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2월 말 2차 북미정상회담에서 이른바 '하노이 노딜'이 나온 지 3주 후, 나는 미국에서 스티븐 비건 대북정책 특별대표이자 국무부 부장관의 친구와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그는 조지 W. 부시 행정부의 대북정책에 관여했던 인물로서 비건에게도 대북정책을 자문했었다. 나는 "비건에게 북한측 파트너와 협상하는 것이 힘들까요, 트럼프 행정부 내부 사람들과 협상하는 것이 힘들까요?"라고 물었다. 그가 내놓은 답변은 "두 가지 모두 만만치 않은 일이죠." 였다.
퇴임 한 달여를 앞둔 비건은 지난 10일 아산정책연구원 초청 강연회에서 소회를 밝혔다. 그는 "(하노이 노딜에서) 우리가 첫 번째로 배운 교훈은 실무 레벨에서의 협상이 정상회담의 여건을 마련하기 위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이다. (중략) 북한 실무 협상단에 더 권한이 있었다면 커다란 진전을 이룰 수 있었을 것이다"라며 북한 실무단이 "비핵화에 대한 권한을 위임받지" 못했고, 그래서 "비핵화에 대해 논의하는 것이 금지돼 있었기 때문에" 실패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는 '절반의 진실'이다. 협상 권한을 위임 받지 못한 것은 비건 역시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도 밝혔던 것처럼, 하노이 정상회담을 앞두고 북미 실무회담에선 합의문 초안이 합의되었고 트럼프가 서명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트럼프는 서명 대신 '노딜'을 선택했다. 어떻게 된 일일까? 이 궁금증은 존 볼턴 당시 백악관 안보보좌관의 회고록과 밥 우드워드의 책 등을 통해 풀 수 있다.
볼턴은 비건이 북한과의 실무회담을 통해 마련한 북미공동성명 초안을 "북한이 쓴 것 같다"며, 마이크 펜스 부통령과 믹 멀베이니 대통령 비서실장 등과의 협의를 거쳐 '수용 불가'라는 결론을 내렸다. 대신 볼턴은 자신이 주도해 만든 '비핵화 정의' 문서를 트럼프에게 보고했고 트럼프로부터 "그걸 정리해서 나한테 가져오라"는 지시를 받았다.
하노이에 도착한 트럼프는 "빅딜, 스몰딜, 노딜"을 두고 저울질했고, "여자가 차기 전에 먼저 차야 한다"며 노딜을 선택했다. 이 과정에서 비건은 철저하게 소외됐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기실 북미협상 재개의 마지막 기회는 2019년 6월 30일 남북미 정상들의 판문점 회동을 통해 마련되었다. 이 자리에서 트럼프는 김정은 위원장에게 한미연합군사훈련을 중단하겠다고 약속했고 김정은은 북미실무회담 개최에 동의한다고 화답했다. 그런데 안 한다던 한미연합훈련은 했고, 한다던 북미실무회담은 연기된 끝에 또다시 '노딜'로 끝났다. 어찌된 영문일까?
판문점 회동 다음날 <뉴욕타임스>는 특종(?)을 내보냈다. 제목은 "새로운 회담에서 미국은 북한의 핵동결을 추구할 듯(In New Talks, U.S. May Settle for a Nuclear Freeze by North Korea)"이었다.
보도 주요 내용은 "판문점 회동 몇 주 전부터 트럼프 행정부 일각에서 새로운 협상의 기초를 창출할 수 있는 진지한 아이디어가 만들어지고 있다"며, "핵동결이 그 개념"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이는 암묵적으로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간주하는 것으로써 트럼프 행정부가 결코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말했던 것"이라고 혹평했다. 특히 이 매체는 북핵 동결 아이디어는 "트럼프가 '재앙'이라고 비난했던 이란 핵협정에도 한참 못 미친다"고 평했다.
볼턴은 이 보도를 주목했다. "하노이에서 트럼프가 거절해서 묻힌 것으로 생각했던 아이디어가 이전보다 더 나쁘게 되살아났다"고 본 것이다. 그리곤 트위터를 날렸다. "NYT의 보도를 호기심을 가지고 읽었다. 나를 포함해 NSC의 어떤 사람도 '북핵 동결 추구'를 검토하지도 들어보지도 못했다. 이것은 대통령을 궁지에 몰아넣기 위해 누군가 꾸민 괘씸한 시도이다. 여기엔 결과가 있어야 할 것이다."
이 트윗에 대해 트럼프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지만 그의 절친인 린지 그레이엄 공화당 상원의원이 리트윗을 하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볼턴이 북핵 동결을 트럼프 행정부가 받아들일 수 있는 결과라도 보도한 NYT에 대해 강한 반격을 가한 것을 보게 되어 기쁘다."
볼턴은 북핵 동결 아이디어를 낸 사람으로 스티븐 비건을 지목했고 그를 대북정책 결정과정에서 소외시키려고 했다. 그는 이 문제를 비건의 직속상관인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에게 집중적으로 제기했다. 그리고 볼턴에 따르면, "우파로부터의 공개적인 공격"을 걱정한 폼페이오는 비건에게 "대북정책에 관한 국가안전보장회의(NSC) 회의에 참석하지 말라"고 말했다고 한다.
또 한 가지 중요한 대목이 있다. 북한은 북미실무회담 개최 시기로 8월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런데 북미실무회담이 있었어야 할 8월은 한미연합훈련 실시와 이에 대한 북한의 격렬한 반발이 대신하고 말았다.
한미훈련 발표 소식을 접한 김정은은 8월 5일에 트럼프에게 친서를 보냈다. 그는 남한 국방부 장관을 격렬하게 비난하면서 "나는 도발적인 연합군사훈련이 중요한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조미실무회담에 앞서 취소되거나 연기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며 "이 훈련은 누구를 겨냥한 것이냐"고 트럼프에게 따져 물었다. 이를 두고 우드워드는 김정은이 "낙담한 친구나 연인" 같았다고 표현했다.
비건은 아산정책연구원 강연에서 "북한은 협상의 장애물을 찾는 데에 너무 자주 몰두했다"며 강한 유감을 표했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으로부터 미국, 보다 정확하게는 한미 양국도 자유로울 수 없다. 미국 대통령이 치우겠다고 약속한 협상의 장애물, 즉 한미연합훈련 중단 약속을 한미 양국 정부가 뒤집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고하고 고생한 비건에게 묻고 싶다. 한반도 운전자론을 자처했던 문재인 정부에게도 묻고 싶다.
트럼프의 약속대로 2019년 8월에 예정되었던 한미연합훈련을 취소하고 그 달에 북미실무회담이 열렸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북미 협상의 최대 장애이자 비건의 협상 권한을 빼앗으려고 안간힘을 썼던 볼턴이 다음 달에 해고되었기에 더욱 안타까운 심정으로 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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