삼성 X파일' 사건은 15대 대통령 선거를 앞둔 1997년 9월께 이학수 당시 삼성그룹 비서실장과 <중앙일보> 홍석현 사장이 나눈 대화를 안기부(현 국정원)가 도청했고, 2005년 7월 MBC 이상호 기자가 도청 내용을 폭로한 사건을 말한다. 그래서 처음에는 '안기부 X파일'이라고 했으나, 녹음 속 대화의 주체가 '범(凡)삼성'으로 드러나면서 '삼성 X파일'로 굳어졌다. '삼성 X파일' 속에는 이(李)-홍(洪) 두 사람이 불법 대선자금 제공, 고위 검사들에 대한 떡값 로비 등을 논의하는 내용이 들어 있었고, 이는 '권력과 자본의 유착 실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것이어서 큰 파문이 일었다.

그러나 당시 언론과 정치인들은 삼성으로부터 떡값 로비 대상으로 선별된 이른바 '떡값 검사'의 실명을 알면서도 검찰과 삼성 눈치를 보며 실명 공개를 못 하고 있었다. 이때 진보정당으로 처음 국회에 진출한 민주노동당 국회의원 노회찬이 분연히 일어선다. 2005년 8월 18일 열린 국회 법사위 대정부 질의를 통해 7명의 '떡값 검사' 명단을 국민들에게 알린 것이다. 이 광야의 외침에 '유착 권력'이 가한 보복은 잔인했다. 노회찬은 2년 뒤 검찰로부터 기소를 당했고, 그 후 6년여를 재판에 시달리다가 대법원에서 유죄가 확정돼 국회의원직을 잃었다.

당시 사람들은 이 사건을 이렇게 요약했다.

"도둑질 모의를 목격한 사람이 도둑이야! 라고 외쳤는데, 도둑질 모의자는 한 명도 처벌받지 않고 그 사실을 알린 사람만 죄인이 되었다. 정의는 어디에 있는가?"

오랫동안 검찰 출입을 했던 <한겨레> 이춘재 기자는 2018년 7월 30일 '노회찬, '떡값 검사' 공개로 '검찰의 적' 됐다'라는 제목의 <한겨레21> 기사에서 이 사건을 이렇게 회고한다.

"특히 ‘떡값 검사’는 이니셜로 보도하는 것조차 꺼렸다. 상대가 송사에 능한 법조인이라는 점이 발목을 잡았다. ‘떡값 검사’가 누군지 알면서도 보도 못하는 기자들의 답답함은 한여름 무더위만큼이나 짜증스러운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노 의원 질의는 가뭄의 단비와도 같았다. (중략) 검찰의 엉터리 수사 결과를 비난하는 여론이 빗발쳤지만, 검찰은 한술 더 떠 2년 뒤인 2007년 5월22일 노 의원을 명예훼손과 통신비밀보호법위반 혐의로 기소했다. ‘떡값 검사’로 지목된 안강민 전 서울지검장이 고소한 사건을 핑계 삼아 치졸한 보복을 한 것이다. (중략) 노 의원은 당시 검찰 주류들 사이에서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엘리트 검사들을 삼성 떡값이나 받아먹는 비리 집단으로 전락시킨 당사자였기 때문이다. 수사팀을 지휘한 황교안(당시 서울지검 2차장) 전 총리는 당시 언론 브리핑 때 ‘경기고 동문들이 (같은 동문인) 노회찬 욕을 많이 한다’는 말을 불쑥 꺼내기도 했다. 안강민, 홍석조 등 녹취록에 등장하는 검사들 중 상당수가 경기고 동문이었다."(☞ 관련 기사 : <한겨레21> 2018년 7월 30일 자 '노회찬, '떡값 검사' 공개로 '검찰의 적' 됐다')

3.

'삼성 X파일' 사건 변호인들이 서초동 이남장에 다시 모인 것은 2009년 12월 4일 이후 처음이다. 그날은 노회찬이 '삼성 X파일' 떡값 검사 명단 공개 사건 2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날이다. 기쁜 날이었다. 비록 한때였다고는 해도 정의가 살아있다는 느낌이 충만했다.

ⓒ노회찬재단

승소할 경우를 대비해 준비해온 플래카드 '삼성 X파일 진실규명을 위해 나선 국민 모두의 승리입니다'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은 노회찬과 당동지들 그리고 변호인단은 법원에서 가깝던 이남장 2층 방을 빌려 자축의 술잔을 높이 들었다. 뉴스를 들은 지인이 멀리 울산(?)에서 와인을 택배로 보내오기도 했다. 이날 노회찬이 트위터에 남긴 글이 있다.

"서초동 설렁탕집입니다. '삼성 X파일' 사건 항소심 모든 항목 다 무죄선고 나왔습니다. '사필귀정'입니다. 트윗터 동지들의 성원 덕분입니다. 감사합니다. 늘 처음처럼 나아가겠습니다."

▲ 故 노회찬 의원의 트위터 계정(@hcroh) 이름은 '노회찬재단'으로 바뀌었지만, 2009년 12월 4일 2심 승소를 자축하는 트윗과 지지자들의 응원은 지금도 남아있다.

그러나 뒤이은 3심에서 무려 대법원이 2심의 무죄판결을 뒤집었다. 당시 주심을 맡은 양창수 대법관은 "녹취록의 대화 시점은 노 의원이 내용을 공개한 시점으로부터 8년 전의 일"이라며 "이를 공개하지 않는다고 공익에 중대한 침해가 발생할 가능성이 현저하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을 유죄의 한 이유로 들었다. 이춘재 기자의 표현을 빌리면, 과거사이기 때문에 '비상한 공적 관심 대상'이 아니라는 "괴상한 논리"를 갖다 댄 것이다.

"오래전 일이니까 굳이 떠들 필요가 없었는데 떠들었으니 유죄"라는 말일까? 아무튼 대화에 등장한 'K1' 검사(고교평준화 이전 최고 명문고로 여겨진 경기고 출신 검사)들은 훗날 별일 아니었다는 듯이 법무부 장관이 되고 차관이 되고, 못해도 검사장이 되었다.

- 다시 기억하기 싫을 수 있겠지만, 이렇게 모였으니 '삼성 X파일' 사건 재판으로 돌아가 볼까요?

"삼권분립의 민주주의 국가에서 사법부의 법률적 판단은 존중받아야 합니다만, '삼성 X파일' 사건이 국민참여재판에 맡겨졌다면 유죄가 나올 수 있을까요? 저도 법률가이지만 무죄가 나올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 당시에도 검찰, 재벌 등 권력과 자본에 맞선 노회찬에 대한 한국 주류 엘리트 집단의 가혹한 보복이라는 해석이 일반적이었습니다. 일부 검찰 엘리트의 보복심리가 사건 2년 뒤의 기소를 낳았고, 법조계 주류의 노회찬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판결에 암묵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결코 비합리적 의심이 아니었습니다.

"사실심리를 하는 1심의 판결부터 이상했지요. 국회의원이 국회에서 공개 질의한 보도자료 내용을 국회의원 홈페이지에 게재한 것이 통신비밀보호법 위반이라고 했습니다. 이 인터넷 시대에 말입니다."

- 반면 2심에서 무죄가 나온 것은 다른 의미에서 의외였습니다. '사필귀정'이란 생각과 함께 '사법부에도 용기 있는 판사가 많구나' 하는….

"당시 판사님(서울중앙지법 형사항소8부 이민영 부장판사)은 퇴직을 앞두고 있었던 분이었습니다. 법률 전문가로서 1심 판결의 문제점을 잘 알고 있었을 거고 법조 엘리트 내부 분위기에 대해서도 나름의 판단이 있었을 겁니다. 판사로서 후회를 남기고 싶지 않았을 것이라는 짐작을 했습니다."

양창수 대법관은 2014년 대법관에서 퇴임했다. 이름을 검색해 보니 판사와 서울법대 교수를 거쳐 2008년 대법관이 됐다. 2018년부터는 대검 검찰수사심의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다. '삼성그룹 경영권 불법 승계 의혹 사건'의 핵심 피의자였던 삼성그룹 최지성 전 미래전략실 실장과 S고 동기동창, 처남은 삼성서울병원 원장이라는 보도들도 보였다. 2009년에는 '에버랜드 전환사채(CB) 저가 발행 사건에서 무죄 판단을 내렸고, 최근에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기소 여부를 1차 판단할 검찰수사심의위원회 위원장으로 참여하려다 여론의 질타를 받고 제척됐다. 오래전 일을 괜히 떠드는 게 아니라 인터넷에 검색하면 쉽게 발견할 수 있는 '팩트'들이다. 자세히 찾으면 이 밖에도 많을 것이다.

이야기를 마무리하면서 한 분이 '노회찬 도둑 고발 사건'을 잘 정리해 주셨다.

"이 사건은 도둑질 모의를 알고 '도둑이야'라고 외친 사람을 법률적으로 처벌할 것인가 말 것인가의 문제였습니다. 처벌하겠다는 검찰의 논리와 그게 무슨 죄가 되느냐는 일반 상식이 정면으로 맞부딪쳤습니다. 판단을 내려야 하는 사법부에도 일종의 도전이었습니다. 피고인 노회찬에 대한 심판이지만 국민의 시각에서 보면 법원 자신도 심판대에 오른 겁니다. 개별 판사 입장에서는 피하고 싶은 재판이었을 겁니다. 선거법 사건이라면 100만 원 미만(의원직 유지형)으로 대충 정리하고 갔을 겁니다. 그런데 이미 말했듯이 노회찬의 행위가 법조계 주류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된 이상 판단 결과는 반드시 '응징'이 아니면 안 되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고위 법관은 나중에 '그것이 의원직을 잃을 정도의 사건인 줄 몰랐다'는 식의 변명을 했다고 합니다. 사안의 검토는 고사하고 신문도 안 보고 살고 있다는 말과 같습니다. 노회찬 재판 결과는 우리 사법부의 양심과 성격의 일면을 고스란히 드러낸 사건이었습니다. 총체적으로 말하면 한국의 검찰, 법원의 주류 엘리트들이 노회찬이라는 한 소수정당 국회의원을 짓밟고 간 사건이었습니다."

- 그렇게 해서라도 검찰과 사법부가 지키고자 한 게 무엇이었을까요? 공수처법을 둘러싼 치열했던 정치 공방이 그 대답을 시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법률 용어에 '위하력'이라는 게 있습니다. 법의 입장에서 일반인은 모두 잠재적 범죄자이기 때문에 위협을 통해 범죄를 예방하는 힘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아이에게 '울면 호랑이가 물어간다'고 겁을 주어 울지 못 하게 하는 것처럼…. '위하력'은 반대로도 작용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대들면 죽는다'는 것을 과시해 보통사람들의 정당한 저항력을 꺾어버리는 겁니다."

"삼성 불법 승계 의혹과 관련한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에 따른 주주 피해 소송'에서도 비슷한 심리를 헤아릴 수 있습니다. 일부 주주들은 삼성을 상대로 소송하기를 꺼립니다. '소송을 해봐야 힘만 들고 결국 질 게 뻔하지 않느냐'는 거죠. 소송하는 대신 삼성의 시혜를 바라는 심리, 삼성의 정관계 로비나 검찰의 무소불위적 수사와 기소권 행사 등은 어쩌면 오랫동안 우리 국민들에게 가해진 역(易) 위하력이 아니었을까요?"

- 주제가 주제이다 보니 이야기가 무거워졌습니다. 끝으로 노회찬과 관련해 남기고 싶은 말씀 있으면 하십시오.

"많은 사람들이 노회찬을 재치 있는 말을 잘하는 촌철살인의 정치인으로 기억합니다만, 진정한 노회찬의 면모는 탁월한 전략가였다는 사실입니다. 장기적인 안목을 가진 진보 정당의 설계자이자 집행자였습니다. 그것도 일말의 사심도 없었던…."

"전략가 노회찬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준 것은 장차 탄생할 진보정당의 의회 진출을 위한 공직선거법 개정을 스스로 이뤄냈다는 사실입니다. 정치학자들 중에서도 진보정당의 의회 진출을 보수정당이 허용한 제도개선의 혜택으로 보는 분들이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노회찬을 비롯한 이재영 등 민노당 정책전문가들이 2001년 현행 공직선거법 위헌소송을 내는 등 적극적인 법률투쟁을 벌인 결과 얻은 결과물(2001년 7월 위헌판결)입니다."

이런 평가에는 충분한 근거가 있다. 노회찬은 1989년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감옥에 들어가 1992년 4월에 출옥한다. 그는 감옥에서 혁명 노선을 진보정당 창당 노선으로 전환한 뒤 창당을 위한 준비 작업까지 구상한다. 그중 하나가 '공직선거법 개정' 투쟁이었다. 장차 자신이 탄생시킬 진보정당의 의회 진출을 위한 법적 교두보를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실제로 노회찬은 1996년 친구 이종걸(전 의원)의 조력을 받아 당시 1인1표제의 전국구 의원 선거제도에 대한 위헌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다. 이 위헌심판 제청은 절차상의 하자를 이유로 각하되었지만, 그 뒤 노회찬이 주도한 민노당 선거법 개정 투쟁을 보면 노회찬의 장구한 심모원려를 느끼게 하기에 충분하다.

"당시 그 위헌심판 신청서를 읽어본 분들이 있었는데 칭찬이 자자했다고 합니다."

- <노회찬 평전>을 쓰시는 분은 꼭 그 이유서를 구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2002년 대선 때는 권영길 후보를 대선후보 TV 토론회에 내보내는 걸 당의 사활적 문제로 보고 민노당을 제외한 보수양당만의 TV 토론회 중지 가처분 신청을 낸 것도 노회찬의 생각이었습니다. 결국 부담을 느낀 방송사들이 양당 중심의 토론회를 민노당을 포함한 다자 토론회로 바꾸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알다시피 대선 토론회에서 나온 권영길 후보의 '국민 여러분 살림살이 좀 나아지셨습니까'와 같은 멘트가 민노당에 대한 지지와 격려로 이어지면서 2년 뒤 17대 총선에서 '10석 기적'이 만들어졌습니다. 민노당의 총선을 설계하고 총지휘한 노회찬은 비례대표 말(末) 번으로 10번째 민노당 의석을 채웠고요. 적어도 그 의석은 노회찬 자신이 스스로 쟁취한 것이었습니다."

▲ 설렁탕집 '이남장' ⓒ노회찬재단

4.

설렁탕은 어디서 유래한 음식일까? 국물이 뽀얀 게 눈 색깔 같다고 해서 '설농탕(雪濃湯)'이라는 것은 억지에 가깝고, 임금이 풍년을 기원하며 제사를 드리는 '선농단(先農壇)' 의식에서 나왔다는 설은 조선시대 유교제례를 살펴볼 때 후대의 창작일 가능성이 높다.

기자가 보기엔 고려시대 몽골에서 전래되었다는 몽골 기병 기원설이 가장 사실에 가까운 것 같다. 몽골어 사전인 <몽어유해(蒙語類解)>에 따르면, 몽골에서는 맹물에 고기를 넣어 끓인 '공탕(空湯)'을 '슈루'라고 읽는다고 한다.(<한국요리문화사> 이성우, 1984). <방언집석(方言輯釋)>이란 사전에 따르면 공탕을 한나라에서는 '콩탕', 청나라에서는 '실러', 몽골에서는 '슐루'라고 한다. 따라서 이 실러·슐루가 우리나라에서는 '설렁'탕이 되었다는 설명이다.

중국 탕요리 훠궈, 일본의 샤부샤부 등이 모두 몽골 기병의 이동식에서 기원했듯이 설렁탕도 고려시대 몽골 군대를 통해 우리나라에 전해진 요리법일 가능성이 크다. 불교국가였던 고려시대에는 조선시대처럼 육식이 성행하지 않았다. 소를 잡는 법이나 소고기 요리법이 몽골에서 전해지면서 설렁탕도 점차 우리 환경이나 입맛에 맞게 변해 마침내 한국 음식이 되었을 것이다.

"설렁탕은 서울의 명물음식으로서 일찍부터 대중음식으로 시판되었다. 설렁탕집에는 항상 2, 3개의 큰 무쇠솥에 설렁탕이 끓고 있었다. 그 옆에는 설렁탕을 골 때 넣었던 여러 부위의 편육을 부위별로 썰어서 채반에 담아놓았다. 손님이 설렁탕을 청하면 뚝배기에 밥을 담고 뜨거운 국물로 토렴하여 밥을 데운다. 그다음에 국수 한 사리를 얹고 채반에 놓여 있는 고기를 손님의 요구에 따라 집어넣고 뜨끈뜨끈한 국물을 듬뿍 부어 내주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노회찬재단

- 살펴보았듯이 노회찬의 죽음은 법의 이름으로 쳐놓은 악마의 덫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더욱 그의 마지막 선택을 안타까워하는 분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한이 왜 없겠습니까마는, 20년 이상 지켜봐 온 사람으로서 노회찬은 진보정당 노선의 주창자로서 스스로를 독립적인 존재로 설정하고 행동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조력을 요청하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동지로서 아쉬울 수 있겠지만, 그의 선택은 당 그 자체였던 노회찬의 숙명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불법 정치자금이냐 아니냐를 놓고 법적 유불리를 따질 사안도 아니고 그럴 생각도 없었기에 법률가의 조력을 구한다는 생각은 처음부터 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 분 마음속에 심판대가 있었다면 역사의 법정뿐이었을 겁니다."

이날 많은 분들이 체면도 마다하고 소폭을 마구 들이켰고, 몇몇은 눈물도 펑펑 쏟아냈다.

"오랜만에 참았던 이야기를 하니까 후련한 점도 있네요. 힐링이 되는 것 같고, 정화가 되는 것도 같고…."

"언제가 마석 모란공원묘지에 갔을 때 한 교사가 초등학생들을 이끌고 무덤들을 돌며 우리나라 민주화 운동의 역사를 열정적으로 설명하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곳에 노회찬도 있습니다. 노회찬의 생물학적인 삶은 종결되었으나 노회찬의 정치적·사회적 삶은 계속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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